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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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고해다.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 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첫 문장에 나오는 글이다. 그렇다. 삶은 결코 달콤하고 행복한 것들로만 가득한 신세계가 아니다.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 그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대처하는가에 따라 개개인은 각기 독특한 삶이 만들어진다.

 

 열 세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킬리만자로의 눈』을 다 읽었을 때, 내 머릿 속에 떠오른 단어는 고통, 죽음 그리고 빛. 이 세가지였다. 전쟁과 부상을 겪은 헤밍웨이가 느꼈을 죽음에 대한 의미는 남달랐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전쟁'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평생 따라다니는 불쾌한 흔적이라고 여겨진다.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목격해야만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어 상처를 낼 수밖에 없는 환경. 몸에 남아 있는 상흔은 사라진다해도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평생을 가는 법이다. 어쩌면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자신이 마주한 죽음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헤밍웨이는 끊임없이 쓰고 또 썼는지도 모르겠다. 

 

 '닉' 이야기는 헤밍웨이의 자전적 느낌이 강해 그의 인생관을 느낄 수 있었다. 닉은 꽤나 심한 불면증이 있었는데, 불면증이 짙어지는 밤에는 온갖 소리들이 자신의 귀에 머물렀다. 빛이 없으면 잠을 못 자는 닉은 전쟁을 통해 이 세계는 통치하거나 아니면 통치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가지 못할 길') 때론 연인과 새로운 삶을 꿈꾸기도 했으나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갑작스레 이별이 들이닥치고,('어떤 일의 끝') 자신이 헤어짐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완전한 끝, 되돌릴 수 없는 끝이란 감정 앞에서 좌절하게 되지만 또다른 '가능성'을 마련해 두는 것! 닉의 삶에는 늘 그 가능성의 공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사흘간의 바람') 어린 시절, 처음으로 생명이 잉태하는 것과 그 생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을 목격한 닉은 이른 아침 호수에서 결단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렇게 보내버리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인디언 마을')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누워만 있는 올레를 바라보며 닉은 당장 마을을 떠나 자신이 원하는 걸 행동으로 실천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살인자들')

 

 『킬리만자로의 눈』은 조금씩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오고 있음을 느끼는 작가 '해리'가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되돌아본다. 그에겐 써야할 글들이, 쓰려고 모아둔 메모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쓰지 못할 터였고,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연인과 잦은 말다툼을 한다. 무엇을 위해 그는 살아왔던가. 궁극적으로 자신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뭔가를 원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그는 꿈 속에서 구조되어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진짜 자신이 원했던 그 곳, 눈 덮인 킬리만자로를 향해 간다. 뭔가를 찾아헤맸던 한 마리의 표범처럼 그도 그곳에서 환한 빛의 무언가를 발견한 듯 보였다. 그가 삶의 지향점이라고 믿었던 그것!

 

그는 뭘 두려워하는 걸까? 두려움이나 걱정은 아니었다.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허무였다. 모든 게 허무였고, 사람 또한 허무였다. 다만 그것뿐이었기에. 필요한 것은 오직 빛, 그리고 약간의 깨끗함과 질서뿐이었다.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p.132 )

 

 머콤버도 어쩌면 죽음의 순간 그 환한 빛을 발견했을까. 사자가 두려워 도망쳤던 그 순간 자신의 삶은 다 망가져 버렸다고 여긴 머콤버. 아내가 자신을 바라본 그 경멸의 시선,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자괴감, 괜찮다고 다 끝난 일이라고 달래 보아도 쓰라리게 자리 잡고 있는 수치심.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짓눌렀다. 악몽에 시달리고, 동물들의 울음 소리에 시달리던 어느 날 아침. 머콤버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깨부수고 소를 향해 돌진하여 총을 쏜다. 그 순간 비이성적인 행복감을 느꼈고, 자신이 무척 용감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젠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는 머콤버는 물소를 향해 가고, 그의 뒷통수를 노린 아내에게 살해를 당한다. 아내의 배신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한 머콤버의 생은 과연 행복했을까.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

 

 

 약하고 소외된 자가 있는 곳, 고통을 호소하는 곳, 결과가 아닌 과정을 이야기 하는 곳. 바로 그 곳이 문학이 설 자리다. 그리고 내가 읽어 내려간 헤밍웨이의 글에서 유난히 그것이 잘 드러난다. 모든 문학적 성취가 이루어지고 난 뒤에 따라오는 찬사는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결국 실패하더라도 뭔가를 찾아 헤매는 과정을 치열하게 그려낸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고통과 마주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겪어내고, 새로운 환경을 해쳐나가며 자신이 필요한 곳에 손을 내밀고, 섬세한 감정을 어루만져 주는 헤밍웨이. 전쟁 상황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남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승리든 패배든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네 인생의 마지막은 끝까지 달려 봐야 알 수 있는 지점이다. 때론 거듭되는 실패 때문에 허무하고 우울하다고 해서 이 삶을 그 누가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배워나갈 뿐인데 말이다. 한 때 죽지 않으리라 확신했던 꼬마는 살아가는 동안 그 확신의 뿌리가 자신의 삶의 욕구처럼 뒤틀리고 변해버려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지만 헤밍웨이의 문학적 감수성은 우리들의 힘겹고 지친 삶의 여정 속에 찬란하게 뿌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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