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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로이드 수학 퍼즐 - 마틴 가드너가 들려주는 샘 로이드 수학 퍼즐 시리즈
샘 로이드 지음, 마틴 가드너 엮음, 김옥진 옮김, 오혜정 감수 / 보누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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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로이드 수학퍼즐>

샘 로이드 지음/마틴 가드너 편집,해설




미리 고백컨대, 처음부터 나는 퍼즐을 풀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학교 다닐 때도 수학이라면 질색이었고, 졸업한지 한참에 머리가 굳은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무리였다. 그렇다. 못해, 못풀거야, 하고 싶지 않은걸, 이런 말들이 내가 수학 문제를 풀 때 떠올리던 대사들이니까.

수학과 관련이 되면 무의식중에 압박감, 스트레스, 같은 것들에 짓눌렸던 것 같다.

그런데, 유희수학이라고 했나. 샘로이드의 수학퍼즐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의 퍼즐을 풀다보면 진정한 예술은 그것을 달성한 기교나 수단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던 어느 철학자의 말에 매우 공감하게 된다.

퍼즐의 왕으로 불리는 샘 로이드의 퍼즐에는 무엇보다도 스토리가 있다.

아니 수학은 숫자인데, 숫자에 이야기가 있다니, 이게 말이 되나? 근데 실제로 접해보니 그러하다. 수학문제에 이야기를 더하니 철학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퍼즐을 하나도 못 풀고 문제만 보고 있어도(!)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이나 깊이가 평상시와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그가 퍼즐을 만들어낸 방식은 너무 놀랍고 정말 놀랍다.

가령, 치즈를 자르는 방법에서도 퍼즐이 만들어지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뜬금없이 등장하여 그녀의 여행에 우리를 동참시키는가 하면, 냅킨 세장으로 테이블을 덮을 수 있다고 가정할 때, 테이블의 크기가 얼마냐고 묻기도 하다가 물물교환시 손해보지 않고 교환하는 방법에 대한 심오한 퍼즐을 내기도 한다. 

읽다보면 일상생활에서 간혹 등장하던 재밌는 수수께끼의 원작자가 이 분이었구나 새삼 감탄하게 될 만큼 우리가 알만한 퍼즐이 많다. 요컨대 수학을 싫어하거나 어려워하는 아이들에게 이 책은 흥미를 유발하고 관심을 갖게 할만한 좋은 계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단순히 공식에 숫자를 대입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삶속에 수학이 얼마나 알게모르게 사용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알고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준다고 할까. 

엄밀하게 말해 난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 특히 이쪽 방면에 젬병인 나로서는 읽고 해답보며 이해하기도 벅찼다. 어떤 퍼즐은 문제 하나에 반나절을 낑낑 대다가 이게 정답일거야 하면서 뒷부분에 제시된 해답을 보고 허탈했던 적도 있고, 해답과 풀이과정을 보고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던 퍼즐도 있다.(개인적인 소망으론 나와같은 사람을 위해 풀이 과정이 더욱 자세하고 쉬웠으면 하는 아쉬움과 바람이 있다) 그렇다. 이 책은 쉽게 후다닥 읽어갈 수 있는 책이 절대 아니다. 평생 곁에 두고 인생의 복잡한 문제를 만날 때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쉬어갈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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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납치사건
재스퍼 포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북하우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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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평생 나는 운명이 내 소매를 붙잡는다고 여겼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언제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우리 중에 거의 없다. 모든 작은 행위들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들에 영향을 미치는 도미노 연쇄를 일으킨다. 목적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나는 행운이었다

-서즈데이 넥스트, 「특작망에서의 생활」






 

제인 에어는 아마도 초등학교 때쯤 읽었던 것 같다. 그 시절의 나는 닥치는대로 아무거나 읽어대곤 했으니까. 어떠한 책은 어느 나이대쯤에 읽어야 한다는 게 참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뭐 엄마 젖을 먹어야 할 아이에게 밥을 줄 수는 없으니까. 여하튼 나는 언제나 제인 에어가 싫었다. 오만과 편견만큼이나. 초등학교 때 읽어서 싫었던 책이 지금 내 나이에 읽는다고 감동적으로 다가올 것 같지도 않다.




여하튼 그토록 싫어하는 제인에어가 납치되었다니, 왠지 호기심이 발동해서, 참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소감은,

작가가 영화 일을 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재미있는 sf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이다.

