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한 연구 - 상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1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돌중이 길에서 다른 돌중의 죽음을 목도한다. 그는 스승의 유언에 따라 유리로 향하던 중이다. 스승은 무슨 까닭에선지 그에게 유리를 다녀와서 당신의 장례를 치러 줄 것을 명하고는 죽어버렸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존자로 불리는 중과 외눈박이 중을 살해한 뒤 유기한다.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난 또 다른 중에게 스승의 향수를 느끼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는 증거 인멸을 위해 그마저 살해한다. 그러나 장옷으로 온몸을 감쌌던 그 중은 얼굴을 확인해보니 죽은 줄 알았던 그의 사부다. 유리의 오조촌장이었던 사부는 그에게 촌장의 징표인 해골을 넘겨준다. 이렇게 해서 유리의 육조촌장이 된 그는 사부의 조언에 따라 마른 늪에서 낚시질을 시작한다. 그것은 그가 치러야 할 죄의 댓가다. 물고기 없는 늪에서 물고기를 낚아 올려야만 하는 일. 그것만이 그를 죄에서 자유롭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가 유리에서 보낸 40일을 다룬다. 유리는 사막과도 같이 황량한 곳이다. 수도부들과 도를 닦으러 온 승려들이 주민의 전부지만, 이 승려들조차 죄를 짓고 도피온 승려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유리에서도 나름의 법률은 존재한다. 죄를 지은 뒤 40일 안에 유리를 떠나지 않으면 유리의 법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죽는 날짜와 형벌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것뿐.




박상륭의 소설 전반에 걸친 고정관념은 난해하다, 읽기 고통스럽다, 뭐 그런 반응들이다. 나 또한 사투리를 극복하지 못해 책장을 몇 장 넘기다 덮은 적도 있다. 아무 책이나 덮어놓고 읽었던 한참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그래도 내 마음 속에 박상륭은 김승옥과 더불어 늘 동경해마지않는 작가 중의 한 명이었다.

이번에 다시 그의 책을 집어든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다. 목적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간이 그만큼 나를 키운 것일까, 다시 집어든 박상륭은 너무 편안하게 읽혔다.

  

이 소설을 흔히들 말하듯 구도 소설로 본다면 <죽음의 한 연구>,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의 구원을 향한 한 인간의 집념이 이뤄낸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의 생애를 덧입은 한 돌중을 통해 연금술과 오행과 무속과 신화에의 접근을 시도하지만, 그 안에는 그 무엇에도 속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신화를 이루고자 했던 한 연약한 인간이 종내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면도칼로 저며 놓듯 낱낱이 해부해놓았다. 요컨대 <죽음의 한 연구>는 신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하는 육체의 틀에 갇힌 유한한 인간의 영원(그것은 무가 될 수도 있다)을 갈망하는 비루하고도 고상한 몸부림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인신(人神)이 되고자 했던 사내를 위한 하나의 경전(經傳)이다. 서사는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처음 나는 작가가 이토록 깊은 관념을 이야기하면서 서사를 놓치지 않는 데서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지금은 이야기성보다는 작가의 이토록 치밀하고 대담한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어느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경전으로 기획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박상륭 소설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문장에 있다. 그의 사상적 기반이 워낙 풍성하고 견고한 까닭도 있지만, 문장은 철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장은 이를테면 작가적 시선이다.

그런 점에서 박상륭의 시선은 두려움을 느낄 만큼 본질을 향하여 거침없이 파고든다. 혓바닥 같기도 하고 요니를 파고드는 하초 같기도 하다. 그의 시선에는 대상을 향한 집착과 욕망과 무(無)와 합일의 시도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시선에서 관념의 깊이가 묻어난다. 작가는 대상을 해부하는 시선으로 관념을 형성한다. 지칠 줄 모르는 응시, 사유에의 발전, 혹은 사유적 깊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직관의 발현, 본능적으로 감각을 포착해내는 시선?

소설 속에서 주인공 돌중은 인신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죽어야만 재생, 다시 삶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다시 주어지는 삶은 처음 무작정 주어졌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개입된 삶이다. 요컨대 작가는 돌중의 죽음을 통해 태생마저 관장하려고 한 것이다. 이한 시도는 그와 연분을 나누던 수도부의 죽음 뒤 그가 부르는 애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삼고 그 과정을 철저하게 즐기는 모습, 을 때로는 애절하게 때로는 광기어린 모습으로 때로는 성자가 되어, 격정적이면서도 지극히 고요한 시선으로 훑어낸다. 

그의 시선은 입체화되어 문장에 녹아난다. 시각적인 문장을 넘어서 육감적이다. 그의 문장은 육감을 자극하며 보일 뿐 아니라 촉각처럼 온몸에 와닿는다.




