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람들
박솔뫼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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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 내내 몸이 좋지 못했다. 정해진 시간에 수영장에 가듯 박솔뫼의 단편을 하나씩, 둘씩 읽고 덮고를 반복했다. 박솔뫼 특유의 문장 앞에 서면 심호흡을 길게 하고 뭔가 준비운동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막상 물에 발을 들여놓듯 문장 안으로 들어가면 나는 불현듯 내가 인간이 아니라 물고기라도 된 듯 물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유영할 수 있다.

어떤 글은 나를 조급하게 하고, 자책하게 한다. 또 어떤 글은 주저앉게 하거나 무엇이든 더 나아가라고 나를 채찍질한다. 그러나 박솔뫼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저 가만히 앉아 있거나 혼잣말을 하거나 머리를 감고 먹을 것을 먹고 낮잠을 푸지게 자고 시간이 나면 걷고 시간이 나더라도 내키지 않으면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다고 내게 말해준다. 그래서 그녀가 이끄는 대로 나는 책 속을 산책하고 유영한다.


  글 속에서 언젠가 내가 보았던 부산의 건물들-부산데파트나 용두산 아파트 같은, 어린 시절 걸었던 중앙동 골목이나 미문화원, 학창시절 친구들과 걸었던 남포동 시내와 씨앗호떡과 국밥과 카페와 쿠키와 많은 것들이 차례를 기다리듯 하나씩 내게 걸어왔다. 너무 익숙해서 생각해보지 못한 공간, 이방인이 되어 온 한 사람의 화자, 그러나 그 화자는 이방인의 눈으로 가장 익숙한 삶을 살아가는 나와 같은 사람이 된다.


  <우리의 사람들>을 읽으면서, 39살의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나를 생각했다. 결혼하지 않고, 다른 지역에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을.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정말로 그와 똑같은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서. 어쩌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그러한 존재가 있을 것만 같아서 두리번거리게 된다.


  건널목을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농구하는 사람들이 늘 있는 곳에서 사람은 달라질지라도 계속해서 누군가는 농구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이미 죽은 사람이 또다시 이미 죽은 사람을 죽이러 가는 걸 따라다니느라 집에 들어가지 않는 친구를 만나는 것. 꿈속의 일이 깨어나서까지 너무 선명해서, 다시 꿈을 꿀 수 없다면, 그것이 현실이 될 수 없다면, 자신이 꿈의 이야기를 이어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다. 곧 흩어진 꿈을 잊었다가, 문득 들어간 카페에서 주인이 사라져, 메모지를 꺼내어 꿈을 이어나가는 우연과 필연의 만남이 일상이 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눈을 감고 잘 아는 장소를 머릿속으로 산책하는 모습. 영화를 보면서 졸고, 일어나면 이어서 이야기해주는 사람과 아침을 맞이한다. 뜨끈한 물에 들어가서, 전혀 다른 시기에 다른 곳에 서 있던 누군가를 겹쳐보게 된다. 영화를 보지 않고 영화에 대한 글을 보고 영화를 봤다고 믿어버리는 일. 그러한 일들이 박솔뫼의 글 속엔 자연스럽고 가볍고 깊게 나온다.


  무겁던 마음도 묵은 때를 벗겨내듯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문장들이 산책을 하듯 나를 자꾸 어디론가 이끌고 가고. 나는 그 안에서 함께 혼잣말을 하고 상상을 하고, 나는 어떨까 갸우뚱거리게 되며, 끝내 수긍하게 된다. 환한 대낮에 꾸는 꿈처럼 나른하고 편안하다. 깨어나면 여기가 어딘지 한참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들 속에서,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이곳에서 여기에 있게 되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예술의 미학은 무의미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것이고, 예술은 본질을 반복하는 것이라는데. 그녀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의미라는 건 없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건, 결코 무의미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반복해서 걷고, 반복해서 먹고, 반복해서 걷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일 자체가 생생한 삶이라고 말해준다. 누군가의 삶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시간을 수십번 반복하는 것만으로고 굉장한 일을 한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수세기 전에 인간 또한 동면에 들었던 어떤 유전인자가 우리의 몸속에 내포되어, 해가 빨리 지는 겨울이 오고, 추운 계절이 오면 어느새 동물이든 누구든 함께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속삭여준다. 잠 못 드는 밤, 눈을 감으면 내가 혹은 나라고 믿는 누군가 걷고 또 걷는 장면이 이어지고. 언젠가 우리라고 믿었던 누군가 겪었던 가슴 아픈 일들 또한 우리가 겪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꼭 무언가 해야만, 겪어야만, 어떤 장소에 가서 확인해야만 깊이 아는 건 아니라고 그렇게 믿게 된다.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알 수 없는 채로 있지만, 어느 날 길을 지나가다가 혹은 가까운 어떤 곳에 여행을 가서 우연히 보게 되는 것들, 문득 켜진 불빛 어린 창에서 스치듯 보이는 사람의 실루엣을 보면서, 그것이 결코 우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완전히 내가 아닌 채로 혹은 타인도 완전한 타인이 아닌 채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고. 극적인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누군가를 죽이는 일보다 살리는 일 편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마음들이 모여, 또 깊이 오래 반복한 어떠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사물들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준다. 어쩐지 내 옆에 있는 커피잔도 누군가가 오랫동안 하고 싶은 말을 축약시켜놓은 것이라는 듯.


 

먼 시간을 이해하지만 이곳에 지금에 없는 사람들이 왜인지 관대한 웃음으로 다시 먼 시간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것만 그려졌다. 12쪽 우리의 사람들)

 

어디에 무언가 남아 있는 감각 잔잔한 표면 아래 녹지 않고 남아 있는 고체들을 나는 생각했다씻고 가운을 입고 침대에 누웠을 때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45쪽 (건널목의 말)

 

나는 가끔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다고 생각한다저를 위해 무언가를 한순간 포기해주십시오저의 고민을 떠안아주십시오나 역시 아주 가끔 누군가의 불덩어리를 삼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물론 곧 사라지는 생각이다. 76쪽 (농구하는 사람)

 

매일매일 이미 죽은 여자들을 따라다니던 조한이는 이미 길가의 어떤 것이 되었음에는 틀림이 없다그가 쓴 수첩 속 글들도 내 속옷들과 함께 곱게 누워 있지만 그 모든 글들은 알 수 없는 종교 전단지가 되고 이리로 같은 페인트 글씨가 되고 십이년쯤 연체한 후 던져넣은 도서관의 책이 되고 그 책을 받아먹는 노란 반납함이 되었을 아니 된 것이다. 119쪽 (이미 죽은 열두명의 여자들과)

 

나는 여전히 아무도 없는 이 카페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 왜인지 나의 한 단락을 정리하고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어렵게 여겨졌고 쉽사리 일어나지지 않고 이것은 마치 호텔 침대 위 내가 세수를 하러 일어나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 같았다. 146쪽 (펄럭이는 종이 스기마쓰 성서)

 

시간이 지나고 변한 것들이 있고 나이도 먹었지만 자전거와 수영과 여행은 그리고 영화도 거기에 포함되겠지 여전히 좋아하고 오랜만에 하여도 여전히 이건 내가 할 일 같아 하고 그는 생각한다. 159쪽 (자전거를 잘 탄다)

 

어떤 시간들은 뭉치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 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는 지난 시간은 아니에요. 117쪽 (매일 산책 연습)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영원하지 않지만 때때로 놀랄 정도로 반복되는 일이야. 223쪽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

친구들이 숲에 갈 것이라고 했다. 후지산에 있는 주카이숲이었는데 자살자들이 많이 나와 그것으로 유명해진 숲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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