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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시가 된다 ㅣ 위대한 도시들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우리는 도시가 된다』는 어떤 이야기인가
- 메가시티 뉴욕의 생사를 건 활극
이 작품은 뉴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자, 뉴욕이 주인공인 이야기이다.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작중 핵심 개념인 도시 화신(化神, Avatar)에 대해 알아야 한다. 원래 화신이란 인간의 몸을 입고 지상에 나타난 신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도시가 된다』에서는 신이 아니라 도시가 인간을 제 화신으로 삼는다. 무슨 계시나 특별한 표시가 나는 것은 아니고, 도시가 ‘생명을 얻어 태어나는’ 순간 화신은 화신으로 선택된다.
뉴욕보다 먼저 태어난 선배 도시로는 홍콩, 런던, 상파울루 등이 있다. 상파울루와 홍콩의 화신은 작중에 등장하고, 런던의 경우 특이한 역사가 있었음이 언급된다. 그리고 도시로 태어나는 데 실패하여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 사례도 있는데, 전설의 도시 아틀란티스나 성경 속 소돔과 고모라, 멸망한 폼페이 같은 곳들이다. 나는 촘촘하게 짜인 세계관 설정에 관심이 많아서 이런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다.
하여간 생명을 얻은 도시와 그 도시의 화신은 운명을 함께하게 된다. 따라서 화신이 잘못되면 도시도 잘못되며, 갓 태어난 도시의 화신을 공격하는 것은 곧 도시를 파괴하려는 행위와 같다. 즉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도시가 된다』에서는 바로 그 일이 일어난다!
갓 태어난 뉴욕의 화신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와 맞서 싸우게 되고, 온 힘을 다해 그 싸움을 이겨내지만, 기운을 다 써버리고 그만 잠에 빠진다. 그를 찾아내 깨우고 힘을 줄 수 있는 것은 뉴욕에 속한 다섯 자치구의 화신들. 그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협에 맞서면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서로를 찾아내며, 뉴욕의 화신을 찾아 깨우고자 한다.
2. 혐오와 배제 그리고 공생이라는 키워드
- 도시를 향한 신랄한 질문 : 도시는 누구의 것인가?
사람들이 뉴욕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래의 빌딩숲과 노란 택시, 불야성을 이룬 마천루, 그리고 센트럴파크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소 같은 것들일 테다. 미국의 수도보다도 더 ‘미국적’으로 유명한 이 거대 도시는 ‘온갖 좋은 것들을 다 가진, 오만하고 도도한 세상의 중심, 1세계의 심장’ 정도로 요약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뉴욕의 정체성 그 자체처럼 느껴질 만큼 화려한 맨해튼은, 물론 뉴욕이 맞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맨해튼은 뉴욕 자체는 아니다.
뉴욕은 맨해튼과 브루클린, 퀸스, 브롱크스, 스태튼아일랜드라는 다섯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맨해튼은 뉴욕의 일부이되 전체는 아니고, 이는 다른 자치구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뉴욕은 다섯 자치구의 총합이며,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뉴욕의 구성원이다. 서로 아주 많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이름으로 묶인 여러 땅덩어리에 와글와글 모여 이루는 삶의 에너지, 그것이 바로 도시인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뉴요커 제미신은 뉴욕의 화신들에게 다채로운 속성을 부여해 개성 있는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맨해튼의 화신 매니를 제외하고 모두 사회적 소수자의 정체성을 가지게끔 했다. 그들은 여성이고 유색인종이며, 홈리스, 이민자, 성소수자, 노인이다. 한 마디로 사회의 주류인 ‘1세계 백인 남성’의 여집합, 나머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배제의 경험을 뼛속 깊이 가지고 있는 이들이 실은 도시 그 자체라는 역설. 도시를 생동하게끔 만드는 원동력은 최상층의 권력 주류에게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아래쪽, 각자의 삶을 때로 버거워하며 영위해 나가는 비주류에게서 나온다는 주장. 제미신은 화신들이 낯선 적과 맞닥뜨렸을 때 누구보다 ‘자기답게’ 맞서 싸우는 모습을 통해 그러한 메시지를 전한다.
뉴욕(들)이 여러 차례의 고비를 넘기고 마침내 적대자를 물리치는 대목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기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이러하다. 진정한 자신을 알고, 타인과 다름을 인정하며,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함 또한 인정하여 대의에 함께할 것. 서로를 받아들여 온전히 하나가 될 것. 그렇게 함으로써 뉴욕은 비로소 뉴욕이 되고, 이계에서 온 침략자를 물리친다. (이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반전이 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예고되었던 복선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생활감 넘치면서도 가슴 벅차는 이야기를 통해, 제미신은 ‘진정으로 도시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부동산 소유주 말고, 숨쉬듯 타인을 차별하는 비겁자들 말고, 역차별을 부르짖으며 소동을 피우는 무뢰배들 말고, 하여간 그런 족속들 말고 진짜 주인이 누구냐는 것이다.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그 질문에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다. 도시는 나의 것이고, 모두의 것이고, 도시에 속하기 원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3. 블록버스터 시리즈의 화려한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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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시가 된다』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지만, 아주 닫힌 이야기는 아니다. 작중 상파울루는 뉴욕(들)에게 어떤 요청을 함으로써 뒷이야기가 있을 것임을 예고하고, 황금가지 출판사에서도 『우리가 만드는 세계』라는 후속작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안내한다.
이 책은 시리즈의 첫권답게 스케일 큰 세계관과 개성 있는 여러 캐릭터들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했다. 일방적으로 읊는 게 아니라 사건과 캐릭터를 엮어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쉬운 점은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한참 읽어가면서 세계관과 캐릭터에 익숙해진 뒤, 한껏 몰입해서 신난 시점에 남은 페이지가 얼마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뉴욕의 화신들이 가진 유쾌한 전투능력과 그보다 더 유쾌한 말빨(!)을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