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미셀 우엘벡 저/이세욱 역/열린 책들
「형이상학적 돌연변이, 즉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세계관의 근본적이고 전반적인 변화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아주 드물게만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기독교의 출현이 바로 그런 변화에 해당된다.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일단 일어났다 하면, 이렇다 할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궁극적인 귀결에 이를 때까지 발전해 간다. 그러면서 정치 경제 체제며 심미적 판단이며 사회적 위계 질서를 가차없이 휩쓸어 간다. 인간의 어떤 힘도 그 흐름을 중단시킬 수 없다. 그 흐름을 중단시킬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의 출현뿐이다.」
이 소설은 이렇듯 제3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의 출현을 예고하며 흥미롭게 시작된다. 이렇게 거창하게 던지며 시작할 수 있는 작가는 정말로 희귀하다. 도대체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숨어두었길래 이렇듯 자신만만한 것일까.
소설은 브뤼노와 미셸이라는 이부 형제(아버지가 다른)의 생애를 통해 서구사회의 시대 풍조를 읽어낸다.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대 풍조가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그리하여 종내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브뤼노는 성 문화를 통해, 미셸은 그의 연구와 실험을 통해,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히피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두 형제는 어머니는 얼굴 구경 한 번 못한 채 각각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손에 맡기워 양육된다. 형인 브뤼노는 국어 선생이고, 동생인 미셸은 해마다 노벨상 후보에 오르는 분자생물학자다. 언뜻 그럴싸 해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인생은 늘 허기져있다. 브뤼노는 섹스 중독자에 미셸은 관계 불감증이다.
「욕망과 쾌락은 문화적이고 인류학적인 현상이다. 이것들은 한 사회의 성격을 결정짓는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회가 어떠하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것들이다. 결국 욕망과 쾌락 그 자체로는 사회 구성원들의 성행동에 관해 거의 아무런 설명도 할 수가 없다. 」
1950년대의 자유 연애, 1960년대의 성 해방 이념, 1970년대는 이 두 가지가 절대 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브뤼노를 눈으로 해서 그들의 난삽한 성문화에 대해 묘사되는 내용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펠라티오나 파트루즈(쓰리썸)는 얌전할 정도다. 가령, 한 부분을 들여다보자.
「누구든 어떤 상대에게 접근하고자 할 때에는 사전에 대개는 명시적으로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원하지 않는 애무를 피하고 싶으면 간단한 고갯짓으로 그 사실을 알린다. 그러면 남자들은 즉시 정중하게 사과를 한다. 남자들의 태도는 너무나 예의 바른 나머지 익살스런 느낌마저 든다.
(..)
왜냐하면 이 구역은 한 여자가 여러 남자들을 상대하는 이른바 <갱뱅>의 애호가들을 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역시 한 커플이 애무를 시작함으로써 판이 벌어진다. 보통은 여자의 펠라티오로 시작된다. 그러면 즉시 열 명에서 스무 명쯤 되는 남자들이 이 커플을 에워싼다. 남자들은 앉거나 선 자세로 그 장면을 보면서 자위 행위를 한다. 어떤 때는 그것으로 판이 중단되고 관객들이 점차 흩어져 간다. 또 어떤 때는 여자가 손짓으로 다른 남자들이 가세해도 좋다는 뜻을 알린다. 그러면 남자들은 서두르지 않고 차례차례 그녀에게 다가가서 손이나 입으로 애무를 하기도 하고 삽입을 하기도 한다. 여자는 판을 중단하고 싶으면 역시 간단한 손짓으로 그 사실을 알린다. 말은 전혀 오고가지 않는다.」
이 장면은 성 강박에 걸린 브뤼노(실제로는 섹스를 잘 할 수가 없다)가 크리스티안을 만나나체 해변으로 휴가 갔을 때의 이야기다. 그는 그녀를 통해 비로소 성으로부터 해방(혹은 치유)되어 자신이 꿈꾸던 성에 대한 판타지를 실현시킨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충격적인 장면들이 그 시대에는 만연했다는 점이다.
그에 비해 미셸은 어떤 타입이냐 하면, 학교 전체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여자(아나벨)가 자신만을 바라봐주고, 사랑해주는데도, 그의 키스를 간절히 기다리는데도 전혀 무감각하다.