영웅적인 주인공에 카리스마적인 악당의 대결 구도, 속도감 있는 전개 방식, 위기의 순간마다 별의별 방식으로 동원되는 주인공을 돕는 우연들, 그리고 해피 엔딩 마무리까지.ㅋ 뭐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작가는 이야기꾼이다. 인물들의 캐릭터만 더욱 보강된다면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ㅋㅋ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풍부한 이야기성에 있다. 대중문학이란 장르에 고전문학의 대가들을 끌어들여 이야기들을 공들여 풀어나갔다. 재기발랄한 작가다. 한때 유행처럼 궁금증을 자아내며 흘러갔던 셰익스피어의 그 명작들을 과연 누가 썼는가에 관한 미스테리(정말로 나는 늘 궁금했다는)는 적시에 잘 찾아들어가 쉬어갈 타이밍도 만들어 주고, 메시지도 과하지 않게 적당히 넣어주고. 간만에 순문학에서 벗어나 재미있는 장르 소설 한 편을 읽은 기분.

책추천 서평 중에, 브론테의 ‘고전’을 싫어했던 독자들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거라고 한 내용이 있었는데, 정말 그렇더라. 머리 식히기에 딱 그만.



소설의 몸은 역시나 이야기성에 있으니까 몇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주제의 가벼움이나 무거움은 이야기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어려운 얘기를 하고자 할수록 더욱 재밌어져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읽히지 않을 거라면, 누구를 위해 쓰고자 하는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었다.




“동의하오. 여기서 나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소. 나는 서른 여덟에 존재하게 되어 난생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고 내 사모의 대상을 잃은 후에, 곧 다시 꺼지게 되오. 내 존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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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한 연구 - 상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1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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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돌중이 길에서 다른 돌중의 죽음을 목도한다. 그는 스승의 유언에 따라 유리로 향하던 중이다. 스승은 무슨 까닭에선지 그에게 유리를 다녀와서 당신의 장례를 치러 줄 것을 명하고는 죽어버렸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존자로 불리는 중과 외눈박이 중을 살해한 뒤 유기한다.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난 또 다른 중에게 스승의 향수를 느끼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는 증거 인멸을 위해 그마저 살해한다. 그러나 장옷으로 온몸을 감쌌던 그 중은 얼굴을 확인해보니 죽은 줄 알았던 그의 사부다. 유리의 오조촌장이었던 사부는 그에게 촌장의 징표인 해골을 넘겨준다. 이렇게 해서 유리의 육조촌장이 된 그는 사부의 조언에 따라 마른 늪에서 낚시질을 시작한다. 그것은 그가 치러야 할 죄의 댓가다. 물고기 없는 늪에서 물고기를 낚아 올려야만 하는 일. 그것만이 그를 죄에서 자유롭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가 유리에서 보낸 40일을 다룬다. 유리는 사막과도 같이 황량한 곳이다. 수도부들과 도를 닦으러 온 승려들이 주민의 전부지만, 이 승려들조차 죄를 짓고 도피온 승려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유리에서도 나름의 법률은 존재한다. 죄를 지은 뒤 40일 안에 유리를 떠나지 않으면 유리의 법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죽는 날짜와 형벌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것뿐.




박상륭의 소설 전반에 걸친 고정관념은 난해하다, 읽기 고통스럽다, 뭐 그런 반응들이다. 나 또한 사투리를 극복하지 못해 책장을 몇 장 넘기다 덮은 적도 있다. 아무 책이나 덮어놓고 읽었던 한참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그래도 내 마음 속에 박상륭은 김승옥과 더불어 늘 동경해마지않는 작가 중의 한 명이었다.

이번에 다시 그의 책을 집어든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다. 목적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간이 그만큼 나를 키운 것일까, 다시 집어든 박상륭은 너무 편안하게 읽혔다.

