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전날 밤 을유세계문학전집 148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투르게네프의 『전날 밤』은 사랑과 대의의 갈등을 다루는 소설처럼 보이지만, 끝까지 읽고 나면 말과 행동의 차이에 더 가까운 작품으로 남는다. 작품은 누가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더 많은 말을 하는가보다, 누가 실제로 자신의 삶을 걸고 선택하는가를 묻는다.
소설 속 모스크바의 젊은이들은 예술, 사상, 자유를 이야기한다. 그들의 언어는 세련되고 지적이지만, 대체로 관념의 차원에 머문다. 그런 점에서 인사로프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그는 불가리아의 독립을 위해 삶 전체를 내맡기기로 한 인물이며, 이 소설에서 가장 분명하게 행동의 영역에 서 있는 사람이다. 인사로프의 존재는 작품 전체의 긴장을 형성하는 핵심 축이 된다.
그러나 『전날 밤』을 인사로프만의 이야기로 읽기에는 엘레나의 비중이 작지 않다. 엘레나는 수동적으로 누군가를 따라가는 인물이 아니다. 자신이 속한 환경과 익숙한 삶을 벗어나 스스로 선택하고 감당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한 인물의 대의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도, 동시에 그 선택에 응답하는 또 다른 의지를 함께 보여준다.
이 소설이 인상적인 이유는 사랑을 단순한 감정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랑은 호감이나 열정에 머물지 않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결단에 가깝게 제시된다. 그런 점에서 사랑과 대의는 단순히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서로의 무게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맞물린다.
결말 역시 낭만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투르게네프는 행동하는 삶을 영웅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뜻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도달하는 것은 아니며, 결심이 곧 완성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행동하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쉽게 중단될 수 있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 점이야말로 이 소설을 단순한 이상주의 서사에 머물지 않게 한다.
『전날 밤』은 단정한 문장과 절제된 구성 안에서 사랑, 조국, 행동, 결단 같은 주제를 다룬다. 읽고 나면 결국 오래 남는 것은 말의 설득력이 아니라 실제로 내디딘 발걸음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고전이지만, 지금 읽어도 충분히 현재적인 의미를 가진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전날밤 #을유문화사 #을유세계문학전집 #을유문화사_서평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을 얻는 힘 : 인간력
다사카 히로시 지음, 장은주 옮김 / 북플레저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을 얻는 힘 인간력』은 인간관계에 대한 책이지만, 단순한 처세서로 읽히지는 않는다. 책의 중심에는 상대를 설득하거나 관계를 유리하게 이끄는 방법보다, 관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의 내면과 태도가 놓여 있다.
저자는 인간력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총체적인 역량으로 설명한다. 이 정의만 보아도 이 책이 좁은 의미의 사교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인간력은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신뢰를 형성하고 유지하게 하는 힘에 가깝다.
이 책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인간관계의 갈등을 외부 원인만으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 안의 ‘작은 자아’를 언급하면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어려울 때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상대의 결점을 먼저 찾게 된다고 말한다. 이 대목은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자연스럽게 자기 성찰의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또 하나 오래 남는 표현은 ‘마음의 거울’이다. 인간력을 기르는 일이란 결국 흐려진 마음의 거울을 닦아가는 과정이라는 설명은 단순하지만 분명하다. 관계의 문제는 상대를 잘 몰라서 생기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과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 생기기도 한다는 점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관계를 넓히는 기술보다 관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다룬다. 즉각적인 실용성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인간관계를 통해 결국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책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전면 개정판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현준 교수는 건축을 미적 결과물로만 보지 않는다. 공간에 담긴 질서와 권력, 문화를 읽는다. 이 책은 그 읽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교회는 한 방향으로 시선을 모은다. 긴 복도 끝에 설교자가 있고, 첨탑은 수직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신자는 앉아서 올려다본다. 절은 다르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직선이 아니라 굽은 길을 걷는다. 자연 안에 스며들고, 머물고, 비워진다. 같은 종교 공간인데도 사람을 맞이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건물 하나에 동양과 서양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그대로 담겨 있다.
도시의 길도 마찬가지다. 파리는 개선문에서 방사형으로 뻗는다. 모든 길이 중심을 향한다. 왕이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통제하려 했던 구조다. 뉴욕 맨해튼은 격자형이다. 어디가 중심이랄 것 없이 균등하다. 누구든 어디서든 출발할 수 있다. 도로 하나의 형태가 이미 그 사회의 성격을 말해준다.
