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놀 - 도덕적 선입견에 대한 생각들 세창클래식 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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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단언컨대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많이, 가장 크게 오독되는 철학자를 꼽으라면 니체!를 외치는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러니 '억울한 철학자 대회'가 열린다면 니체는 사흘밤낮을 울어제껴도 말릴 수 있는 이가 몇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좋아하는 철학자로 마키아벨리와 니체를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장 도망치라는 우스개가 다 돌겠는가. (솔직히 이건 나도 좀 움찔한다. 그치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어째서일까. 아마 겉핥기로 입혀진 이미지에 홀려 무작정 돌진했다가 맛도 채 보기 전에 나온 사람이 수두룩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망치를 든 철학자', '신은 죽었다', '노예의 도덕' 등 자극적인 수식어에 솔깃하기 때문일까? 각자의 사정이야 알 수도 알 바도 아니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그의 철학이 그의 생애가 그러했듯 타오르는 것처럼 치열하기 때문이리라. 세상을 향해 망치를 휘두른 철학자, 삶의 많은 순간에 주저앉고 붕괴된 철학자, 누구보다도 뜨겁게 타오르고 종내엔 자기자신마저도 불사른 철학자, 누군가에게는 신성모독자, 또 누군가에게는 광인, 누군가, 나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서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 누군가에게는 신성모독자, 또 누군가에게는 광인, 누군가, 그러니까, 나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서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 니체.

이 책은 잠언집이지 교훈집이 아니다. 모든 문장과 글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은 니체에게도, 니체가 지향하는 이상향의 인간에게도 모욕적인 일이 될 것이다. 매순간은 아니더라도 자주, 돌부리에 걸려넘어지듯이 읽었다. 모든 꼭지를 소개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으니 인상깊었던 문장과 주석, 그간의 메모를 일부 적어둔다.

p.53 허무주의의 도래는 일종의 '부질없다'는 인식이 와 주는 것이다. (...) 모든 것은 그 부질없다는 말로 절망의 감정에 휩싸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의 상태는 극복을 요구한다. (...) 부질없음을 극복하기 위해 그 부질없던 감정을 짓밟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극복을 위해서는 극복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잔인함이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메모. 허무주의는 궁극적으로 투쟁, 투지의 철학인가?)
p.67 미덕으로서의 정교해진 잔인함. (...)우월의 도덕이 결국에는 정교해진 잔인성에 대한 쾌감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너무도 역설적이고 거의 고통스러울 만큼 새로운 사실이기 때문이다. (...) 두 번째 세대에서는 이미 잔인함의 쾌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습관 자체에 대해서만 쾌감이 존재한다. 그러나 바로 이 쾌감이 '선'의 첫 번째 단계다.
p.133 동정을 일삼는 기독교인. 이웃의 고통에 대한 기독교적 동정의 이면에는 이웃의 모든 기쁨, 즉 그가 원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기쁨에 대해 깊이 의심하는 측면이 있다. (메모. 전능하고 선한 유일신의 세계에서 타자에 대한 도덕은 배제와 처벌을 전제하는가?)
p.232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태에 대항해서, 그동안 이기적인 것으로서 비난받아온 행위들을 행할 수 있는 선한 용기를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그것들의 가치를 회복시키고 싶다. (...) 우리는 행위들과 삶의 모든 모습에서 악한 것으로 인식되는 겉모습을 거둬 낼 것이다! (...) 사람이 자신을 더 이상 악하게 간주하지 않으면, 사람은 악하기를 그만둘 것이다! (메모. 니체가 양차대전기를 살아냈다면 그의 인간본성론은 지금 전해지는 것과 다른 내용이었을까?)
p.402 가장 위험한 망각.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잊는 데서 시작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사랑할 만한 어떤 가치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으로 끝낸다.
p.427 자신의 비참함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의 품위와 중요성의 감정을 만들어내기 위해 희생될 타인을 구하는 자들은 긍지에 찬 사람들로 보인다. (...) 그들은 잠시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넘어서기 위해 그들 주변의 비참함을 필요로 한다! (메모. 현대 1인미디어의 범람, 자극적인 고통의 전시와 장기적이고 다양한 삶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계발론이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이 비판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참 칼침 맞아 죽지 않은 게 용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신랄하다. 순간순간 의구심을 품은 부분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무례하게까지 느껴지는 비판들에서 호소와 절박함을 읽어내게 된다. 그의 외침이 끓어넘쳤던 시대와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을 곱씹어보노라면, 그래, 조용히 중얼거리게 된다. 일상의 어느 순간에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깨닫는 것처럼.
그러니 앞서 이야기한 '꺼림칙한' 이미지를 정확히 말하자면, 니체가 아닌 니체의 일면을 곡해하는 사람에 대한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투라도 짜라두짜도 니체도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지배론이나 모든 것을 근성으로 치부하는 자기계발론을 말한 적이 없다.
니체를 사랑하는, 그의 칼날같은 비판을 사랑하고 그에게서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는 승자의 논리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연민과 삶에 대한 사랑을 읽어내는 이와 같이, 지쳐 쓰러져 하염없는 채찍 아래 늘어진 나귀를 끌어안고 통곡했다던, 무너져내린 마음의 철학자가 세상에 전하는 호소에 마음아파하고, 부끄러워하고, 끄덕이고, 분노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니체를 차별과 혐오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덧. 목차에서는 본래 원문에는 순서가 없었으나 출판사가 전집 발간 시 편집상의 편리함을 위해 차례를 더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의 의도대로라면 순서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의미리리라. 이 판본 또한 분권화된 목차를 따르고 있으나 마음 내키는 대로 앞뒤를 오가며 읽어도 좋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목차에 따라 읽는 것과 그날그날 펼쳐지는 부분에서 뛰어넘고 돌아가며 읽는 것 두 가지를 다 해보았으나 경우마다 색다르게 좋았으니 각자의 성향에 맞게 읽기를 권하고 싶다.
자칫 잘못 이해하기 쉬운 원문 곳곳에 옮긴이의 주가 더해져 이해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원문 텍스트에 대한 보충설명 뿐만 아니라 원저 출판 당시의 사회상, 역자의 개인적인 견해가 함께 담겨있어 깊고 넓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니체의 『아침놀』과 역자의 『아침놀 주해』를 함께 읽는 느낌. 니체과 그의 저작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선뜻 펼치기엔 겁이 나는 독자에게 친절한 발판을 제공해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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