  

이 소설을 흔히들 말하듯 구도 소설로 본다면 <죽음의 한 연구>,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의 구원을 향한 한 인간의 집념이 이뤄낸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의 생애를 덧입은 한 돌중을 통해 연금술과 오행과 무속과 신화에의 접근을 시도하지만, 그 안에는 그 무엇에도 속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신화를 이루고자 했던 한 연약한 인간이 종내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면도칼로 저며 놓듯 낱낱이 해부해놓았다. 요컨대 <죽음의 한 연구>는 신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하는 육체의 틀에 갇힌 유한한 인간의 영원(그것은 무가 될 수도 있다)을 갈망하는 비루하고도 고상한 몸부림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인신(人神)이 되고자 했던 사내를 위한 하나의 경전(經傳)이다. 서사는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처음 나는 작가가 이토록 깊은 관념을 이야기하면서 서사를 놓치지 않는 데서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지금은 이야기성보다는 작가의 이토록 치밀하고 대담한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어느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경전으로 기획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박상륭 소설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문장에 있다. 그의 사상적 기반이 워낙 풍성하고 견고한 까닭도 있지만, 문장은 철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장은 이를테면 작가적 시선이다.

그런 점에서 박상륭의 시선은 두려움을 느낄 만큼 본질을 향하여 거침없이 파고든다. 혓바닥 같기도 하고 요니를 파고드는 하초 같기도 하다. 그의 시선에는 대상을 향한 집착과 욕망과 무(無)와 합일의 시도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시선에서 관념의 깊이가 묻어난다. 작가는 대상을 해부하는 시선으로 관념을 형성한다. 지칠 줄 모르는 응시, 사유에의 발전, 혹은 사유적 깊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직관의 발현, 본능적으로 감각을 포착해내는 시선?

소설 속에서 주인공 돌중은 인신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죽어야만 재생, 다시 삶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다시 주어지는 삶은 처음 무작정 주어졌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개입된 삶이다. 요컨대 작가는 돌중의 죽음을 통해 태생마저 관장하려고 한 것이다. 이한 시도는 그와 연분을 나누던 수도부의 죽음 뒤 그가 부르는 애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삼고 그 과정을 철저하게 즐기는 모습, 을 때로는 애절하게 때로는 광기어린 모습으로 때로는 성자가 되어, 격정적이면서도 지극히 고요한 시선으로 훑어낸다. 

그의 시선은 입체화되어 문장에 녹아난다. 시각적인 문장을 넘어서 육감적이다. 그의 문장은 육감을 자극하며 보일 뿐 아니라 촉각처럼 온몸에 와닿는다.




그런 대신 늪의 둔덕에로 올라와, 마을 쪽을 건너다보았으나, 눈에 보이는 건 뿌연 안개의 묽음, 우중충한 습기, 겉이 아니라 안을 가로막고 드는 한랭한 폐쇄뿐이었다. 다섯 발자국 앞도 보이지 않아, 그쪽 밖이 궁금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허긴 이것은 그러나 ‘차라리 부드럽고 아늑한’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지도 모르긴 하다. 저 산자락 포개 덮고 누워 손가락 빨며, 벽자색 산수국 피었겠다고 하고 있으면, 어느덧 알밤 듣드르는 소리에 잠을 설피는, 그런 넋을 싸아안고 있는, 그런 구름의, 그런 안개의 혼돈인지도, 글쎄 모르긴 하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어떤 날, 느닷없이, 하늘이 그냥, 푸르게 엎질러버리고, 길이며 지붕 꼭대기들이 아주 낯설게 번쩍이기 시작했을 때, 안개에 알이 배고 세상 바람을 쏘이고 싶어할지, 아니면 뼛속의 곰팡이 핀 한습으로 인하여 자살을 해버릴지, 그것은 아직 모른다. p.214

 

“천년 묵은 구렁이, 계집의 간을 쪼으는 독수리, 처녀의 제사만을 받고 사는 인당수의 소용돌이, 허지만 어쩐지 나는, 그래요, 전에 없이 청순해진 듯한 것은 이상하죠? (...)내 님, 나의 주, 나를 불로 태우는 힘, 나를 저주스러운 힘으로 휘감아 틀어삼키는 이-여보, 이제는 나도, 당신을 죽이려 돌 던지는 데 끼어 함께 던지게 하시고, 당신을 못 박는 데 나도 함께 망치질하게 하시고, 당신을 태우려는 데 나도 끼어들어 송진을 끼얹게 하셔요, 그렇게 하셔요, 그러기 전에 그러나 여보, 나로부터 최후의 방울까지 피를 뽑아가셔요, 생명을 뽑아가셔요, 혼을 뽑아가셔요. 그렇게밖에 나로서는, 달리 어떻게 당신을 예배할지를 알지 못한답니다.” 하권. p310







<죽음의 한 연구>에는 많은 사상들이 버무려있지만 가장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은 프로이드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일부러 접는다. 열 마디 설명하는 말보다 그냥 본문을 제시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 부분만 가지고도 한참을 떠들 수 있기 때문에.




