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번역 프리랜서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형섭은 출판사를 연결해주는 에이전시 측의 연락을 받고 한 카페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는 먼저 카페에 도착했고, 카페의 문은 닫혀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새떼가 날아드는 소리에 이끌려 그 옆 레코드 가게로 향하고, 비틀즈의 노래였음을 알게 된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읽고 있는 레코드 가게의 한 여인. 텅 빈 공간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악. 어디선가 일어난 듯한 광경을 보고 있는 듯한 묘한 기시감. 그날은 이상하게도 모든 게 다 어떤 강한 기운이 자신을 이끄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레코드 가게를 나와 늦게 도착한 에이전시 측 사람과 장소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다가 출판사 측에서 전화가 와 술집에서 그들을 대접하고 싶다고 하고, 그렇게 이끌려 도착한 술집 '블루문'. 그곳에서부터 이미 뭔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형섭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한 남자다. 가끔 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자신의 존재까지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잘 살아갔다. 대기업에서 일하면서 나름 자리를 잘 굳혀가고 있던 중 신상무의 딸을 소개 받아 결혼에 골인한다. 그의 딸 승미는 사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그녀를 사랑했기에 모든 걸 다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매일 술을 마시고, 자주 외박하며, 가정을 나몰라라 하면서도 언제나 형섭만은 그녀를 집에서 묵묵히 기다려주고, 이해해주기만을 바랐다. 그것은 결코 오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형섭조차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어쩌면 둘은 어떤 면에서는 너무도 닮아 있었으므로 서로를 견뎌낼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내 경우는 젊은 날이 공백 그 자체였다. 아무런 흥분도 없이 무기질 청년처럼 밋밋하게 이십대를 보냈던 것이다. 뒤늦게 엄습하는 이 야릇한 떨림은 그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 같은 것이 아닐까. 지금이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근사한 추억의 성을 쌓고 싶은데, 그런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겠다. 추억을 만드는 것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이십대처럼 어느 정도느 무모해야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추억이 생기는 것이다. p.54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 살아가는 형섭. 번역 프리랜서를 하며 겨우 겨우 끼니를 해결하며 별다른 일이 없이 살아가는 형섭에게 제법 큰 건의 번역일이 들어왔고, 어떤 이끌림으로 인해 레코드점에 들어갔고, 블루문이라는 술집에 들어가 준비된 아가씨와 오래도록 술을 마시며 출판사 측 사람과의 접촉을 기다렸으나 그 사람은 끝끝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난 날, 집으로 돌아오니 E라는 사람으로부터의 팩시밀리가 와 있었다.

 

 형섭에게서 잘려나간 과거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들어가게 될 거라는. 그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벌레 구멍'을 찾아내게 되면 E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라는 내용의 팩시밀리.

 

 

 그렇게 해서 나는 형섭과 함께 그의 과거 속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걸어 들어갔다. 어떤 조합이, 어떤 시점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득 품기도 하고, 아주 조금은 두려움에 떨기도 하면서 말이다.

 

 

 잃어버린 기억, 잘라나가버린 과거. 이것에 대해 오래 생각을 해봤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이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형섭에게는 피하고 싶은, 들춰내기 싫은 상처였다. 덮어놓고 나면 그저 사라져버릴 줄 알았던 과거였다.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생각이 났다. 아오마메는 택시를 타고, 택시 속에서 들려오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를 듣고 있다가 어떤 지점에서 내려 구두를 신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곳은 1984년이 아닌 미래도 현재도 과거도 아닌 달이 두 개 떠 있는 다른 세계, 1Q84년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곳에서 전혀 다른 자기 자신을 만난다. 하지만 덴고와 아오마메는 서로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기에 그들은 각기 다른 상황, 다른 장소에 있지만 그들은 같은 세계를 살아간다고 볼 수 있었다.

 

 아오마메가 1Q84로 들어가게 된 통로는 음악이 있었고, 그들을 연결하는 세계를 상징하는 것은 달이 두 개 떠있다는 것이고, 그들의 만남은 '공기 번데기'의 형태가 있었다. 그 공기번데기는 아오마메의 형태이기도 했지만 덴고가 고쳐 쓴 소설이기도 했다.

 

 형섭은 레코드점에서 들려온 새떼 소리에 이끌려 간 곳에서 들려온 비틀즈의 음악. 그것을 시작으로 과거로 들어가는 문에는 벌레 구멍이 있었고, 블루문의 주인인 E가 늦은 밤 텅 빈 방에서 함께 있던 것은 누에고치였다. 그 누에고치는 바로 잃어버린 형섭의 과거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어린 시절 자신이 사랑한 유진이었다. 유진과 함께 늘 붙어다녔던 희배라는 친구가 바로 E였고, 그는 산 자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였다. 그랬다. 유진과 희배는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과거였고, 잃어버린 기억이었고, 잘려나간 자신의 일부였다.

