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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 (양장) - 살아 있음의 슬픔, 고독을 건너는 문장들 ㅣ Memory of Sentences Series 4
다자이 오사무 원작, 박예진 편역 / 리텍콘텐츠 / 2026년 1월
평점 :
서평을 시작하기 전 잡담 -
다자이 오사무를 처음 만난 건 <인간실격>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꽤 불편했다. 지나칠 정도의 자기혐오, 끊임없는 변명, 도망치듯 흘러가는 문장들.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보다 자주 멈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줄거리는 흐릿해지는데, 문장 몇 개는 계속 남아 있었다. 별일 없는 날 문득 떠오르고, 기분이 가라앉을 때 괜히 다시 펼쳐보게 되는 문장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조금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자이 오사무를 ‘작가’가 아니라 ‘문장의 기억’으로 묶어낸다는 발상 자체가 그에게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책 설명 -
책은 두툼하지 않다. 손에 들었을 때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와 무게다. 표지는 차분하고 절제되어 있는데, 제목처럼 과하게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는다. 구성은 명확하다.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인 <인간실격>, <사양>, <달려라 메로스>, <여학생>, <어쩔 수 없구나> 등에서 문장을 뽑아내고, 그 문장에 대한 최소한의 해설과 여백을 남긴다. 설명은 많지 않다. 오히려 독자가 문장을 먼저 읽고, 느끼고, 머물 수 있게 배치되어 있다.
처음에는 이게 과연 친절한 구성인가 싶었다. 하지만 몇 장 넘기다 보니 이해가 됐다. 이 책은 다자이를 설명하려는 책이 아니라, 다자이의 문장을 ‘다시 만나게’ 하려는 책이다.
서평 -
다자이 오사무의 문장은 언제나 날것이다. 다듬어진 위로보다는 날카로운 고백에 가깝다. 이 책에서도 그 특징은 그대로 드러난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다.”라는 문장은 여전히 강력하다. 단 한 문장인데, 그 뒤에 이어질 모든 실패와 고독을 이미 예고하고 있다. 이 책의 좋은 점은 이런 문장을 굳이 해석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신 독자가 그 문장 앞에 잠시 멈추도록 만든다.
우리는 요즘 너무 빠르게 읽는다. 의미를 곱씹기보다 요약을 원하고, 감정보다 결론을 찾는다. 그런데 다자이의 문장은 그런 속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읽는 순간 불편하고, 다음 문장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이 책은 그 불편함을 그대로 유지한다. 괜히 위로하지 않고, 괜히 미화하지 않는다.
다자이 오사무의 삶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의 문장이 왜 이렇게 무거운지 이해하게 된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 사실을 부끄러워했고, 좌익 운동에 가담했고,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결국 마흔을 채 넘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흔히 말하는 ‘불행한 천재’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의 비극적인 생애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연대기적 설명도 최소화되어 있다. 대신 작품 속 문장을 통해 그 사람을 느끼게 한다.
그 선택이 꽤 현명하다고 느껴졌다. 다자이를 동정하거나 미화하는 대신, 그가 남긴 문장과 독자를 직접 마주하게 만든다.
<인간실격>의 문장들은 여전히 자기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읽어도 호감 가는 인물은 아니다. 타인을 경멸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가장 불쌍한 존재로 설정하는 시선은 여전히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바로 다자이 문장의 힘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람의 가장 추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꺼내놓는 태도. 그 솔직함 하나만큼은 쉽게 흉내 낼 수 없다.
이 책은 그런 문장들을 그대로 내보인다. “이렇게까지 말해도 되는 걸까?” 싶은 문장 앞에서도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독자가 판단하게 둔다.
<사양>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또 다르다. 몰락해가는 귀족 가문을 ‘해질 무렵’에 비유한 시선은 참 묘하다. 완전히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은 시간. 끝나가고 있지만 아직 남아 있는 빛. 이 책에 실린 <사양>의 문장들은 체념과 각오가 동시에 묻어난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쨌든 살아내야만 한다”는 문장은 다자이가 할 수 있는 가장 건조한 위로처럼 느껴졌다.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아야 하니까 산다는 태도. 요즘 말로 하면 참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문장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달려라 메로스>에 이르면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다. 다자이 오사무가 쓴 이야기 중 드물게 ‘신뢰’라는 단어를 곧게 바라보는 작품이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달리는 메로스의 모습은 여전히 교과서적이지만, 이 책에서 뽑아낸 문장들은 의외로 담담하다. 과장된 영웅주의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믿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조용히 짚는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건, 다자이는 자기 이야기를 할 때보다 남의 이야기를 빌릴 때 더 단단해진다는 점이었다. <여학생>이나 <직소> 같은 작품에서도 그런 인상이 강하다. 특히 <여학생>의 문장에서는 고독을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이 감정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니다”라는 인식에 이르는 순간, 문장은 한결 넓어진다. 그 지점에서 나는 처음으로 다자이의 문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속도를 늦추게 만든다’는 점이다. 한 장 한 장 넘기기보다는, 한 문장에서 멈추게 된다. 필사 공간이 있는 구성도 그런 의도를 분명히 보여준다. 굳이 필사를 하지 않더라도, 손으로 문장을 따라 쓰고 싶어지는 책이다. 문장을 옮겨 적는 동안, 그 문장이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감정으로 남는다.
요즘처럼 빠르고 매끈한 문장이 넘쳐나는 시대에, 이렇게 삐걱거리고 불완전한 문장은 오히려 귀하다. 다자이의 문장은 위로를 주지 않는다. 대신 “너만 이런 게 아니다”라고 말해준다. 그 정도면 충분한 역할 아닐까 싶다.
서평을 마치며 -
이 책을 덮고 나서 다자이 오사무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여전히 그의 세계는 어둡고, 인물들은 비겁하고, 문장들은 불편하다. 하지만 이전보다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왜 그의 문장이 오래 남는지, 왜 지금도 읽히는지.
[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은 다자이를 입문서처럼 소개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이미 다자이를 한 번쯤 읽고, 문장 하나쯤 마음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 더 잘 맞는다. 삶이 버겁고, 괜히 모든 게 귀찮아지는 날, 이 책을 펼치면 다자이의 문장이 조용히 말을 건다.
괜찮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살아 있는 한, 이런 마음도 함께 안고 가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그 담담함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