 성교란 하나의, 명상법으로도 던져진 것이며, 우주를 이해해 보기 위한 수단으로 놓여진 것이다. 그래서 이 음통(淫通)은 음통이 아니며, 그것은 죽음의 연구로 변해진다. 한 명료한  예로 ‘해골의 골짜기’에 세워진 ‘세상의 나무’를 타고, 한 위대한 무당이 하늘로 올라간 광경은, 다수가 일원화하는 집단 성교로서, 그 성교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다. 태초로부터, 존재나 비존재가 모두 상대적으로 존재해오기 시작했을 때, 이 황음(荒淫)은 자행되어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성기의 형태론은 음과 양, 체와 용의 여러 모습에 관한 연구인 듯하며 성교 자세의 연구는 음과 양, 체와 용이 어울리는 그 구조의 파악으로, 그기고 기교론은, 가장 훌륭한 죽음을 성취해내는 방법론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자세는 저 수백 수천의 변형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마흔다섯, 또는 스물다섯, 더 줄여서는 열두 자세로 집약하여, 그 성쇠들의 저변을 이루는 공통분모로 삼는다. 성기의 형태론은 대개 소, 코끼리, 또는 말, 쥐 같은 동물들로부터 그 원형을 취해와 우주의 법도를 밝히는데, 어쨌든 숫쥐의 왜소함으로써는 암코끼리의 광대심오함을 침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튼, 사람이 지닌 원초적 영상 속에는 언제나 짐승의 얼굴이 근저를 이루고 있어온 사실은 참으로 이상하다.

그러나 그러한 공부에는 반드시 실제에의 응용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응용을 통해, 자기를 승화시키고 고양시키고 확산시켜, 우주의 숫주재신 암주재신 자체로까지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지에서는 그리고, 오래오래 머물 수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좋은 것이며, 나중엔 대상이 없이, 혼자서, 자기 속에서 암컷을 또는 수컷을 분리해내, 수음이나 뭐 그런 행위를 통하지 않고도, 매번마다 절정에 닿을 수 있는 데까지,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권. p.303~304




이 지점에서 죽음의 한 연구는 섹스의 한 연구가 된다. 그리고 작가는 가장 큰 쾌를 자기 자신 안에서 완성시키고 발견해야 할 것으로 본다. 이를 테면 자웅동체는 인신적 삼위일체인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작품 전체를 통해 돌중을 인신으로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엮어놓았다.




끊이지 않는 궁금증. 식상하지 않게 대두되는 화두.

“도대체, 인간은, 왜, 신이, 되고자, 하는 걸까?”

‘인간이기에 인간에 머물러 인간적인 것들’

비루한 인간이어서 차라리 감사하고 만족스러운 나로선 이런 도발을 이해하기 어렵다.

죽음에의 극복, 불멸에의 욕망, 삶을 향한 몸부림과 같은 교과서적 대답은 충분하지 않은 느낌이다.  

이 작품을 재독하게 되면 그에 대한 대답이 찾아질까? 생각해보려다 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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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Mr. Know 세계문학 29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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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미셀 우엘벡 저/이세욱 역/열린 책들




「형이상학적 돌연변이, 즉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세계관의 근본적이고 전반적인 변화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아주 드물게만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기독교의 출현이 바로 그런 변화에 해당된다.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일단 일어났다 하면, 이렇다 할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궁극적인 귀결에 이를 때까지 발전해 간다. 그러면서 정치 경제 체제며 심미적 판단이며 사회적 위계 질서를 가차없이 휩쓸어 간다. 인간의 어떤 힘도 그 흐름을 중단시킬 수 없다. 그 흐름을 중단시킬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의 출현뿐이다.」




이 소설은 이렇듯 제3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의 출현을 예고하며 흥미롭게 시작된다. 이렇게 거창하게 던지며 시작할 수 있는 작가는 정말로 희귀하다. 도대체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숨어두었길래 이렇듯 자신만만한 것일까.




