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가게 - 제13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53
이나영 지음, 윤정주 그림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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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학창시절 딱히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우러러 볼 정도로, 도무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공부를 잘 하는 아이는 어떤 시간 속에서는 나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부모 대부분이 바라듯 내 친한 친구들은 꽤나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다. 생각해보면 도무지 어떤 부분에서도 털끝만큼 따라갈 수 없는 아이와 교제를 한다는 건 나의 열등감을 더 키우는 일인지도 몰랐다. 공부 세계에서 늘 우등이었던 내 친구는 공부 외에 우정과 친구에 대해서는 늘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고, 사소한 감정 다툼에는 아예 감정을 배제했다. 휴일이나 주말에도 시간이 나면 교과서나 문제집을 꺼내 공부를 했고,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게 연필로 밑줄을 그었다가 마치 자신이 천재라도 되는 듯 그 연필자국들을 지우개로 깨끗이 지웠다.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이 친구는 내가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먼저 어떤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면 심장을 쿵쿵대며 더 열을 내어 공부를 했다. 시험기간에 밥을 먹을 땐 늘 시간을 재어 가며 먹은 뒤, 자리를 떠야했고, 수면시간을 줄이기 위해 링거 투혼은 일상이었다. 나는 그들의 세계에 속하고 싶으면서도 늘 숨막히는 그들 세계를 막연히 바라보며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며 깜깜한 운동장에 홀로 앉아 수없이 박힌 별들을 바라보는 조금은 현실 밖에 머물렀던 학생이었다.

 

 인생에 있어서 공부라는 것이, 점수나 등수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아마 어른들에게 물어본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네 미래를 결정하는 거라고 빙그레 웃으며 말하겠지. 그러는 부모들은 얼마나 공부를 잘 했을까. 그저 아이를 자신의 방패수단이나 대리만족- 자신이 이루지 못한 혹은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 은 아니었을까.

 

 여기 등수에 목을 매는 윤아라는 아이가 있다. 학교 마치면 학원, 학원 마치면 과외, 과외 마치면 예습과 복습, 시험공부까지. 그녀에게 휴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집에서 밥 먹는 시간에는 엄마가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책을 읽어 주거나 영어 청취 교재를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엄마는 더욱 열을 내어 윤아의 성적에 목을 맸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돌아왔다. (생계를 자신이 책임져야 했으므로) 그런 엄마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를 그저 잘 하는 일이 아닌, 1등을 하는 일이었다. 또한 공부 잘 하는 아이를 사귀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윤아에겐 그 모든 게 내키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어느 날, 윤아는 학원 가는 길 시간에 쫓겨가며 달려가는데 학원이 보이지 않았고, 곧 지각할 것만 같았다. 엄마의 잔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아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시간 가게'를 만난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시간이 부족한 분께 시간을 드립니다.

-시간가게

p.10

 

당장 시간이 필요했던 -학원을 지각하지 않기 위한 - 윤아는 시간을 사기로 했다. 시간은 하루에 한 번 10분을 살 수 있었다.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의 버튼을 누르고,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시간을 떠올리기만 하면 오묘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시간이 멈추었다. - 지나가는 자동차, 움직이는 사람들과 시계 모든 것이.

 

 

나의 가장 행복한 시간과 당장 내게 주어진 현재의 10분을 맞바꾸는 일. 내가 보기엔 너무도 손해보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윤아에겐 지나간 과거보다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 어쩌면 엄마가 정해놓은  - 1등을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보였기에 그 거래는 성사될 수 있었다.

 

 윤아는 시간 가게를 만난 이후, 자신에게만 주어진 10분이 있었기에 멈춘 시간동은 컨닝을 할 수 있었고, 책을 펼쳐 시험을 볼 수 있었고, 학원에 늦지 않을 수 있었다. 대신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듯 지금까지 윤아를 만들어 온 행복한 기억들이 소리없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좋아했던 할머니와의 추억,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 가장 좋아하는 친구와의 추억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나오는 한스 또한 윤아와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알고, 왜 알아야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바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성적이었고,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도 모른 채 공부를 했다. 휴식시간들이 조금씩 줄어져 가고,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 산책 등의 취미생활은 어느새 그와 멀어져 갔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은 이미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굳어져 갔고, 공부만이 유일하게 그의 벗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마 그는 아는 것이 두 배나 많은 2등보다는 차라리 절반을 아는 1등이 되고 싶었으리라.

