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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 손창섭 단편선 ㅣ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2
손창섭 지음, 조현일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평점 :
현진건의 빈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김유정의 동백꽃,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 등등.....
입시를 위해 달달달 외다 시피 공부했던 우리나라 대표단편작가들과 대표작품들이다.
아마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었던 문제들이 바로 작가와 대표작이 잘못 짝지어 진 것은 따위의 문제였을 거다.
무슨 공식처럼 뇌리속에 박혀 이날 이때까지 손창섭하면 잉여인간이 자동적으로 튀어 나오는 것이다.
난 위에 열거한 소설들을 거의 다 읽었다. 그것도 고등학교 시절에.....
당시 우리집에는 한국대표단편문학선 한질 50권의 책이 있었는데 세로쓰기에 한문으로 된 제목은 옆에 한글로 씌여져 있지도 않아서 제목이 뭔지도 모른채 소설을 읽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현대문학 수업시간... 당시 선생은 고전문학을 같이 가르치던 늙수그레한 영감으로 담임도 맡지 않아서인지 우리들을 무자비하게 체벌하던 다른 선생들과는 달리 조용하고 별로 의욕도 없는 그런 교사였다.
수업시간에 그 선생이 내가 앞에서 열거했던 것 처럼 작가들과 대표작들을 읊조리고 있을 때였다.
현진건의 빈처를 설명하다가 그 외에 '불'이라는 작품도 있다라고 설명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난 그 작품을 읽어보았고 내용이 약간 야하면서도 해학적이라 나 혼자 빙긋이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포착한 선생이 ' 너 이거 읽어 봤어? 줄거리 아니?'라고 대뜸 물었다.
'불'은 어린나이에 민며느리로 시집온 주인공이 하루종일 고된 시집살이에 시달리다 지쳐 집에 돌아오면 밤에는 또 나이차이 많이 나는 남편에게 성적으로 시달리다 못해 자신의 고생의 원인이 남편과 같이 자는 신방이라고 생각하고 집에 불을 지른다는 내용이다.
별로 길지도 않은 내용이라 떠듬떠듬 그렇게 설명했더니 그 선생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당시에 입시공부외에 문학작품을 읽는 학생은 거의 없었고, 그 의욕없는 선생은 학생들을 꽤나 냉소적인 시각으로 무시하듯이 바라보며 수업을 대충 형식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그 다음부터 나의 고난이 시작되었는데 이 선생이 수업시간에 '너 이거 읽어 봤어?'라는 질문을 수시로 던졌기 때문이다.
물론 한동안 그러다가 내가 몇번 대답을 못하자 시들해 지긴 했지만 어쨌건 한동안 나는 집에 있는 한국대표단편문학선을 억지로라도 뽑아들고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연전에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중 한국단편문학선1,2권을 읽었는데 내가 꽤나 많은 작품을 이미 그 당시에 읽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창섭 단편선 '비오는 날'을 읽으면서 그 중 몇 작품은 읽다보니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게다가 잉여인간은 그동안 내가 읽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것두 그 당시 읽었던 거였고..
손창섭은 일제시대와 해방전후 한국전쟁등에서 작가 자신이 무수히 고생을 했던 사람으로 그가 쓴 작품의 대부분이 허무주의에 입각한 냉소적인 작품이라 인상적이었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작가자신이 겪은 고난을 소재로 한 자신의 분신으로 전후 비참한 상황에 처한 인간군상들의 처절함과 무기력함을 대표하고 있다.
근데 근 20여편에 이르는 그의 작품들을 죽 읽다 책 말미에 가서야 나오는 대표작 '잉여인간'을 읽으며 의문이 들었다.
마치 그 작품만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생경한 느낌이 들었단 말이다.
나머지 작품들의 주인공은 일관되게 전후 사회에서 낙오되거나 세상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지식인이거나 사회적모순과 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인물인데 반해 '잉여인간'의 주인공인 잘생기고 착한 능력있는 치과의사 '만기'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소설의 '히어로'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이 가장 손창섭적이지 않은 작품이 손창섭의 대표작이 되어 손창섭 하면 잉여인간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게되다니.....아마도 당시교과서를 쓰는 인간들이나 당시 문학계에선 손창섭의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다른 작품들 중에서 대표작을 삼게 되면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미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때문에 잉여인간에 상도 주고 대표작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의 표제로도 선정된 '비오는 날'만 하더라도 지금 시대에 발표되었어도 가능하다고 느껴질 만큼 모던한 작품인데 '잉여인간'에 가면 갑자기 흑백화면의 신성일 엄앵란이 갑자기 튀어나와 손발이 오그라 들듯한 대사를 주고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다.
어쨋든 그 동안 너무 외국문학만 주로 읽은 것 같아 우리 문학도 앞으로는
좀 읽어야 겠다는 생각 이 들어 문학과 지성사의 [한국문학전집] 시리즈나
민음사의 [우리시대 작가총서]시리즈를 많이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