소설은 브뤼노와 미셸이라는 이부 형제(아버지가 다른)의 생애를 통해 서구사회의 시대 풍조를 읽어낸다.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대 풍조가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그리하여 종내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브뤼노는 성 문화를 통해, 미셸은 그의 연구와 실험을 통해,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히피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두 형제는 어머니는 얼굴 구경 한 번 못한 채 각각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손에 맡기워 양육된다. 형인 브뤼노는 국어 선생이고, 동생인 미셸은 해마다 노벨상 후보에 오르는 분자생물학자다. 언뜻 그럴싸 해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인생은 늘 허기져있다. 브뤼노는 섹스 중독자에 미셸은 관계 불감증이다.




「욕망과 쾌락은 문화적이고 인류학적인 현상이다. 이것들은 한 사회의 성격을 결정짓는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회가 어떠하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것들이다. 결국 욕망과 쾌락 그 자체로는 사회 구성원들의 성행동에 관해 거의 아무런 설명도 할 수가 없다. 」




1950년대의 자유 연애, 1960년대의 성 해방 이념, 1970년대는 이 두 가지가 절대 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브뤼노를 눈으로 해서 그들의 난삽한 성문화에 대해 묘사되는 내용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펠라티오나 파트루즈(쓰리썸)는 얌전할 정도다. 가령, 한 부분을 들여다보자.




「누구든 어떤 상대에게 접근하고자 할 때에는 사전에 대개는 명시적으로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원하지 않는 애무를 피하고 싶으면 간단한 고갯짓으로 그 사실을 알린다. 그러면 남자들은 즉시 정중하게 사과를 한다. 남자들의 태도는 너무나 예의 바른 나머지 익살스런 느낌마저 든다.

(..)

왜냐하면 이 구역은 한 여자가 여러 남자들을 상대하는 이른바 <갱뱅>의 애호가들을 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역시 한 커플이 애무를 시작함으로써 판이 벌어진다. 보통은 여자의 펠라티오로 시작된다. 그러면 즉시 열 명에서 스무 명쯤 되는 남자들이 이 커플을 에워싼다. 남자들은 앉거나 선 자세로 그 장면을 보면서 자위 행위를 한다. 어떤 때는 그것으로 판이 중단되고 관객들이 점차 흩어져 간다. 또 어떤 때는 여자가 손짓으로 다른 남자들이 가세해도 좋다는 뜻을 알린다. 그러면 남자들은 서두르지 않고 차례차례 그녀에게 다가가서 손이나 입으로 애무를 하기도 하고 삽입을 하기도 한다. 여자는 판을 중단하고 싶으면 역시 간단한 손짓으로 그 사실을 알린다. 말은 전혀 오고가지 않는다.」




이 장면은 성 강박에 걸린 브뤼노(실제로는 섹스를 잘 할 수가 없다)가 크리스티안을 만나나체 해변으로 휴가 갔을 때의 이야기다. 그는 그녀를 통해 비로소 성으로부터 해방(혹은 치유)되어 자신이 꿈꾸던 성에 대한 판타지를 실현시킨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충격적인 장면들이 그 시대에는 만연했다는 점이다.




그에 비해 미셸은 어떤 타입이냐 하면, 학교 전체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여자(아나벨)가 자신만을 바라봐주고, 사랑해주는데도, 그의 키스를 간절히 기다리는데도 전혀 무감각하다.




「천둥 소리가 잦아들고 비가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들이 텐트의 천을 투덕투덕 때리고 있었다. 얼굴 바로 위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그의 몸에는 빗방울이 닿지 않았다. 문득 자기 인생이 그 상황과 비슷하리라는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앞으로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 사이로 지나가게 될 것이다. 때로는 그것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으리라. 다른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불행을 느끼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감정들 가운데 어떤 것도 나에게 닿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리라. 」




아래 발췌 부분은 미셸이 결혼식 장에서 목사의 설교(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어)를 듣고난 뒤 목사를 찾아가 질문하는 장면이다.




두 개의 소립자가 결합되면,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가 형성됩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한 몸에 관한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

“제 말씀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힐베르트 공간에서 양자에게 고유 상태 벡터를 부여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




제3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되는 그의 사고체계는 언제나 이러한 방식으로 흘러간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그는 우연히 아나벨과 재회하게 되고, 다시 관계를 시작한다.




