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남성은 왜 서로 투쟁하는가 - 사랑, 성애, 모권사회를 중심으로
에리히 프롬 지음, 이은자 옮김 / 부북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는 사랑에는 아버지적 사랑과 어머니적 사랑이 있다는 서술이 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의문이 생겼다. 과연 프롬의 젠더관은 어떠하였고, 어떤 의미로 이런 서술을 하였을까? 겉으로 드러난 텍스트만을 보고 프롬 역시 젠더에 관한 전통적인 틀을 뛰어넘지 못했다고 치부하고 넘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이런 의미일 거야라고 단정짓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이책은 프롬의 제자인 라이너 풍크가 젠더에 관한 프롬의 논문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궁금했던 프롬의 젠더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어떤 이유로 사랑의 기술의 어머니적 사랑과 아버지적 사랑이 도출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프롬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젠더에 관한 주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모권을 저술한 바흐오펜이다. 근대성은 다양한 주제들을 갖고 있지만, 그중 하나의 형태는 우월과 열등을 구분하는 양상을 들 수 있다. 이 관점을 통해 남성은 우월하며 여성은 열등하다는 인식이 당시에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인식하는 범위 내에서는, 역사는 남성에 의해 주도되었기에 여성이 열등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중 1861년에 모권이 출간되었다. 모권은 인류 초기 원시사회는 부권제가 아닌 모권제 사회였다는 주장을 펼친 최초의 서적이다. 모권제 사회가 존재했다는 것은 부권제 위주의 당시 사회가 자연발생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주장을 할 여지를 만들어주기에 의미가 있었다.

 

 정신분석적인 접근을 하였을 때, 여성의 출산 능력은 창조를 의미한다. 물론 남성이 기여하는 부분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았을 때는 남성은 창조능력이 없으며 이는 여성만의 특권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남성은 무의식적으로 여성의 자연적 창조능력을 시기하고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카렌 호나이가 주장한 자궁 선망과 유사한 부분이다. 호나이와 프롬의 교류를 생각하면 서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열등감에 대한 보상이 다른 능력을 키우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성에 기반한 문명적 창조다. 바흐오펜의 주장은 부권제 사회와 모권제 사회는 서로 다른 특성을 갖고 있으며, 우열을 나눌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프롬은 바흐오펜의 주장에 다소의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이 결론을 받아들였고 나름의 방식대로(정신분석적 접근을 통해) 토대를 다지려 시도하였다.

 

 1943년 논문에서 프롬은 생물학적 요인에 의한 양성의 성격적 차이를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성적 관계에 대한 형태로 성격적 요인을 끌어내고자 시도하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서 흥미로운 해석이었다. 프롬에 의하면 남성은 관계에 있어 겉으로 드러나는 요소가 크다. 제대로 발기를 하느냐 안하느냐가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다. 남성은 자신이 발기에 대한 스위치를 온-오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관계에 있어 혹여 발기하지 않고 상대를 만족시킬 수 없을까 불안해한다. 그 불안에 대한 방어적 형태로 자신감을 보이기 위한 허영심, 능력 과시가 나타난다. 이 능력 과시는 때때로 여성을 힘으로 정복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반면에 여성은 발기에 대한 불안 따위는 없다. 하지만 상대인 남성의 성기가 남성 스스로 통제를 할 수 없기에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을 힘으로 제압하고 욕설을 퍼붓는다고 남성의 성기가 발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여성은 신체적 매력을 과시하는 형태로 성격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프롬은 성적인 차이로 인한 성격의 경향성은 결정적이지 않다고 본다. 이러한 경향성은 양성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프롬은 성적인 차이는 개인간의 성격차이보다 미약하다고 하며, 성격에 더욱 더 결정적인 요인은 사회적 요인이라고 하였다. 결국 1943년의 논문에서 프롬의 결론은 성차로 인한 차이는 옳고 그름을 매길 수 없으며 사회구조적 맥락에 따라 좋게 여겨지기도, 나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사회구조의 개선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재밌는 견해이긴 했지만 1951년의 논문에서 프롬은 생물학적 성차를 통한 성격분석을 포기하고 이는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다만 프롬은 여성이 남성보다 자녀에 대한 애착을 더 많이 형성한다는 언급을 하였다. 이 부분이 1956사랑의 기술에 언급된 아버지적 사랑과 어머니적 사랑과 관련된 부분이다. 사실이 이 두 사랑을 구분하는 것은 프롬의 1934년 논문부터 등장한다.

