장소와 장소상실 논형학술총서 14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 논형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출판사 논형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장소란 무엇인가. 존재가 있어 장소가 창출되는가, 혹은 장소가 있어 그곳에 존재가 위치할 수 있는가. 세계의 일부, 좌표 혹은 임의의 지정값으로 설명되지 않는 공간이 장소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혹은 언제부터인가. 인간 없는 장소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나, 장소 없는 인간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과연 그러한가?

p.47 개인은 자신의 공간의 중심에 있는 자신의 장소에 있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개인도 그들의 지각 공간과 장소를 가진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은 이런 자신과 타인들의 공간과 장소들이 전체 사회 및 문화 집단의 지속적이고 어느 정도 합의된 생활 공간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p.73 하이데거는 “공간은 자신의 존재를 장소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지 ’공간‘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다. (...) 인간이 장소와 맺는 본질적 관계는, 그리고 이 장소를 통해서 공간과 맺는 본질적 관계는, 인간존재의 본질적 속성인 (...) 거주에 있다.”고 말했다.


어느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이는 성‘은 장소인가? 특정 좌표에 매이지 않으나 강력하게 연계되어 있는 공간 또한 장소로서 의미를 갖는가? 엑소더스, 집단이주로 ‘뿌리뽑힌’ 이들이 기억하는 장소가 이미 그 이름과 지표가 파괴되어 흔적없이 사라졌더라도 여전히 의미를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장소를 점유함으로서, 혹은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권력은 인간이 그 자신의 실존적 토대를 마치 나무가 자라고 짐승이 영역을 형성하듯 이곳 혹은 그곳이 변할지언정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장소에 기반해 형성한다는 주장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가능하다면, 추방과 강제이주의 경험이 정체성의 근간을 흔드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p.82 개인이나 문화에 의해 정의되는 장소들은 그 위치, 활동, 건물들이 의미를 가지고 또 잃어버리면서 성장 번영하고 쇠퇴하게 된다. 현재의 장소는 이전의 장소에서 성장하거나 과거의 장소를 대체하면서 그런 의미들의 진전이 있을 것이다. (...) 사라져버리고 변화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장소가 영구적이라는 감성을 강화시키는 의식과 전통이다.


이 책이 쓰여진 때로부터 벌써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조금쯤 과거에 대한 낭만적 향수를 품은 것처럼 느껴지는 저자의 의견과는 달리, 오늘날 산업화가 진행된 국가의 지리 형성은 자본에 좌우되기도 한다. 어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멸하는 변두리 혹은 폐허로 낙인찍어 파괴하거나 서서히 잊혀지게 하는 것 또한 자본과 시장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할 수 있겠다.

p.85 장소의 본질은 무시간성이나 시간의 지속성에 있지 않다. 장소의 무시간성이나 지속성이 중요하고 불가피하지만, 이것들은 우리의 장소 경험에 영향을 주는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p.287 장소는 인간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가 융합된 것이고, 우리가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의미 깊은 중심이다. (...) 장소는 추상이나 개념이 아니다. 장소는 생활 세게가 직접 경험되는 현상이다. 그래서 장소는 의미, 실재 사물, 계속적인 활동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개인과 공동체 정체성의 중요한 원천이며, 때로는 사람들이 정서적. 심리적으로 깊은 유대를 느끼는 인간 실존의 심오한 중심이 된다. 사실 장소와 인간의 관계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필수적이고, 다양하며, 때로는 불쾌한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장소‘와 유대관계를 맺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점차 과거의 것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물리적 공간에 인간 내적인 요소, 이를테면 지각, 인식, 감정과 같은 것들이 투영되어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은 일시적이고 매우 휘발되기 쉬운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미래의 장소 개념은 획일화된 사회의 좌표공간으로 귀결된 것인가? 인간은 장소-없음의 동물이 될 것인가, 혹은 장소는 일시적인 소비의 대상이 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소규모 집단과 세대를 이어 전해지는 역사가 부여된 ‘의미있는 장소’가 여전히 ‘의미’를 가질 것인가.

저자는 마지막까지 명확한 미래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현재의 독자가 저자에게 어떤 답을 돌려줄지, 이후의 세계가 무장소의 지리를 전제로 할지는 오롯이 현세대의 몫이리라.

p.298 의미 있는 장소와 관련 맺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욕구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욕구를 무시하면서 무장소의 힘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환경이 되고 말 것이다. (...) 우리가 사는 세계가 무장소의 지리가 될 것인지, 의미 있는 장소들의 지리가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도 온전히 우리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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