「그는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서, 그녀가 품고 있는 무량한 사랑에 대해서, 인생의 우여곡절이 망쳐버린 그 사랑에 대해서 그는 연민을 느꼈다. 연민은 어쩌면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인간적 감정일지도 몰랐다. 그 밖의 감정을 마주하면 그는 온몸에 찬 기운이 돌 정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기가 일쑤였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섹스도 하지만, 섹스 자체(를 통해 느껴지는 쾌감은 없다)보다는 살아있는 그녀의 몸을 가만히 안고 있는 게 더욱 좋다고 느끼는 그. 미셸은 아나벨을 통해, 아나벨의 죽음을 통해 사랑의 이미지를 경험하게 된다. 마치 인조 인간처럼 말이다.

그러나 죽음, 은 좀 다르다. 이것은 그가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헌신했던 친할머니의 죽음을 맞닥뜨리고 처음으로 지독한 공포를 느낀다. 아나벨이 암에 걸려 죽음이 확정되었을 때 또한 그가 보였던 반응을 보면.....

아마 이러한 데서 경험했던 부분들이 그로 하여금 제3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를 가능케 한 논문을 완성하게 이르렀을 것이다.




브뤼노와 미셸은 부모와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들의 삶에 그것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이 소설은 단순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형제의 비참한 인생에 관한 것 뿐일까.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도덕적 가치가 점차 파괴되어 온 것은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과정이었어. 통상의 도덕적 제약에서 벗어난 자들이 성적인 쾌락을 물리도록 만끽하고 난 뒤에 잔혹 행위라는 더 폭넓은 쾌락으로 관심을 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는 거지. 2세기 전에 사드 후작도 그와 비슷한 길을 걸었어.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의 <연쇄살인자들>은 1960년대 <히피들>의 사생아였어. 1950년대의 빈 행위 예술가들은 그들의 공통된 조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이러한 추론은 꽤 그럴싸하고 멋지지 않나. 히피들이 아무 책임감도 없이 세상에 뿌려놓은 부모를 도대체 알 수 없는(!) 사생아들이 연쇄살인범으로 자라났다 라니. ㅋ




그러나, 아직까지 서두에서 강렬하게 끄집어냈던 주제,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셸 제르진스키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해결하는데 매우 골몰해있었다.




「마르주노의 가설에 따르면, 개인의 의식은 힐베르트 공간들의 총합으로 정의되는 포크 공간 속의 확률장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개인의 의식이라는 장은 대체로 시냅스의 극히 미세한 부위에서 일어나는 아주 간단한 전자적 사상들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개인의 통상적인 행동은 장의 탄력적인 일그러짐에 해당하고 자유의지에 따른 일탈 행위는 장의 파열에 해당한다.」




「개인의 의식은 동물의 계통수에서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었다. 여기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 의식은 언어보다 훨씬 앞서는 것임이 분명했다. 다윈주의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목적론에 빠져 있는 탓에 늘 그랬듯이 의식의 출현에 관해서도 자연도태의 가설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이 가설이 설명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은 그저 신화적인 재구성일 뿐이었다. 그들이 인간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사실 그 인간 중심주의적 원칙은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생명이 진화를 거듭하여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눈과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뇌를 갖게 되었다고 치자.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그런 식으로는 의식의 출현이라는 현상을 전혀 설명할 수가 없다. 선충류에는 없던 자기 의식이 <라케르타 아길리스> 같은 도마뱀에 와서는 분명히 나타나게 되었다. 자기 의식이 있다는 건 십중팔구 중추신경 조직과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것은 여전히 완전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미셸이 보기에 의식의 출현은 어떠한 해부학적, 생화학적 조건과도 관계가 없는 듯했다. 그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낙담하고 있었다.」




브뤼노는 크리스티안의 필연적인 자살 이후,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아 감금시킨다. 처음 가보는 것도 아니었다. 미셸은 아나벨의 장례식을 치르고 아일랜드 연구소로 옮겨 본격적인 연구에 몰입한다. 마치 대상 행위를 하듯 말이다. 그 또한 브뤼노와 같은 배경이 아닐지.