 

 

"모든 사람들이 시간에 대해 각기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면, 실은 모두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인 셈이잖아. 그렇다면 사람은 영원히 서로 만날 수 없는 존재란 뜻이겠지." p.219

 

"멀리인 가까이에, 혹은 가까운 멀리에. 우린 지구 반대편에서 서로를 끌어아고 있는지도 몰라. 비록 마주 보고 있지만 너와 나 사이에는 굉장한 거리가 가로놓여 있어. 사람이란 서로에 대해 늘 그런 존재들인 거야." p.223

 

형섭이 사랑했던 유진. 아버지의 자살, 자살한 아버지의 얼굴을 본 유진. 죽은 아버지를 가장 먼저 발견한 유진. 어머니의 남자로부터의 성폭행. 그리고 희배 아버지와 유진의 아버지와의 만남과 관계. 그것을 본 희배. 그 이후로 유진을 못살게 굴던 희배. 형섭이 사랑한 유진. 죽고 싶어하는 유진.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게, 숨을 쉴 수 있게 자신의 목을 조여달라는 유진. 유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기꺼이 다른 세상으로 보내고 싶었던 형섭. 그 이후의 유진의 죽음. 유진과 함께 겪어냈던 모든 시간들이 형섭에겐 너무도 버거웠던 과거의 기억들.

 

 

"오늘 난 한 편의 옛날 영화를 보러 왔네. 영화가 끝나면 나는 내 공간으로 돌아갈 걸세. 현실의 세계로 말일세. 여기가 바로 내 벌레 구멍일세.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회복한 공간 말일세." p.301

 

 형섭, 희배, 유진을 연결시켜주며 다시 만나게 해준 처음과 끝은 바로 '옛날 영화' 였다. 영화와 함께 펼쳐지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는 흥미진진했고, 마음이 조금 저려왔다. 어쩌면 상처와 마주하는 우리들의 자세일지도 모르고, 과거로 돌아갔다가 다시 빠져나오기 위한 몸무림일지도 몰랐다.

 

 나는 죽은 자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동안 나를 지배하던 어둠, 곧 죽음의 그 음습한 그림자들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냄새도 맛도 보이는 것도 만져지는 것도 없는 이 무표정한 세계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는 그가 내쉬는 긴 한숨 소리를 듣고 있었다. p.303,304

 

 

 어쨌든 형섭은 죽은 자의 곁이 아닌, 산 자의 곁에서 진짜 삶을 살아보기로 한다. 늘 죽음의 그림자를 등에 지고 살았고, 그 어떤 것에도 토를 달지 않고 과거를 잃은 채 살았지만 다시 한 번 살아낸 과거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은 것이다. 온 생애에를 거쳐 다시 만난 덴고와 아오마메처럼. 상처를 직면하기 두려워 마주할 수 없었던 자기자신을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사람처럼 그렇게 그는 레코드 가게에서 만난 선주와 함께 일상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살아볼 작정인 듯 하다.

 

 다 읽고 나니, 이상하게도 누군가 내 가슴을 할퀴고 피를 낸 것처럼 아니 그 시간들을 이제 막 다 거쳐온 것처럼 숨가쁘고 처절해졌다. 그러면서 모든 게 희미해졌다. 아주 오래된 영화를 아주 오래 전 겪은 내 과거를 떠올리듯 보고나서 자막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제야 그것이 현실이 아닌 영화라는 걸 깨달은 사람처럼. 내내 어둠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영화관을 빠져나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영화관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멍한 시선처럼.

 

이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차가운 바람을 쐬며 현실의 시간 속으로, 내가 만들어낸 세계 속으로 용기있게 걸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간에 시간은 끊임없이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아무리 무덤 속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시간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나 기쁨 혹은 슬픔이나 괴로움처럼 어쩌다 끊어지고 이어지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 완전히 동일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거의 나와 완전히 동일한 나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차별없이 적용되고 똑같은 속도를 우리에게 부여한다.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고 순간순간을 깊이 사색하며 살아가는 거다. 시간은 모든 것에 평등하다. 나는 오늘 이 절대적 평등을 믿기로 한다. 이제부터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련다. 살아가며 느끼게 마련인 견딜 수 없는 고통, 용서되지 않는 시간, 이 추운 겨울의 막막함, 혼자라는 두려움 혹은 서툰 사랑 하나하나까지도 뜨겁게 가슴에 끌어안고 살아가야지. 살아야겠다. p.30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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