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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난 - 고원에서 보내는 편지
이상엽 외 지음 / 이른아침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서의 시간을 나는 가끔씩 꿈꿔본다. 또한 그런 꿈과 별개로 나는 내가 가보지 못한 장소를 늘 동경한다.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해준다’거나,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상투적인 표현보다도, 지금까지 내가 느꼈던 것은, 언제나 여행의 끝자락에선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또 다른 여행을 머릿속에 그리며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중국어도 한마디 뱉을 줄 모르는 내가, 중국 여행에 대해 관심을 가진 가장 큰 이유는 비용이 적게 들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물론 지도에서만 보아온‘크다’라는 추상적인 느낌, 그 이상을 가지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막상‘큰’지도위에 섰을 때, 그 곳은 얼마나 거대한 땅덩어리였던가. 그리고 그 위에서 나 혼자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만큼이나 무겁게 다가왔던 외로움...
그렇게 온갖 고생을 다하고 난 후, 중국여행을 다시는 가지 않겠다던 나의 다짐이 지금 흔들리고 있다. ‘윈난 고원에서 보내는 편지’. 바로 이 책이 나의 시선을 그 거대한 땅덩어리로 다시 돌리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이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하는 이유는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이 지역이 52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이다. 이 기특한 소수민족들이 자기 고유의 문화를 지키고 있는 덕분에, 이 지역을 돌아보는 것은 52개의 나라를 여행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개발붐이 불고 있는 중국 땅에서 이 곳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풍경들인 것이다. 다른 이유로는 티베트와의 무역로인 ‘차마고도’의 시작이라는 것도 들 수 있다. ‘차마고도’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 책에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 책은 7명의 글쓴이가 이 곳을 방문해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시작과 끝을 맺는 독특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글쓴이들은 카메라를 가지고, 각자의 시선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들이 찍은 사진은 ‘사진이야말로 사람의 개성을 제일 잘 표현해줄 수 있는 도구’라는 말에 나를 깊이 동감하게 만든다. 특히 흰 제비를 찍은 사진은 꿈속의 그림처럼 신비로워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다. 어스름해진 저녁, 달빛을 가냘프게 받은 수많은 흰 제비들이 반짝거리며, 마치 유성이 떨어지듯, 온 하늘을 물들이며 가로질러 나간다. 또 끝없이 펼쳐진 계단식 논밭 사진은, 작가의 말처럼 자연 풍경이라기보다는 건축물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누군가가 묵묵히 흘렸을 뜨거운 땀이 느껴진다.
이런 사진 외에도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표정들, 길고 조용한 논두렁을 주인보다 앞서 걸어가는 개, 우리의 시골과 일상에서 아직은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낯익은 것이지만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글쓴이들은 쉽게 놓지 않고 있다. 이런 글만큼이나 다양하고 재밌는 사진들은 읽는 내내 독자의 눈을 즐겁게 만든다.
고생 끝에 찾아갔던, 중국의 신선들이 산다던 ‘태산’. 때마침 불어 닥친 폭풍 속을 헤치고 산 정상에 올랐을 때 보이는 것이라고는 안개 뿐.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했던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한숨이 아니라 또 다시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을 얻은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여행의 끝에는 항상 색깔은 조금 다르지만 행복이라는 녀석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긴 시간을 낼 수 없어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을 과감히 권해주고 싶다. 그냥 잠시라도 좋으니, 행복이란 녀석을 한번 만나러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