「천둥 소리가 잦아들고 비가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들이 텐트의 천을 투덕투덕 때리고 있었다. 얼굴 바로 위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그의 몸에는 빗방울이 닿지 않았다. 문득 자기 인생이 그 상황과 비슷하리라는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앞으로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 사이로 지나가게 될 것이다. 때로는 그것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으리라. 다른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불행을 느끼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감정들 가운데 어떤 것도 나에게 닿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리라. 」
아래 발췌 부분은 미셸이 결혼식 장에서 목사의 설교(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어)를 듣고난 뒤 목사를 찾아가 질문하는 장면이다.
“두 개의 소립자가 결합되면,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가 형성됩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한 몸에 관한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
“제 말씀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힐베르트 공간에서 양자에게 고유 상태 벡터를 부여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
제3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되는 그의 사고체계는 언제나 이러한 방식으로 흘러간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그는 우연히 아나벨과 재회하게 되고, 다시 관계를 시작한다.
「그는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서, 그녀가 품고 있는 무량한 사랑에 대해서, 인생의 우여곡절이 망쳐버린 그 사랑에 대해서 그는 연민을 느꼈다. 연민은 어쩌면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인간적 감정일지도 몰랐다. 그 밖의 감정을 마주하면 그는 온몸에 찬 기운이 돌 정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기가 일쑤였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섹스도 하지만, 섹스 자체(를 통해 느껴지는 쾌감은 없다)보다는 살아있는 그녀의 몸을 가만히 안고 있는 게 더욱 좋다고 느끼는 그. 미셸은 아나벨을 통해, 아나벨의 죽음을 통해 사랑의 이미지를 경험하게 된다. 마치 인조 인간처럼 말이다.
그러나 죽음, 은 좀 다르다. 이것은 그가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헌신했던 친할머니의 죽음을 맞닥뜨리고 처음으로 지독한 공포를 느낀다. 아나벨이 암에 걸려 죽음이 확정되었을 때 또한 그가 보였던 반응을 보면.....
아마 이러한 데서 경험했던 부분들이 그로 하여금 제3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를 가능케 한 논문을 완성하게 이르렀을 것이다.
브뤼노와 미셸은 부모와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들의 삶에 그것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이 소설은 단순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형제의 비참한 인생에 관한 것 뿐일까.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도덕적 가치가 점차 파괴되어 온 것은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과정이었어. 통상의 도덕적 제약에서 벗어난 자들이 성적인 쾌락을 물리도록 만끽하고 난 뒤에 잔혹 행위라는 더 폭넓은 쾌락으로 관심을 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는 거지. 2세기 전에 사드 후작도 그와 비슷한 길을 걸었어.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의 <연쇄살인자들>은 1960년대 <히피들>의 사생아였어. 1950년대의 빈 행위 예술가들은 그들의 공통된 조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이러한 추론은 꽤 그럴싸하고 멋지지 않나. 히피들이 아무 책임감도 없이 세상에 뿌려놓은 부모를 도대체 알 수 없는(!) 사생아들이 연쇄살인범으로 자라났다 라니. ㅋ
그러나, 아직까지 서두에서 강렬하게 끄집어냈던 주제,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셸 제르진스키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해결하는데 매우 골몰해있었다.
「마르주노의 가설에 따르면, 개인의 의식은 힐베르트 공간들의 총합으로 정의되는 포크 공간 속의 확률장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개인의 의식이라는 장은 대체로 시냅스의 극히 미세한 부위에서 일어나는 아주 간단한 전자적 사상들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개인의 통상적인 행동은 장의 탄력적인 일그러짐에 해당하고 자유의지에 따른 일탈 행위는 장의 파열에 해당한다.」
「개인의 의식은 동물의 계통수에서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었다. 여기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 의식은 언어보다 훨씬 앞서는 것임이 분명했다. 다윈주의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목적론에 빠져 있는 탓에 늘 그랬듯이 의식의 출현에 관해서도 자연도태의 가설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이 가설이 설명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은 그저 신화적인 재구성일 뿐이었다. 그들이 인간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사실 그 인간 중심주의적 원칙은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생명이 진화를 거듭하여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눈과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뇌를 갖게 되었다고 치자.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그런 식으로는 의식의 출현이라는 현상을 전혀 설명할 수가 없다. 선충류에는 없던 자기 의식이 <라케르타 아길리스> 같은 도마뱀에 와서는 분명히 나타나게 되었다. 자기 의식이 있다는 건 십중팔구 중추신경 조직과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것은 여전히 완전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미셸이 보기에 의식의 출현은 어떠한 해부학적, 생화학적 조건과도 관계가 없는 듯했다. 그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낙담하고 있었다.」
브뤼노는 크리스티안의 필연적인 자살 이후,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아 감금시킨다. 처음 가보는 것도 아니었다. 미셸은 아나벨의 장례식을 치르고 아일랜드 연구소로 옮겨 본격적인 연구에 몰입한다. 마치 대상 행위를 하듯 말이다. 그 또한 브뤼노와 같은 배경이 아닐지.
