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옷장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첫 소설은
<빈 옷장>의 폭력성으로 시작해야만 했다.

벌이다.
제삼자에게 받는 매질이다. 작고 빨간 낙태 기구에 끌려간다. 이렇게 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나 혼자만의 잘못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다. 나는 누구인가. 일단 르쉬르 식료품점의 딸이다. 언제나 우등생이며, 일요일에는 짦은 발목 양말을 신는 얼간이이자 장학생이다. 그리고 어쩌면 낙태 전문 산파에게 따먹힌, 아무 것도 아닌 존재.
2쪽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을 더듬어 본다면 과거는 나의 현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는걸까. 과거의 사람들은 지금도 그 위치에서도 나에게 동일한 관계와 위계로 짓누를까. 아니 에그로의 <빈 옷장>은 불법 낙태 시술을 받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돌이켜보면 세월 속에 여성으로서 여성들이 얼마나 행복한 적이 있던가......헤아려보고 싶어진다. 낙태에 관한 진실은 나와 상관없다고 해서 그냥 상관없어질 일이 아닌 것 같다. 아니 에르노 시리즈 중 <빈 옷장>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그녀의 첫 소설임을 알고 나중으로 택한 것이다. 드니즈 르쉬르의 태생부터 보자면 뭔가 첫 단추가 잘못끼워진 것 같은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유독 남다른 그녀의 명석한 두뇌와 섬세한 감성은 그녀가 사회에 일찍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형상들이 분명히 있고, 그녀의 귀에만 들리는 언어들이 있다. 학교, 환경, 교육, 빈부격차, 계급, 성차별, 혁명, 권위, 인종차별......사회 제도나 관습의 부정적인 제도들이 우리를 어떻게 억압하고 회유하는가를 보게 된다. 자전적 소설인지 아니면 허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선택한 거칠고 직설적이고 독설적인 서술의 문체는 과거 그 시절에 묶여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우리들에게 온갖 야유를 퍼부어대는 듯 하다. 왜 전진하지 않는지, 왜 무너지는지, 환상 뒤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를 왜 꿰뚫어보지 않는지 말이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믿고 싶지 않은데. 왜 나는 저 아이들과 달라야 하는가, 배에 단단한 돌덩이가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눈물 때문에 눈이 따갑다. 이제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다. 이것은 모욕이다. 학교에서 나는 모욕을 배웠고, 모욕을 느꼈다.
70쪽

한 소녀가 여자로 성장하기까지 긴 시간 동안 상상 그 이상의 위험이 깔려 있다.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부모조차도. 무디고 둔한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버거운터라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돌볼 여유가 없다. 잘 살아내야 하고 나같은 삶은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모두에게 있다. 드니즈에게도, 그녀의 부모에게도. 자신을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시절로부터 분리하려 한다. 그녀에게 문학과 글 쓰기란 도피성이라기 보다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치유의 한 갈래인 듯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절절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어둡고 차가운 내면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이 첫 소설로 하여금 그녀는 왜 써야만 하는가를 확실하게 느꼈을 듯 싶다.

내가 피하려 했거나 혹은 의도치 않게 잊어버렸던 그 말들이 사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처음의 것, 진짜를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학교, 책 속의 단어들은 이제 아무 소용없다. 그것은 증발한 말들이며, 눈속임이며, 쓰레기들일 뿐이다.
93쪽
문학, 그것조차도 빈곤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상이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전적인 방법.
200쪽

아니 에르노 문학은 참혹한 지난 날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시간 속으로 파고들어가 문제를 직시하길 원한다. 모두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지난 시절이 더이상 아프지 않고, 부끄럽지 않고, 수치스럽지 않은 평행한 개인사를 다시 만들어내기 위한 첫 단추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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