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 마음을 담은 그릇
호연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잔잔한 일상의 에피소드로 도자기를 소개하는 책

네이버에 연재된 웹툰이 책으로 엮였다.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하는 작가가 도자기 한 점 한 점을 소재로 삼아 일상의 이야기를 펼친다.

박물관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오래된 그릇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마음을 담은 그릇‘ 이라는 부제처럼 도자기에 담긴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를 일상과 묶어 그림을 그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에 바람이 부는 날엔, 현대 미술 - 현대 미술을 만나는 가장 유쾌한 방법, 싱글녀의 오춘기 그림토크
권란 지음 / 팜파스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림을 어떻게보면 되냐고, 밥 먹는 방법이 따로 있나.?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거, 당기는 거 먹으면 되는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만의 방법을 하나 알려 주자면
작품 속에 ‘나‘를 대입 시켜 보라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회복적 정의란 무엇인가? - 범죄와 정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
하워드 제어 지음, 손진 옮김 / KAP(Korea Anabaptist Press)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회복적 정의는 범죄에 대한 일방적이고 응보적인 사법처리를 넘어, 당사자들과 그들의 공동체가 함께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손상되었던 상처와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회복적 정의의 목적이다.

1974년 어느날 캐나다의 작은 도시 엘미라(Elmira, Ontario)에서 수십 군데의 집을 턴 혐의를 받은 두 명의 십대 용의자들이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 지역 교정 위원을 맡고있던 메노나이트 교도인 마크 얀치(Mark Yantzi)와 동료인 데이브 월트 (Dave Worth)는 담당 재판관을 찾아가 본인들이 이 십대 용의자들을 대리고 피해를 당한 집들을 찾아 합의를 보게 하는 건의안을 재판관에게 제안하였다. 물론 재판관의 첫 반응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법을 어기고 남의 집을 도둑질한 소년들을 그냥 가볍게 처리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막상 재판이 열리고 판결이 내려지자 놀랍게도 담당 재판관은 마크와 데이브의 의견을 받아들여 두 소년 용의자들에게 피해자들과 직접 만나 사건을 해결할 것을 판결하였다. 
단,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다시 법정에게 최종판결을 받는 조건이었다. 
그 두 소년 용의자들은 마크와 데이브와 함께 자신들이 턴 집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사과하고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피해자들이 만족할만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 묻기에 이르렀다. 
이사를 간 두 집을 제외하고는 모든 집에서 이들과 합의에 이르렀고, 그 둘은 봉사활동이나 현금배상 등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에 책임을 지게 되었다. 실제로 몇 집은 이들이 찾아와 사과한 것으로만도 이 청소년들을 용서해주었고, 그 둘은 다시 마을의 구성원으로 건전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죄와 처벌에 관한 성서적 견해를 인용할 때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레 24:19–20)라는응보적인 정의 개념을 떠올린다. 
그러나 제1성서에서 제시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의미는 지나친 보복에 대해서 제한을 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잘못에 대한 대응은 잘못에 비례하는 것이어야지, 폭력을 증폭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제1성서의 하나님은 응보적/권선징악/거래의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성서가 보여주는 정의는 응보/징벌/심판이 아닌 샬롬의 정의이다.

현재의 사법제도는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 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응보적 정의의 근본적 원칙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가해자도 응당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와 공동체는 파괴되어지고 가해자는 죄의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응보적 정의의 목적은 법체제와 윤리의 강화에 있다.

예수는 자신의 삶속에서 응보적 정의의 원칙을 거부하고 정의와 사랑을 통한 새로운 회복적 정의 원칙을 선포하였다.
악을 악으로써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사랑으로 극복하는 회복적 정의 원칙을 실천하신 것이다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는 응보적 정의가 가지는 범죄와 형벌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서 출발한다.

범죄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회복을 목적으로 함께 모여 해결방안을 논의하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가해자로 하여금 진정한 반성과 손상회복을 위한 방법을 스스로 강구하도록 하고, 피해자로 하여금 사건으로 인한 신체적·정신적·금전적 피해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당사자와 공동체가 샬롬의 공동체로 회복할 수 있도록 돕고, 궁극적으로는 범죄의 악순환이 끊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응보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는 모순된 관계에 있다.
한편은 처벌을 위주로 하고 다른 한편은 회복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회복적 정의는 피해자의 요구에 초점을 맞추고 가해자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는다. 
범죄의 직접 당사자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요구가 무엇이고 그 요구를 어떻게 채울까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되 관계 회복과 사회공동체로의 회복을 기대하면서 그 목적을 추구한다.

하워드 제어는 회복적 정의의 실현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실효성을 거둘 수 있다고 보았다

- 피해자가 정의를 경험하는가?
- 가해자가 정의를 경험하는가?
- 피해자-가해자 관계가 다루어지는가?
- 공동체의 관심이 고려되는가?
- 미래에 관해 논의하는가?

모든 범죄에 회복적 정의를 적용할 수도 없고 강요되어져서도 안된다.

하지만 최소한 그리스도 공동체의 정의는 회복적 정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회복적 정의론자인 하워드 제어나, 콜슨은 종교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다. 결국 회복적 정의는 필연적으로 '용서'와 연관되어 지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밀의 미술관 - 서양미술, 숨은 이야기 찾기
최연욱 지음 / 생각정거장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조각을 만드는 데는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이틀만에 조각하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지난 20년을 투자했다.(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미술을 만나는 방법은 그 작품을 보는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하다.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고 모르는 까닭에 누구도 만나지 못한 새로운 모습을 체험하기도 한다.

