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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식당 - 요리사 박찬일의 노포老鋪 기행
박찬일 지음, 노중훈 사진 / 중앙M&B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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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개장은 개장국의 변용이다. 여러 문헌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개를 싫어하는 일본인들 때문에 개고기 섭취가 제한되자 자연스레 육개장이 퍼졌을 거라고 한다. 개장국은 여름 복날에 먹는 음식이니, 육개장도 여름 한 철 손님이 더 많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먹는 육개장 한 그릇에는 오랜 우리 풍습의 힌트가 있는 셈이다.

해방 전후에는 자기가 먹을 찬밥을 가지고 이 집에 오는 풍경도 흔했다. 그 밥을 받아 뜨거운 국물에 여러 번 헹궈 따뜻하게 한 후 국물을 말아냈다. 그걸 ‘토렴’이라고 한다. 세계 음식사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요리 기법이다. 보온 밥솥이 없던 시절, 아침에 해둔 밥은 식게 마련이었다. 이것을 그대로 국에 넣어 말면 전체적으로 국물이 미지근해지고 맛이 떨어진다. 그러나 찬밥에 뜨거운 국물을 여러 번 부었다 헹궈내기를 반복하면 밥알 속까지 따듯해지면서 국밥의 온도가 먹기 적당하게 변하는 것이다.
토렴에는 또 다른 맛의 비결이 숨어 있다. 뜨거운 밥을 그대로 말면, 전분이 녹아 국물이 탁해져서 맛을 버리게 된다. 오히려 밥이 적당히 식어서 단단해진 다음 토렴하면 온도도 맞고, 밥 알갱이의 씹히는 맛도 살아 있는 최상의 상태가 된다.

한국에서 순대는 그야말로 흔한 음식이다. 집에서 만들지는 않지만, 외식 품목으로 몇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시장에는 어디든 순대 골목이 있고, 시중에서도 순댓국밥을 파는 집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역사에서 순대는 그 근원을 찾기 어렵다. 심지어 <동아일보> 기사 검색을 해보면 ‘순대’라는 말이 등장하는 건 1962년 3월 14일자가 최초다. 김환기 화백이 노르망디의 소시지 요리를 소개하면서 ‘순대튀김’이라고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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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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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디저트 같은 책이다. 타르트 같달까. 분량이 짧다. 술술 읽히는데 내용은 나름 진하다. 여행에 대한 작가의 철학을 담고 있다. 카페에서 옆자리 사람들의 대화를 열심히 엿들은 것 같은 감상이다.

김영하의 소설은 초기 단편집들과 빛의 제국, 살인자의 기억법 등을 읽었다. 단편집은 재미있었고 장편들은 별로였다. 대학교수를 한 사람이고 유복하게 자란 엘리트처럼 느껴진다. 구정물이 없다. 날이 벼려져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잘 사회화돼서 주변에 적당히 인기 많을 것 같은 사람. 장편을 읽다가 너무 무난하게 느껴져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었다.

오랜만에 삼키기 좋은, 부드러운 글을 만나서 맛있게 해치웠다. 산문은 가끔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일상이 지치고 힘들때 미음 같은 양식이 필요할때..

여행을 소설에 비유한 것이 와닿았다. 일상의 잡음과 무질서를 배제하고 선택적으로 구성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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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전력 OL 살인사건 걸작 논픽션 14
사노 신이치 지음, 류순미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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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같은 책. 올해 읽은 또다른 논픽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쌍벽을 이루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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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배경을 가진 일본 전력 업계의 최대 임무중 하나가 최대출력 21만5000킬로와트라는 당시로선 엄청난 에너지를 창출하는 미보로댐 건설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미보로댐 건설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보로와 같은 대규모 댐 건설이 일본의 전력업계를 경제의 선두주자로 이끎과 동시에 가전제품 제조사를 비롯한 전기업계에 전에 없던 호황을 안겨준 원동력이 된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아버지를 둔 딸이 미보로댐과 땅속줄기로 연결된 마루야마초의 러브호텔 골목에 밤마다 나타났고 그러던 어느 날 밤, 흉악한 힘에 의해 목 졸려 살해당했다.
그녀가 마루야마초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귀갓길에 있는 동네라서가 아니라 그녀를 끌어당기는 강한 자력과 같은 것이 이곳에 있었던게 아닐까. 그리고 그녀는 호수 바닥에 가라앉은 오쿠히다 마을처럼 이 거리의 밑바닥으로 잠기고 말았다.

도쿄전력 여직원이란느 가면을 벗어 던지고 불나방이 된 야스코는 사카구치 안고가 <타락론>에서 ‘인간은 제대로 떨어지고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구원할 수 있다’고 서술한 대목을 상기시켜주었고 나를 감동시켰다.
나는 야스코의 기이한 행동에 마음이 움직인 것이 아니다. 타락으로 가는 길이 너무나도 한결같아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괴물 같은 순수함에 턱없이 가슴이 떨려온 것이다.

네팔에서 일본으로 돈을 벌러 온 노동자와 도쿄전력에서 종합직으로 입사한 게이오대 경제학부 출신의 엘리트 여직원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서로 절대 만날 가능성이 없는 상대였다. 그 두 사람이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마루야마초에 떨어졌고 마루야마초의 강력한 자력이 두 사람을 충돌시켰다. 두 사람의 충돌은 스스로를 축생도에 침윤시킨 야스코의 고고하기까지 한 ‘대범한 타락’과 고빈다의 천박하고 비루한 ‘소심한 타락’의 대조를 수정에 비친 그림처럼 또렷하게 드러냈다. 이 재판을 빠짐없이 방청해온 내게는 그렇게 그려졌다.

인간은 살아내고, 인간은 타락한다. 그 외에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편한 지름길은 없다. (사카구치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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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클럽 열린책들 세계문학 224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임종기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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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클럽, 시체 도둑, 병 속의 악마, 말트루아 경의 대문 ... 수록. 어른을 위한 환상 동화. 그로테스크하다. 난해하지는 않다. 낭만적인 대사들. 고딕풍의 묘사. 마술적인 사건.

“나를 위해서라고?” 울프가 소리쳤다. “오, 왜 이래! 내가 보기에 그건 순전히 너 자신을 지키려고 한 일이야. 생각해봐. 내게 문제가 생기면, 넌 어떻게 될 것 같나? 이 두 번째 작은 사건은 분명히 첫 번째 사건에서 연유한 거야. 그레이 씨는 갤브레이스 양의 속편이라고. 시작하지 않았으면 멈출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일단 시작을 했으면 그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거야. 그게 진리야. 사악한 자에게 휴식 따위는 없어.”
- 시체 도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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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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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한 공예품 같은 소설. 피가 섞인 우유가 주는 선연한 충격. 독백, 편지, 내면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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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완성한 야심작을 먼저 동급생인 비디오 친구들에게 시험해보았습니다. ‘굉장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 A는 불만스러웠어요. 이 녀석들은 위대함을 몰라. 그렇다면 알게 될 녀석에게 보여줘야지. 그래서 제게 가져왔던 겁니다. 제 반응에 A는 만족했습니다. A는 착각하고 있었어요. 제가 위험하다고 느낀 건 지갑이 아니라 A의 윤리관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몸부림을 쳐도, 진실이 밝혀지면 조금이라도 출구가 보일줄 알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일기를 읽은 지금, 나는 출구는커녕 내가 디딜 발밑조차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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