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 정진홍의 900킬로미터
정진홍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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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전, 나는 대단한 결심 하나를 가지고 무작정 짐을 꾸려 떠났다. 회사엔 사표를 내고, 살고 있는 집으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하고는 부산토박이였던 나는 서울로 갔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더 특별한 내가 되겠다고 그렇게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왔다. 그 결심을 하는 데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지만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떠나온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한 평짜리 고시원에 갇혀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창문도 없는 방 안에서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만히 누워 이제까지 살아온 내 인생에 대해, 내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결국 장이 꼬여 탈이 났고,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다가 얼마 간 나 자신을 놓아버린 듯 내내 잠만 잤다. 움직이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먹는 것도 멈춘 채 그렇게 딱 일주일을 더 있다가 나는 다시 떠나온 자리로 돌아갔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그렇게 제자리로, 원점으로 돌아갔다.

 

 문득 그 시절에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 책을 만났다면 내 삶은 조금 달라졌을까, 하고 자문하게 된다.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한다' 제목만으로도 강하게 이끌렸던 책이 내 손으로 들어왔을 때 마치 운명 같았다. 그건 아직 가보지 않은 산티아고 길을 언젠가 나도 걷게 되리라는 예감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만난 책 속에서 나는 정진홍 작가와 함께 짐을 꾸렸다. 마치 그 분의 영을 따라가는 분신처럼 짐을 꾸리고 단단한 결심 한 토막을 가슴이 가득 담아 함께 길을 떠났다. 눈이 휘몰아치는 상황에서 잘못된 표지판을 보고 길을 헤맬 때에도, 홀로 있는 공간에서 바들바들 추위에 떨면서 자신과의 사투를 벌일 때에도, 나는 숨이 가빠졌고, 무언가가 벅차오르듯 숨을 몰아 쉬었다. 길 위에서 만난 동료가 사라진 곳에 덩그러니 동료의 수레만 놓여져 있을 때엔 고삐가 풀린 망아지마냥 멍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정진홍 작가가 걸어간 900킬로미터의 길속에서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치열한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때로 우리가 가는 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어쨌든 길을 정해 걸을 때에도 긴가민가 헷갈릴 때가 있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며 갈등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런 순간에 정진홍 작가는 그 길이 맞든 틀리든 자신의 페이스 대로, 자신이 믿고 따르는 대로 일단 한 번 가보라고 말한다. 느리게 가든, 빠르게 가든 그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생을 자신이 믿는대로 선택하며 사는 것이 진짜 삶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 페이스를 알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다. 느리면 어떠냐. 그것이 자기 걸음이라면 느린 것이 아니라 적당한 거다. 남들이 한 달에 걷는다는 길을 나는 두 달 걸려 걷는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서 나는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행복했다. p. 193

 

 진짜 삶- 그가 걷는 길 - 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공존한다. 별것 아닌 일로 분노하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하고, 터져나오듯이 울음이 쏟아지고, 누군가가 미워지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하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순간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변화라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달라지는 하루하루의 경험에서 솟아오르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진홍 작가는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토하듯이 눈물을 쏟아내고, 자신의 속에 있는 감정들을 표출하고 비워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낯선 공간에서 홀로 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철저하게 외로워진 후에야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모습을 알고 나면 그때서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 할 수 있게 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뭔가를 발견했다. 험하고 거친 터널을 빠져 나온 것처럼 뭔가 명료해지고 선명해진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내 귓속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한 문장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인간은 결코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 문장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내 가슴을 쿵쿵 쳐댔다. 그건 마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이 끝끝내 상어떼와의 사투에서 승리한 것처럼 그것은 패배를 패배시키는 힘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노인의 이름은 '산티아고'였고, 그 힘을 가르쳐 준 곳이 산티아고 길이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나 되기 위해 걷는 길이다. 느리게 홀로 고독하게 걷는 길이다. 걸을수록 비워지고 걸을수록 채워지는 묘한 길이다. p.143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 중에서 결과가 좋지 못한 것이나 어떠한 길을 가다가 돌아가거나 포기하거나 멈춰섰던 모든 행위들을 내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었다. 지금의 나를 만드는 순간순간들이 모두 값진 것들인데, 좋지 못한 것들은 내것이 아닌냥 버려두고 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작정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왔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내 앞을 지나간다. 지금은 너무도 까마득해서 희미해지고 조금은 사라진 기억들이 조금씩 되살아난다. 만약 그 경험들이 없었다면 결코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멈춰섰다고 생각한 그때의 꿈들, 생각들. 어쩌면 지금도 현재진행중일지도 모른다. 잘못된 길이라고, 포기하며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다며 땅을 치고 후회했던 시절들조차도 어쩌면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의 중요한 시작이 아닐까 싶다.  3년 전보다 내가 얼마나 더 성장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3년 후의 나, 그러니까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나는 내 마지막 한 걸음을 스스로 걸어가기 위해, 스스로 선택해서 나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할 것이라는 것. 그래서 결국엔 내 삶을 값지고 멋지게 살아내어 이겼노라고 그래서 행복했노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더 멀리, 더 높이 날기 위한 거대한 정지였던 산티아고 가는 길. 언젠가 걷고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며, 더없이 성장해 있을 내 모습을 기대하며.

 

삶에서 최고의 매력은 끝까지 하는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따로 없다. 끝까지 하면 모두 이기는 거다.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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