「욕구 불만 상태에 빠진 동물이 보여 주는 첫 번째 반응은 대개 더 힘을 내서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닭(갈루스 도메스티쿠스)을 철망 울타리에 가두어 먹이를 얻지 못하게 하면, 이 닭은 철망 울타리를 넘어가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다가 그 행동은 점차 다른 행동으로 바뀐다. 이 다른 행동에는 일견 아무 목적이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비둘기(콜룸바 리비아)는 원하는 먹이를 얻지 못하게 되면, 땅바닥을 자꾸 콕콕 쪼아댄다. 땅바닥에는 먹을 것이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비둘기는 그렇게 공연히 부리로 땅바닥을 쪼는 행위를 할 뿐만 아니라, 제 깃털을 매끈하게 다듬는 짓을 하기도 한다. 욕구 불만이나 갈등을 초래하는 상황에서 자주 나타나는 그런 의미없는 행동을 흔히 <대상(代償)행위>라 부른다. 1986년 초, 나이 서른을 갓 넘긴 브뤼노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와 맥락이 비슷한 행위였으리라.」
형이상학적 돌연변이, 이것은 미셸의 가설이다.
제르진스키는 인류는 사라지고 인류 대신 새로운 종이 생겨나야 한다. 인류 대신 무성 생식을 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운 종, 개인성과 분리와 생성 변화를 극복한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명제하에 유전자 조작에 관한 이 연구를 완성했다. 이 논문의 기저에는 <완전 복제>에 관한 이론이 밑바탕으로 깔려있다. 즉, 염색체 가운데서 돌연변이를 일으키지 않는 유전자만을 복제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콩트는 과학적인 방법론을 포함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실증주의의 진정한 창시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당대의 어떤 형이상학이나 어떤 존재론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콩트가 1924년에서 1927년 사이의 닐스 보어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엄격한 실증주의적 태도를 견지했을 것이고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했을 겁니다. 그런데 콩트는 개인적인 삶을 허구적인 것으로 보고 사회적 상황의 실제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역사적인 과정과 의식의 조류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였지요. 게다가 그는 사랑의 감정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주렉과 체와 하드캐슬의 저작이 나온 뒤로 새로운 존재론이 확고한 틀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대상의 존재론이 상태의 존재론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상태의 존재론만이 인간관계의 실제적인 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상태의 존재론에서는 소립자들이 식별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어떤 <수>를 통해서 그것들을 규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상태의 존재론에서 식별될 수 있고 명명될 수 있는 실체는 파동 함수와 이것을 매개로 해서 나나타는 상태 벡터뿐입니다. 이런 존재론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형제애와 연민과 사랑에 다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실증주의와 사랑의 감정이다. 요컨대 논지의 결과, 자연 도태에서 벗어나야 하며 필연적으로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 형이상학적 돌연변이가 필요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앞서의 증언에 따라 우리는 미셸이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관한 연구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다시 뒤에서 하도록 하겠다.
그의 논문으로 돌아가자.
「효모균 류에 관해 연구해 본 결과, 성적인 방식으로 번식하는 변종들보다 클론으로 번식하는 변종들이 더 빠르게 진화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효모균 류의 경우에는 우연하게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자연 도태보다 더 유효한 셈이다. 재미있는 실험모델이었다. 유성생식을 진화의 동력으로 보는 기존의 가설을 명백하게 반박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엽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유전자 암호가 완전히 풀리게 되면 (그건 이제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인류는 자신의 생물학적 진화를 통제할 수 있게 될 터였다. 그러면 성은 본래 무용하고 위험하고 퇴행적인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었다.」
이러한 제르진스키의 논문을 실현시킨 사람은 허브체작이다.
「인간처럼 지능을 갖닌 새로운 종의 첫 개체, 인간이 <자신의 모습대로>지어낸 새로운 종의 첫 대표자가 창조된 것은 2029년 3월 27일이었다. 미셸 제르진스키가 실종된 지 꼭 20년 째 되는 날이었다.(...)사람들은 60년 전인 1969년 7월의 어느 날 인간이 달에 첫발을 내딛는 장면이 생중계되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방송의 첫머리에서 허브체작은 아주 짤막한 연설을 했다.(...)
“인류는 이제 자기 자신을 다른 종으로 대체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인류는 스스로를 소멸시키고 다른 종으로 거듭 태어나는 최초의 동물 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 근사한 이중의 메타포를 보라!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종족이라니!