「욕구 불만 상태에 빠진 동물이 보여 주는 첫 번째 반응은 대개 더 힘을 내서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닭(갈루스 도메스티쿠스)을 철망 울타리에 가두어 먹이를 얻지 못하게 하면, 이 닭은 철망 울타리를 넘어가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다가 그 행동은 점차 다른 행동으로 바뀐다. 이 다른 행동에는 일견 아무 목적이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비둘기(콜룸바 리비아)는 원하는 먹이를 얻지 못하게 되면, 땅바닥을 자꾸 콕콕 쪼아댄다. 땅바닥에는 먹을 것이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비둘기는 그렇게 공연히 부리로 땅바닥을 쪼는 행위를 할 뿐만 아니라, 제 깃털을 매끈하게 다듬는 짓을 하기도 한다. 욕구 불만이나 갈등을 초래하는 상황에서 자주 나타나는 그런 의미없는 행동을 흔히 <대상(代償)행위>라 부른다. 1986년 초, 나이 서른을 갓 넘긴 브뤼노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와 맥락이 비슷한 행위였으리라.」




형이상학적 돌연변이, 이것은 미셸의 가설이다.

제르진스키는 인류는 사라지고 인류 대신 새로운 종이 생겨나야 한다. 인류 대신 무성 생식을 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운 종, 개인성과 분리와 생성 변화를 극복한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명제하에 유전자 조작에 관한 이 연구를 완성했다. 이 논문의 기저에는 <완전 복제>에 관한 이론이 밑바탕으로 깔려있다. 즉, 염색체 가운데서 돌연변이를 일으키지 않는 유전자만을 복제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콩트는 과학적인 방법론을 포함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실증주의의 진정한 창시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당대의 어떤 형이상학이나 어떤 존재론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콩트가 1924년에서 1927년 사이의 닐스 보어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엄격한 실증주의적 태도를 견지했을 것이고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했을 겁니다. 그런데 콩트는 개인적인 삶을 허구적인 것으로 보고 사회적 상황의 실제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역사적인 과정과 의식의 조류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였지요. 게다가 그는 사랑의 감정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주렉과 체와 하드캐슬의 저작이 나온 뒤로 새로운 존재론이 확고한 틀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대상의 존재론이 상태의 존재론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상태의 존재론만이 인간관계의 실제적인 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상태의 존재론에서는 소립자들이 식별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어떤 <수>를 통해서 그것들을 규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상태의 존재론에서 식별될 수 있고 명명될 수 있는 실체는 파동 함수와 이것을 매개로 해서 나나타는 상태 벡터뿐입니다. 이런 존재론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형제애와 연민과 사랑에 다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실증주의와 사랑의 감정이다. 요컨대 논지의 결과, 자연 도태에서 벗어나야 하며 필연적으로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 형이상학적 돌연변이가 필요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앞서의 증언에 따라 우리는 미셸이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관한 연구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다시 뒤에서 하도록 하겠다.




그의 논문으로 돌아가자.




「효모균 류에 관해 연구해 본 결과, 성적인 방식으로 번식하는 변종들보다 클론으로 번식하는 변종들이 더 빠르게 진화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효모균 류의 경우에는 우연하게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자연 도태보다 더 유효한 셈이다. 재미있는 실험모델이었다. 유성생식을 진화의 동력으로 보는 기존의 가설을 명백하게 반박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엽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유전자 암호가 완전히 풀리게 되면 (그건 이제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인류는 자신의 생물학적 진화를  통제할 수 있게 될 터였다. 그러면 성은 본래 무용하고 위험하고 퇴행적인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었다.」

 

이러한 제르진스키의 논문을 실현시킨 사람은 허브체작이다.




「인간처럼 지능을 갖닌 새로운 종의 첫 개체, 인간이 <자신의 모습대로>지어낸 새로운 종의 첫 대표자가 창조된 것은 2029년 3월 27일이었다. 미셸 제르진스키가 실종된 지 꼭 20년 째 되는 날이었다.(...)사람들은 60년 전인 1969년 7월의 어느 날 인간이 달에 첫발을 내딛는 장면이 생중계되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방송의 첫머리에서 허브체작은 아주 짤막한 연설을 했다.(...)

“인류는 이제 자기 자신을 다른 종으로 대체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인류는 스스로를 소멸시키고 다른 종으로 거듭 태어나는 최초의 동물 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 근사한 이중의 메타포를 보라!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종족이라니!

소설의 전체적인 흐름(시대의 정신이 소립자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볼 때, 그리고 다윈주의자의 진화론에 의거한다면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보여지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소멸되어야만 한다,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인간들을 향한, 이 도발적인 역설.




