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정치의식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한준상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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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의 문제로 읽기가 어려웠다. 프레이리의 논의의 토대는 페다고지에 다 담겨 있다. 이 책에서 페다고지와 다른 점은 교육의 정치적 의미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는 저자 스스로도 페다고지에서는 정치적 의미에 주목하지 못했었다고 회고한 데서 드러나는 점이다.

 

 「페다고지에서 제시된 주요 개념인 의식화, 프락시스, 은행저축식 교육과 문제제기식 교육, 생성어를 통한 교육과정 구성은 이 책에서도 등장하며 다시 강조되었다. 페다고지에서부터 등장하는 이 개념들은 프레이리 사상의 기본 골자라고 생각해도 될 듯하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이 책에서 중점을 두고 봐야 할 부분은 (제목에서부터 강조하는 것처럼)교육의 정치성에 관한 것이라고 본다. 이 논의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페다고지에서 설명한 내용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유도되는 답이다. 페다고지에서 프레이리는 억압자는 피억압자로 하여금 다양한 방법을 통해 침묵의 문화를 유지하도록 한다고 하였다. 그 교육적 방법이 은행저축식 교육이었다. 은행저축식 교육의 이면에는 특정한 전제가 깔려야만 한다. 지식은 절대적인 것이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가치롭기에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는 전제가 바로 그것이다. 프레이리가 보기에 이는 일종의 신화다. 그렇기에 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무리 중립성을 유지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정해진 지식을 가르치는 시점에 이미 침묵의 문화 형성에 기여하게 된다. 침묵의 문화 형성에 기여한다는 것은 억압자의 이데올로기의 유지에 기여한다는 것이기에 정치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프레이리는 교육은 정치적일 수 밖에 없으며,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비판적 의식을 일깨우려면 필연적으로 급진적인 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교사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일반적 통념을 생각해 볼 때, 프레이리의 견해는 매우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이 정치적이라는 것은 부분적으로 프레이리의 지식관과도 연관된 것이다. 프레이리의 지식관은 비고츠키의 사회적 구성주의적 시각과 유사한 것 같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다양한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지식이 구성되는 것이다. 프레이리는 피억압자가 목소리를 내고 역사적 과정에 참여할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억압자와 피억압자간의 변증법적 과정에 의해 문화가 형성되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 문화가 곧 지식이 된다. 지식은 대화 속에서 구성되고 변화하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계는 점진적이지만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다. 당장의 효과는 미미하지만, 교사 중심에서 학습자 중심으로 옮겨가는 교육과정의 흐름은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수업 방식이 구성주의적 영향으로 인해 일방적인 강의식에서 직접 의미를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형식으로 변하는 것도 부정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변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우리 교육계가 지향하는 방향과 프레이리가 제시한 뱡향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학습자가 지식을 구성하는 것을 장려한다는 점에서는 프레이리와 우리 교육이 유사한 방법론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프레이리의 문제제기식 교육의 핵심은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아니라 학습자로 하여금 사회적 과정에 참여하도록 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반면 우리의 교육은 정치적인 중립성을 표방하며 사고능력 계발의 수단으로 구성주의적 수업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 입장은 겉으로 보기엔 유사할 수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매우 상반되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교육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중립적일 수 없다면 교사는 이를 인정하면서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려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도를 갖고 교육에 임해야 할 것인가? 이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한 문제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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