 

 프롬에 따르면,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적 사랑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식을 양육함과 동시에 노후에 자신이 양육받을 투자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투자란 자신의 재산을 줄 아들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동일시하게 되고 여러 기대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 기대를 충족시킬 경우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랑을 준다. 반면에 어머니의 사랑은 모든 생명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자녀와 함께 있으며 애착을 형성하고 자녀의 행동과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사랑을 주기 때문이다. 프롬은 이를 토대로 당시 사회에는 어머니적 사랑이 부족하며 그로 인해 병리현상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을 자세히 설명한 저서가 바로 사랑의 기술이다.

 

 프롬의 몇몇 서술에서 볼 수 있고, 사랑의 기술에서 아버지적, 어머니적 사랑을 언급할 때 프롬이 융의 원형적 의미라고 덧붙인 부분을 보면 프롬의 젠더관은 융과 유사한 부분도 많이 보인다. 융은 세상의 모든 것이 대극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젠더의 경우에는 남성 속에 있는 여성성을 아니마라고 하며 여성 속에 있는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보았다. 그리고 대극적 요소를 통합할 때 생명의 에너지가 생기며 개인 내부의 모든 대극적 요소를 통합할 때 진정한 자기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 젠더에 대한 부분을 따로 뽑아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각각의 내면에는 양성적 요소가 있으며 그 비중이 다를 뿐이다. 이들은 우월을 논할 수 없으며 각 요소를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바흐오펜이나 프롬이나 융이나 동일선상에 있다. 차이를 두자면 양성성을 도출하는 방법의 차이일 것이다. 프롬의 경우 한때는 양성성을 정의하려 시도하였지만, 이후에는 그건 알수 없다고 하고 사랑의 종류에만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대의 해체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남성성, 여성성을 전제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관점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프롬은 어떨까? 프롬은 사랑의 종류들을 말하고자 한 것이며 단지 그것에 잘못된 이름(남성적,여성적)을 붙였다는 점에서만 문제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기술의 그 구절만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남성적 사랑과 여성적 사랑을 도출해낸 과정이 다루어진 1934년의 논문을 고려할 때, 젠더에 관한 프롬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신분석의 기본은 인간의 신체적 경험, 생활상의 경험이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1943년의 논문에서 성관계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경험과 심리를 분석한 것은 정신분석적 관점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1934년의 논문에서 프롬은 당연하게도 남성은 재산을 갖고, 그걸 줄 아들을 선택하며, 여성은 자연스럽게 양육을 한다는 전제를 갖고 남성적 사랑과 여성적 사랑을 도출해낸다. 이러한 생활환경이 당연시되던 당시의 한계로부터 프롬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여성이 자녀에 대해 더 애착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사랑을 받는 것은 아동이 발달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합의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면 사랑을 주는 것은 일종의 의무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이 자연적 감정이라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든 아버지든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사랑의 감정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기지만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롬은 사랑의 감정이(특히 어머니에게)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이 점에서 아버지적 사랑과 어머니적 사랑을 도출하는 프롬의 관점은 오류가 있다.

 

 위에서는 사랑의 두 요소를 도출하는 프롬에 관점에 관한 오류를 지적하였다. 그렇다고 프롬의 관점 전체가 오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도출 방법이 잘못된 것이지 조건적 사랑과 무조건적 사랑이 병행되어야 함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또한 성차로 인한 성격적 차이는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격의 개인차보다 미미한 수준이며 사회적 조건이 성격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는 프롬 견해의 가치는 한 부분의 오류로 가리워져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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