미술가들의 숨겨진 이야기,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화가들의 생활을 가지고 작품과 함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책 속에서 소개하는 첫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벽화 최후의 만찬이다. 
경화 된 석회 벽에 그리는 세코 프레스코 방식이라 쉽게 훼손되기도 했고 예수님의 발 부분이 그림 아래쪽에 문을 만드느라 잘리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병사들 또한 이 그림을 알아보지 못해 마굿간으로 이용하며 작품에다가 말똥 던지기 놀이도 하고 12제자의 눈알 파기를 하는등 손상의 과정을 겪었고 복원 과정에서도 오히려 더 손상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히틀러에 집착한 달리, 어머니에게 수염없는 자화상을 그려보낸 고흐나 마네의 사생활과 에버렛 밀레이의 걸작 〈오필리아〉의 모델이었던 리지 시달이야기 그리고 뽀글머리 밥 아저씨의 그림까지 이어가는 저자는 그림을 통해 좀 더 많은 이들이 행복해 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해진다.

확실히 그림책은 치유가 된다..ㅇ.ㅇ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대 게임 - '세대 프레임' 을 넘어서
전상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 세대론에 속았구나 ...

386세대도, N포세대도, 기성세대도 명확한 실체는 없다.

세대는 다채로운 매력을 뽐낸다.
세대는 간편함과 가소성이 그 큰 매력이지만, 무엇보다 정체성과 관련해서 탁월한 매력을 뽐낸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 ‘우리 세대’의 일원임을 밝혀주고, 그러한 우리를 역사의 흐름 속에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른 세대는 우리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 속에 서식하며, 그들의 시간의 서식처는 ‘너무 이르거나 늦어서’ 역사의 흐름을 방해한다. 
말하자면, 세대는 차이를 만들거나 유사성을 찾는 데 유용한 정체성의 근거이자 도구다. 
그 덕에 세대는 일상에 깊이 뿌리박은 최적의 정치 언어 그리고 정치적 게임의 도구가 된다. 
쉽고 빠르게 우리 편과 상대편을 갈라내어, 지지자를 만들거나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내세울 수 있다.(22쪽)

저자는 세대 게임을 “사람들이 세대를 이뤄 서로 경쟁하고 다투는 활동과, 게임의 판을 짠 집단들이 어떤 이익을 취하기 위해 세대를 활용하여 사람들의 경쟁이나 싸움을 부추기는 움직임”이라고 정의한다. 
세대 게임으로 이익을 얻는 ‘플레이어’들(정치인, 지배계급)이 있다. 이들은 비난할 세대를 내세워 문제 사안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거나, 아니면 특정 세대를 지지자로 만드는 방법을 사용해 이득을 취한다.

세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규정과 담론화는 '플레이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생산하고 유통시키면서 선동을 위한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두 형식의 세대, 곧 나이에 따라 ‘분류된’ 세대와 ‘우리 의식’을 갖게 된 세대를 시몬 드 보부아르의 유명한 말에 빗대어 표현할 수 있다. 
세대는 그렇게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 
세대는 나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연령 세대와 사회문화(정체성) 세대도 다르다. 
연령이 같거나 유사한 사람들을 세대로 분류할 수 있지만, 그렇게 분류된 세대가 고유한 우리 의식, 그러니까 ‘집합적 자기의식’을 자연스레 지닐 수는 없다. 
말하자면 나이는 세대가 형성되는 데 매우 중요한 조건이지만, 나이가 비슷하다고 해서 스스로를 하나의 공동체로 생각하는 세대가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157쪽)

비슷한 연령의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묶는 강력한 요소는 다름 아닌 같은 '시간'의 경험,동일한 시간 고향이다.

시간 고향은 하나의 “기억된 감정의 풍경”이다.
어떤 세대에 속해 있다는 감정적 느낌이나 자각이라 말할 수 있는 시간 고향은 특정한 장소를 지칭하지 않는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 곧 고향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아낸 시간을 통해서 정의된다. 
시가나 고향 친구들, 줄여서 시간의 향우는 공간 근접성을 통해 가까워진 것이 아니다. 
시간의 향우들은 유사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공통의 감정과 감각으로, 가까운 또는 이웃한 느낌을 지니게 된다. 
내가 “벗어날 수 없는 뭔가를, 그리고 나와 비슷한 연배들과 공유하지만 명백히 언급되지 않는 ‘우리’라는 감정의 토대인 뭔가”를 나는 시간의 향우들과 공유한다. 
또한 시간 고향은 “망각에 대항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마지막으로 시간 고향은 “역사의 단절”이다. 
이전과 다른 역사에서 자신과 동년배들의 결속을 찾는다. 
요컨대 시간 고향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리 감정’의 토대이고, 망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단절을 통해 세대를 결속한다. (182쪽)

같은 시간 고향을 공유한 '시간 향우회' 회원들의 긍지와 좌절을 자극하고 부추겨서 특정한 정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플레이어'들이 존재한다.

세대가 가진 매력을 활용하여 꾸며진 세대 전쟁론의 도덕적 명확성은 아주 훌륭한 “대량 주의분산 무기”다. (122쪽)

세대를 겨냥하는 세대 전쟁론적 개혁의 예리한 창은 문제의 구조적 원인, 예컨데 자본, 기업, 그에 기생하는 정치 권력과 같은 원인들을 겨누지 않는다. 
그런 탓에 세대 전쟁론이 내세우는 청년에 대한 배려는 말잔치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청년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 차별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81쪽)

이제 세대담론을 바탕으로 이야기 하는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는 저지르지 않기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