수레바퀴 아래서, p.79,80

 

 

  시간을 사고 난 뒤의 윤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했고,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던 친구와의 약속도 잊게 되고, 할머니의 애정어린 표현조차 불쾌하게 여겨졌다. 신학교에 가게 된 한스는 자주 두통이 찾아왔고, 조금이라도 산책을 할라치면 다리가 아파왔다. 시간낭비란 생각에 친구 사귀는 것도 거리를 두게 되었고, 어떻게든 공부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잃어 버린다는 것은 곧 자신을 잃는 것과 같다. 윤아와 한스는 결국 '공부'라는 틀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 없는 공부는 결국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건강한 삶은 모두 나름의 내용과 목표를 갖고 있지만 한스 기벤라트는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p.162 

 

 자신을 되찾기 위해, 행복한 기억을 돌려받기 위해 다시 시간가게로 향하는 윤아. 하일너라는 친구를 통해 공부보다 더 소중한 것들, 더 아름다운 것들을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한스. 윤아는 행복한 기억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자신의 시간 10분을 내어주는 거래를 하고 다시 돌아온다. 그에 반해 한스는 점차 공부와는 멀어지고 시와 몽상과 하일너에게 빠져든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문득 돌아보면 사라지고 없는 10분 동안 윤아의 기억 속엔 끊임없이 어떤 기억들이 쳐들어온다. 그것은 윤아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행복한 기억이었다. 우리가 선망하는 것들이 내 속으로 들어올 때, 내가 온전히 누리지 못한 것들이 결과적으로만 내게 침투했을 때 그것이 과연 진짜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혼란, 방황, 어지러움, 두통. 이것은 마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주어진 고문 같다. 약을 달고 사는 윤아와 두통에 시달리는 한스. 누가 그들을 책임질 수 있을까?

 


 한스는 모두에게 버림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기분으로 작은 정원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거나 숲속에 누워 꿈을 꾸거나 괴로운 생각에 잠겼다. 독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곧 머리와 눈이 아파왔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펴도 바로 수도원 시절과 그곳에서 느꼈던 두려움의 유령이 되살아났고, 그것은 숨막히는 불안한 꿈의 한구석으로 한스를 몰고 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그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수레바퀴 아래서, p.147

 

윤아의 마지막은 희망적이었으나 -앞으로의 삶이 어찌될 수 없고, 어쩌면 어린이들이 봐야하는 책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 한스의 마지막은 비극이었다.

 

 

같은 시각, 아버지가 그토록 혼을 내려고 별렸던 한스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시커먼 강물을 따라 조용히 골짜기 아래로 천천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구역질도 수치심도 괴로움도 모두 그를 떠났다.

 -수레바퀴 아래서, p.213

 

  요즘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두세살의 아이들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채 느끼기도 전에 영어조기교육에 열을 올린다. 몇 개월부터 영어를 노출시키느냐가 그 아이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듯 전전긍긍하는 엄마들의 모습을 본다.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성과만을 원하는 부모들을 위해 매일 같은 문장을 하루종일 강제 주시, 강제 투입 시키고 있다. 그것만을 반복했기에 아이들의 입에서 그 문장이 나올 때면 엄마들은 만족한다. 내 아이가 누구보다 잘 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또한 누구보다도 잘 하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주는 스티커에 목을 매고,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칠판 뒤로 가서 자신에게 스티커를 몰래 붙여 놓는다. 도대체 여섯 살짜리 아이가 무엇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은 뒤틀린 사회가, 엉망인 교육이, 일그러진 욕망이 만들어낸 이 시대의 부모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도대체 아이들의 인생은 누가 책임져 줄 것인가. 죽은 뒤에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 공부보다도, 등수보다도, 눈에 보여지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아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한스의 비극이 우스꽝스러운 일처럼 여겨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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