여기에 대해 인류 대신 등장한(물론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새로운 종족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보자.




「인류가 우리를 만들었으나 우리는 이제 그들과 우리를 묶어 주고 있던 부모 자식의 연을 끊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행복하다. 우리는 그들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 이기주의와 잔혹성과 분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옛인류의 눈에는 우리 세계가 천국처럼 보일 것이다. 하기는 우리도 이따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자신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옛 인류에게 그토록 많은 꿈을 꾸게 만들었던 그 이름으로 말이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만들어낸 그 불운하지만 용감한 종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원숭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 종은 고통 속에서 천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고결한 꿈이 있었다. 그 종은 모순 덩어리였고 개인주의적이었으며 싸움을 좋아했고 이기심에 끝이 없었으며 때로는 가공할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선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이 책을 인류에게 바친다.」




작가의 이 집요함.ㅋ 사진을 들여다봤다. 정말로 바늘 하나 들어갈 구석이 안보인다. ㅋㅋ




양자역학과 형이상학의 버무림, 이건 내가 꽤나 좋아하는 방식인데, 여기에 시대와 역사, 사회와 개인까지 버무려 놓았다. 정말 근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98년에 발표되어 유럽 평단을 발칵 뒤집어놓았다고 한다. 아니나다를까 책을 읽고나면 그럴만하다 싶다. 작가는 정말로 거침없이 이 작품을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성에의 묘사는 노골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발언들, 나라든 종교든 저명한 철학자든 거침없는 깎아내림에, 그의 통렬한 시선이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까 두려울 지경이다. 사람들도 사회도 뒤집힐만 하다. 여담이지만 ‘한국’에 관한 얘기가 두 번이나 등장해서 식은땀을 흘렸다는. ㅋ




여하튼 세기말 분위기에 밀레니엄적인 것을 배합시킨 소설이랄까.



 




「제르진스키의 가장 큰 공적은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을 넘어섰다는 것이 아니라(이 개념은 그의 시대에 이미 빛이 바래 있었고, 그것이 진보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양자 역학의 가설들에 대한 대담한 해석을 통해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되살려 냈다는 점이다. (...)제르진스키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나벨을 통해서 사랑의 이미지를 얻을 수는 있었다. 그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방식으로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르진스키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또다시 사랑, 이다. 예수의 가르침 그대로. 첫 번째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계일까? 아니 어쩌면 이것은 처음부터 의도된 것인지도 모른다.

브뤼노와 미셸을 통해 서구사회의 시대를 읽고 개인을 읽다보니, 결국 종교적인 문제로 귀결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는 추론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그는 한계를 역사로 혹은 신화로 의도적 자리 바꿈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의 역량이 드러난다.

이것은 또다른 종교에 다름 아니다. 희생 뒤에 만들어지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라는 도식을 따르고 있는.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를 짊어져 완전한 신이 되었듯, 이번엔 인류가 그들 스스로의 죄를 짊어지고 사라진다는, 결국 그들이 신이 되어 창조해낸 것은 역시나 스스로를 신이라고 일컫는 종족이니 말이다.

게다가 헤게모니는 여전히 피조물에 있다. 마지막 그들이 자신을 창조해낸 인류에게 바쳤듯. 새로운 종족은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도 없다.

이에 대해 작가는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고백한다.




「나는 종교란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만일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어떤 시도가 합리적 확실성에 대한 우리의 요구와 상충한다면, 그 시도는 성립될 수 없어. 수학적 증명이나 실험은 인간의 의식이 획득한 돌이킬 수 없는 권리야. 그걸 포기할 수는 없지. 」




요컨대, 작가는 종교를 말하기 위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한 것은 아닐지. 만약 이 지점에서 소설의 모티프가 있었다면?!




「어떤 물고기가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이따금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다고 할 때, 그 물고기는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몇 초 동안 무엇을 보게 될까? 수중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공기의 세계, 천국 같은 세계를 보게 되지 않을까? 물론 그러고 나면 물고기는 약육강식의 언리가 지배하는 해초의 정글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물고기는 다른 세계, 어떤 완전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감하지 않았을까?」

 

내 추론이 그렇게까지 생뚱맞지만은 않을 것 같지만, 개인적인 바램일지도 모른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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