소설의 전체적인 흐름(시대의 정신이 소립자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볼 때, 그리고 다윈주의자의 진화론에 의거한다면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보여지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소멸되어야만 한다,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인간들을 향한, 이 도발적인 역설.
여기에 대해 인류 대신 등장한(물론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새로운 종족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보자.
「인류가 우리를 만들었으나 우리는 이제 그들과 우리를 묶어 주고 있던 부모 자식의 연을 끊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행복하다. 우리는 그들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 이기주의와 잔혹성과 분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옛인류의 눈에는 우리 세계가 천국처럼 보일 것이다. 하기는 우리도 이따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자신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옛 인류에게 그토록 많은 꿈을 꾸게 만들었던 그 이름으로 말이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만들어낸 그 불운하지만 용감한 종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원숭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 종은 고통 속에서 천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고결한 꿈이 있었다. 그 종은 모순 덩어리였고 개인주의적이었으며 싸움을 좋아했고 이기심에 끝이 없었으며 때로는 가공할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선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이 책을 인류에게 바친다.」
작가의 이 집요함.ㅋ 사진을 들여다봤다. 정말로 바늘 하나 들어갈 구석이 안보인다. ㅋㅋ
양자역학과 형이상학의 버무림, 이건 내가 꽤나 좋아하는 방식인데, 여기에 시대와 역사, 사회와 개인까지 버무려 놓았다. 정말 근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98년에 발표되어 유럽 평단을 발칵 뒤집어놓았다고 한다. 아니나다를까 책을 읽고나면 그럴만하다 싶다. 작가는 정말로 거침없이 이 작품을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성에의 묘사는 노골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발언들, 나라든 종교든 저명한 철학자든 거침없는 깎아내림에, 그의 통렬한 시선이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까 두려울 지경이다. 사람들도 사회도 뒤집힐만 하다. 여담이지만 ‘한국’에 관한 얘기가 두 번이나 등장해서 식은땀을 흘렸다는. ㅋ
여하튼 세기말 분위기에 밀레니엄적인 것을 배합시킨 소설이랄까.
「제르진스키의 가장 큰 공적은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을 넘어섰다는 것이 아니라(이 개념은 그의 시대에 이미 빛이 바래 있었고, 그것이 진보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양자 역학의 가설들에 대한 대담한 해석을 통해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되살려 냈다는 점이다. (...)제르진스키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나벨을 통해서 사랑의 이미지를 얻을 수는 있었다. 그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방식으로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르진스키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또다시 사랑, 이다. 예수의 가르침 그대로. 첫 번째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계일까? 아니 어쩌면 이것은 처음부터 의도된 것인지도 모른다.
브뤼노와 미셸을 통해 서구사회의 시대를 읽고 개인을 읽다보니, 결국 종교적인 문제로 귀결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는 추론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그는 한계를 역사로 혹은 신화로 의도적 자리 바꿈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의 역량이 드러난다.
이것은 또다른 종교에 다름 아니다. 희생 뒤에 만들어지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라는 도식을 따르고 있는.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를 짊어져 완전한 신이 되었듯, 이번엔 인류가 그들 스스로의 죄를 짊어지고 사라진다는, 결국 그들이 신이 되어 창조해낸 것은 역시나 스스로를 신이라고 일컫는 종족이니 말이다.
게다가 헤게모니는 여전히 피조물에 있다. 마지막 그들이 자신을 창조해낸 인류에게 바쳤듯. 새로운 종족은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도 없다.
이에 대해 작가는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고백한다.
「나는 종교란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만일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어떤 시도가 합리적 확실성에 대한 우리의 요구와 상충한다면, 그 시도는 성립될 수 없어. 수학적 증명이나 실험은 인간의 의식이 획득한 돌이킬 수 없는 권리야. 그걸 포기할 수는 없지. 」
요컨대, 작가는 종교를 말하기 위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한 것은 아닐지. 만약 이 지점에서 소설의 모티프가 있었다면?!
「어떤 물고기가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이따금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다고 할 때, 그 물고기는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몇 초 동안 무엇을 보게 될까? 수중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공기의 세계, 천국 같은 세계를 보게 되지 않을까? 물론 그러고 나면 물고기는 약육강식의 언리가 지배하는 해초의 정글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물고기는 다른 세계, 어떤 완전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감하지 않았을까?」
내 추론이 그렇게까지 생뚱맞지만은 않을 것 같지만, 개인적인 바램일지도 모른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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