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느린 작별
정추위 지음, 오하나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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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무엇이 남아 있을까? 그의 인생 마지막까지 이 잔인한 병 앞에 함께 서 있는 것 외에, 내가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남편 푸보의 교수직 은퇴 후 나타난 치매 증상. 남편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3년이나 지나서야 병원을 찾는다.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을 받고 약 복용을 시작하지만 푸보의 치매 경과는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거기에 코로나19까지 더해져 외출을 하지 못하게 되자 인지퇴화가 급속도로 진행된다. 그리고 충격적인 것은 시어머니-아주버님-남편으로 이어지는 치매 간병 삼연속이라는 점. 좋은 직업, 화목한 가정, 평화로운 노년을 앞둔 시기, 남편의 치매 발병으로 한순간에 무너진 일상에 글쓴이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시작부터 안타까운 현실의 연속에 한숨이 삐져 나왔다.

’날마다 목표는 단 하나, 푸보에게 알찬 하루를 만들어주는 것‘
책은 남편 푸보의 치매 경과와 이에 대처하는 글쓴이의 고군분투의 기록이다. 아침마다 커피 내려마시길 좋아했던 푸보가 시도때도 없이 커피를 내려 온 집안에 커피잔이 놓여있는 모습은 그나마 귀여운 수준이다. 그 후 휴지에 집착해 모든 주머니와 가방에 휴지를 쑤셔넣는 것부터 점점 아기가 되어가며 고집만 부리는 푸보의 모습은 읽기만 해도 전쟁 같다. 새로운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침착하자고 자신을 다독인 뒤 푸보를 위한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내는 고달픈 현실의 연속. 여행을 좋아하는 푸보를 위해 치매환자를 데리고 여행을 다녀올 결심도 하고, 모든 하루 일과와 집안 환경을 푸보를 위해 맞추고, 여러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해가며 애쓰는 과정은 보통 사랑이 아니고서야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오로지 남편만을 위해 잠도 줄이고 생리적 욕구도 참아가며 글쓴이는 이 과정에서 점점 자신을 잃는다.

치매가 진행할수록 푸보의 자아와 함께 같이 사라져가는 글쓴이를 보며 무력감, 좌절, 허탈함을 느꼈다. 언어학자라서일까. 그 모든 과정과 묘사가 명징하고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40년 동안 모든 것을 함께했던 배우자가 치매를 앓는다는 것은 마치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부정당하는 기분 아닐까.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밀쳐내기까지 하는 모습을 과연 나라면 버틸 수 있을까? 살아는 있지만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 어떤 일도 스스로 하지 못하는 인형이 되어가는 배우자와의 ‘아주 느린 작별’.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함으로 ‘돌봄’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행히 글쓴이는 남편을 요양병원에 입소시킬 경제적 여유와 본인의 회복을 지원해줄 좋은 친구들과 딸이 있었다. 하지만 주위에 적절한 지지 체계가 부재하거나 경제적인 부담으로 집에서 돌보아질 수 밖에 없는 치매 환자와 그 보호자들의 경우를 생각하면 마음 한 켠이 씁쓸해진다. ‘치매’라는 질병을 받아들이는 것과 감당하는 것은 매우 별개의 문제 같다.

📌 말이 없어지고 반응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그렇게 서서히 나의 괴로움이 되어갔다. 다시는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 남편이란 이토록 슬픈 존재구나. 아무런 대답 없는 가족이란 이토록 상처가 되는구나. 사람은 아직 있는데, 나의 반쪽은 사라지고 없구나······.

📌 어느 순간, 포근한 햇살 아래에 있던 푸보의 눈빛에 서서히 생기가 돌더니, 천천히 한쪽 손을 뻗어 란란의 외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애써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치매 아빠가 마침내 딸을 알아봤다는 둥 호들갑 떨 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치매는 돌이킬 수 없는 병이라는 걸. 이제는 그가 잘 먹고 잘 자고 몸 아픈 데 없이 평온하게 살아준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어쩌다 나온 사소한 행동에 큰 의미와 기대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이 리뷰는 다산북스로부터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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