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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불편한 진실 앞에서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며 나 하나쯤 외면해도 괜찮다 하고 침묵한 적이 많다. 모른 척 눈을 감아버리는 건 세상에 맞서는 용기를 내기보단 쉽다. 그래서 주인공 빌 펄롱이 수녀원의 진실 앞에서 보여준 행동은 퍽퍽한 현실 속 사건을 모른 척 지나가고 싶은 내게 잔잔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이 소설은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허구임에도,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하에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며 여자와 아이들에게 불법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던 1980년대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하여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다. 펄롱은 석탄·목재상을 하며 평범한 삶을 살다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수녀원에서 학대받는 여자아이, 세라를 발견한다. 아내와 다섯 명의 딸을 생각해 모른 척 넘어가고 싶었지만, 양심에 따라 세라를 돕기로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24쪽)던 펄롱은 왜 다른 사람들처럼 조용히 입 다물지 않았을까?
펄롱은 미혼모였던 어머니가 가사 일꾼으로 일했던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미시즈 윌슨은 가족도 등 돌린 펄롱의 어머니를 함부로 대하지도 않고 굶주리게 하지 않고 따뜻하게 지내며 일할 곳을 주었다. 펄롱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대하며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게끔 했다. 미시즈 윌슨의 친절한 행동이 없었다면, 펄롱의 어머니도 세라처럼 수녀원의 세탁소에서 착취당하며 살았을 테고 펄롱도 세라의 아이처럼 어머니와 떨어져 어딘가로 입양되었을지 모른다. 하필 어머니와 이름까지 같은 세라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했을 테다. 그랬기 때문에 펄롱은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고 하는 아내 아일린과 달리, 생계를 위협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학대받는 세라를 외면하지 않았다. 펄롱이 보여준 용기는 학대받다 배로강에 몸을 던졌을지 모를 한 아이의 삶을 바꿨다.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103쪽)” 미혼모인 세라를 함부로 대한 수녀원의 수녀들과 펄롱이 미혼모의 아들임에도 따스하게 품어준 미시즈 윌슨 중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 추운 겨울 신발도 없이 차가운 바닥에 있던 세라를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먹으며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 자신의 따뜻한 집으로 데려간 펄롱을 기다리고 있는 게 험난한 고생길이겠지만 사소한 일에도 관심을 기울일 줄 아는 친절한 어른으로 살고 싶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119쪽),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펄롱이 자라면서 받은 사소하지만, 꼭 필요했던 친절한 손길이 세라에게 전해졌듯이 다음 사람에게 퍼져나가기를 바란다.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120쪽)”
짧지만 무언가 암시하는 듯한, 시적인 느낌이 드는 소설을 여러 번 읽으며 ‘사소한’이란 단어가 들어간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 그저 지나쳤던 문장이 새롭게 읽히고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펄롱이었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가?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양심의 소리를 지나치지 않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면 사소하더라도 날마다 친절한 행동을 하나라도 해보는 건 어떨까. 소소한 행동이 모여 조금씩 좋은 세상을 이룰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