이 책은 그런 것들을 하나씩 펼쳐 보인다. 길의 모양, 건물의 배치, 광장의 역할, 창문의 크기, 천장의 높이까지. 왜 유럽의 광장에는 사람이 모이고 한국의 광장은 비어 있는지, 왜 골목이 있는 동네가 살아남고 넓은 도로가 오히려 죽는지, 공간의 형태가 곧 삶의 형태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사례로 보여준다.
공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시대가 달라지면 쓰임도 달라진다. 카페는 커피를 마시는 곳을 넘어 누군가의 시간제 거실이 되었고, 서점은 책을 사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곳이 되었다. 뉴욕은 비어가는 상업 시설을 주거 공간으로 바꾸려 한다. 살아남는 공간은 결국 변화에 맞춰 진화하는 공간이다. 도시도 생명체와 다르지 않다.
10주년 기념 전면 개정판은 그 시선을 오늘로 가져온다. 경의선 숲길에 사람들이 왜 모이는지, 성수동에 팝업스토어가 몰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SNS를 통해 어떻게 확산되는지까지 함께 읽어낸다. 그래서 이 책은 오래된 책의 개정판이라기보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공간을 다시 읽게 하는 책에 가깝다.
건축에 관심이 없어도 상관없다. 매일 건물 사이를 걷는 사람이라면 충분하다. 읽고 나면 출근길의 풍경이 달라진다. 그게 이 책의 힘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가 제인 오스틴을 두려워하랴 - 새로 읽는 버지니아 울프 에세이와 두 편의 시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루카 옮김 / 아티초크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버지니아 울프의 이 에세이 모음집은 문학과 예술, 사랑과 사회를 둘러싼 여러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개별 글의 메시지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울프의 시선이다. 그는 작품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시대적 조건과 계급, 젠더, 교육, 권력의 구조까지 함께 본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문학 에세이집이라기보다, 작품과 사회를 함께 읽는 비평집으로 다가온다.
특히 「내가 교양속물을 싫어하는 이유」와 「추락하는 자에게는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 책의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글들이었다. 전자는 교양과 취향이 어떻게 허위와 과시에 기대는지 날카롭게 짚어내고, 후자는 계급과 교육의 특권이 문학의 시선 자체를 어떻게 형성해왔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울프의 비평은 재치 있고 우아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면서도, 늘 그 뒤에 있는 현실을 놓치지 않는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울프의 글이 단순한 해설이나 감상이 아니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품을 바라보는 태도까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문장은 아름답고 지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날카롭다. 문학 비평을 좋아하는 독자뿐 아니라,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도 오래 남을 책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보에 반대한다 - 희생된 진보의 새들은 연합할 수 있고, 우리는 소외를 거부할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우중몽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보에 반대한다』는 제목만 보면 진보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보’라는 말이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는지를 끈질기게 되묻는 책에 가깝다. 이 책은 진보를 자명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흔들며, 그 언어가 때로는 사고를 밀어붙이기보다 안도와 정당화의 기능을 해왔다는 점을 드러낸다.
책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위험과 위기를 다루는 방식이다. 재난과 전쟁, 핵위협 같은 문제는 일상적으로 소비되면서 오히려 익숙한 배경처럼 받아들여진다. 지젝은 바로 그 무감각 자체를 중요한 문제로 본다. 파국은 예외적인 사건이라기보다, 끝나지 않은 채 지속되는 일상 속에서 이미 경험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도 이 책의 핵심 중 하나다. 지젝은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직선적으로 정리하는 역사관을 문제 삼는다. 과거는 지금의 현실을 향해 예정된 길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과 우연한 분기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현재를 필연적 결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자연스럽게 의문을 던진다.
후반부에서 다루는 권위의 문제도 오래 남는다. 이 책은 권위를 단지 전통적 억압의 잔재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의 자유와 선택의 언어 속에서도 더 미세하고 비가시적인 권위가 작동하고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선택의 자유가 강조될수록, 실제로는 이미 설정된 구조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이 책 전체의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마지막 장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은 한국 사회를 향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남한과 북한을 단순한 대립 구도로 보기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 공백을 재생산하는 극단으로 읽어내는 시선이 제시된다. 특히 남한의 이세계 전생 서사를 현실 변화의 상상력이 다른 세계로 밀려난 징후로 해석하는 부분은 다소 의외이면서도 인상적으로 남는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친절한 해설서나 명쾌한 결론을 제공하는 책은 아니다. 대신 너무 익숙해서 의심하지 않던 개념과 태도를 다시 검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진보에 반대한다』는 진보를 폐기하자고 말하는 책이 아니라, 진보라는 익숙한 언어에 기대어 사고를 멈추지 말라고 요구하는 책으로 읽힌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