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쌓아가는 사람들의 긴 여정의 고백이다.
'신뢰하는 삶'은 신학자이자 영성가이며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로완 윌리엄스가 저술한 사도신조와 니케아 신조 해설서이다.
예수와 신앙에 대한 가짜뉴스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믿으면 부자가 된다거나 인생이 필거라는 거짓된 소식들은 신앙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어떠한 만남도 없이 일어나는 막연한 믿음이나 특정 대상을 향한 맹목적 믿음이 아니다.
신뢰는 어떤 존재가 아무런 조건도 제약도 없이 내 삶의 모든 국면에서 이미 나를 지탱해오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나는 믿습니다'는 고백은 어디서 나의 근본, 본향을 찾을 것인지에 대한 선언의 출발이다.존재의 이유를 묻는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성서가 고백하는 하느님’이라고 답한다.
하느님은 평화와 찬미를 이루기를 바라고 계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은 화해를 이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에베소서의 말씀은 하느님을 향한 신뢰의 근거가 된다.
성서는 하느님과 인간이 갈등을 빚는 순간들,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분노, 하느님의 목적에 대한 인간의 회의, 하느님의 존재를 실제로 느낄 수 없을 때 겪는 인간의 고통과 상실의 시간속에서 경함하고 만나는 하느님을 보여준다.
그 순간들 속에서 성서의 인물들은 하느님을 믿으며 자기만족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책임을 지는삶을 선택하고 그 길을 걷는다.
로완에게 있어 기독교의 믿음은 이러한 길을 걷는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가 사는 것, 그들과 같은 것을 아는 것, 그들이 마시는 물을 함께 마시는 것이다. 즉, 신뢰의 대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때, 그저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에 안주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을 우리 자신에게서 단호히 몰아내는 가운데 예수의 말을 우리의 입술에 담아,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예수의 영을 모시고 하느님께 나아올 때, 진리를 향해 한 발 더 내디딜 때, 그리하여 '나는 믿습니다'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게 될 때, 그때 우리는 18세기 시인 헨리 본이 하느님의 '빛나는 어둠'이라 불렀던, 그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까지 고양된 온전한 인간이 되는 도정에 들어섭니다.
이 길은 온 생애에 걸쳐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지만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며 결코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은총으로, 이 길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214~215쪽)
책속에서 저자는 이런 신뢰의 개인적인 실천으로 기도를 말한다. 진정으로 ‘우리 아버지’를 고백하며 “예수의 말을 입술에 담아 존재의 깊은 곳에 예수의 영을 모시고 하느님께 나아오는” 순간이 ‘나는 믿습니다’를 이해하는 순간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일에 우선해서 예수의 기도가 그들 자신 안에 일어나게 하는 것이며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과 희망을 점차 그분의 영원한 사역에 일치시켜 가는 길고도 힘겨운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로완의 영성은 개인의 경건과 신앙을 정치․사회적인 사안과 분리하지 않는다.
사랑의 하느님은 우리를 환대하시고,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을 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환대하셨듯 우리의 이웃을 환대한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며(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며), 또한 이웃을 향해 나아간다(그를 나에게로 받아들인다).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도 그들이 있는 그 세계에 들어가 살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아는 것을 나도 알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마시는 샘에서 같은 샘물을 마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결단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진정으로 말할 수 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나는 귀의합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