그런 대신 늪의 둔덕에로 올라와, 마을 쪽을 건너다보았으나, 눈에 보이는 건 뿌연 안개의 묽음, 우중충한 습기, 겉이 아니라 안을 가로막고 드는 한랭한 폐쇄뿐이었다. 다섯 발자국 앞도 보이지 않아, 그쪽 밖이 궁금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허긴 이것은 그러나 ‘차라리 부드럽고 아늑한’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지도 모르긴 하다. 저 산자락 포개 덮고 누워 손가락 빨며, 벽자색 산수국 피었겠다고 하고 있으면, 어느덧 알밤 듣드르는 소리에 잠을 설피는, 그런 넋을 싸아안고 있는, 그런 구름의, 그런 안개의 혼돈인지도, 글쎄 모르긴 하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어떤 날, 느닷없이, 하늘이 그냥, 푸르게 엎질러버리고, 길이며 지붕 꼭대기들이 아주 낯설게 번쩍이기 시작했을 때, 안개에 알이 배고 세상 바람을 쏘이고 싶어할지, 아니면 뼛속의 곰팡이 핀 한습으로 인하여 자살을 해버릴지, 그것은 아직 모른다. p.214

 

“천년 묵은 구렁이, 계집의 간을 쪼으는 독수리, 처녀의 제사만을 받고 사는 인당수의 소용돌이, 허지만 어쩐지 나는, 그래요, 전에 없이 청순해진 듯한 것은 이상하죠? (...)내 님, 나의 주, 나를 불로 태우는 힘, 나를 저주스러운 힘으로 휘감아 틀어삼키는 이-여보, 이제는 나도, 당신을 죽이려 돌 던지는 데 끼어 함께 던지게 하시고, 당신을 못 박는 데 나도 함께 망치질하게 하시고, 당신을 태우려는 데 나도 끼어들어 송진을 끼얹게 하셔요, 그렇게 하셔요, 그러기 전에 그러나 여보, 나로부터 최후의 방울까지 피를 뽑아가셔요, 생명을 뽑아가셔요, 혼을 뽑아가셔요. 그렇게밖에 나로서는, 달리 어떻게 당신을 예배할지를 알지 못한답니다.” 하권. p310







<죽음의 한 연구>에는 많은 사상들이 버무려있지만 가장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은 프로이드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일부러 접는다. 열 마디 설명하는 말보다 그냥 본문을 제시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 부분만 가지고도 한참을 떠들 수 있기 때문에.




 성교란 하나의, 명상법으로도 던져진 것이며, 우주를 이해해 보기 위한 수단으로 놓여진 것이다. 그래서 이 음통(淫通)은 음통이 아니며, 그것은 죽음의 연구로 변해진다. 한 명료한  예로 ‘해골의 골짜기’에 세워진 ‘세상의 나무’를 타고, 한 위대한 무당이 하늘로 올라간 광경은, 다수가 일원화하는 집단 성교로서, 그 성교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다. 태초로부터, 존재나 비존재가 모두 상대적으로 존재해오기 시작했을 때, 이 황음(荒淫)은 자행되어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성기의 형태론은 음과 양, 체와 용의 여러 모습에 관한 연구인 듯하며 성교 자세의 연구는 음과 양, 체와 용이 어울리는 그 구조의 파악으로, 그기고 기교론은, 가장 훌륭한 죽음을 성취해내는 방법론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자세는 저 수백 수천의 변형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마흔다섯, 또는 스물다섯, 더 줄여서는 열두 자세로 집약하여, 그 성쇠들의 저변을 이루는 공통분모로 삼는다. 성기의 형태론은 대개 소, 코끼리, 또는 말, 쥐 같은 동물들로부터 그 원형을 취해와 우주의 법도를 밝히는데, 어쨌든 숫쥐의 왜소함으로써는 암코끼리의 광대심오함을 침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튼, 사람이 지닌 원초적 영상 속에는 언제나 짐승의 얼굴이 근저를 이루고 있어온 사실은 참으로 이상하다.

그러나 그러한 공부에는 반드시 실제에의 응용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응용을 통해, 자기를 승화시키고 고양시키고 확산시켜, 우주의 숫주재신 암주재신 자체로까지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지에서는 그리고, 오래오래 머물 수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좋은 것이며, 나중엔 대상이 없이, 혼자서, 자기 속에서 암컷을 또는 수컷을 분리해내, 수음이나 뭐 그런 행위를 통하지 않고도, 매번마다 절정에 닿을 수 있는 데까지,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권. p.303~304




이 지점에서 죽음의 한 연구는 섹스의 한 연구가 된다. 그리고 작가는 가장 큰 쾌를 자기 자신 안에서 완성시키고 발견해야 할 것으로 본다. 이를 테면 자웅동체는 인신적 삼위일체인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작품 전체를 통해 돌중을 인신으로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엮어놓았다.




끊이지 않는 궁금증. 식상하지 않게 대두되는 화두.

“도대체, 인간은, 왜, 신이, 되고자, 하는 걸까?”

‘인간이기에 인간에 머물러 인간적인 것들’

비루한 인간이어서 차라리 감사하고 만족스러운 나로선 이런 도발을 이해하기 어렵다.

죽음에의 극복, 불멸에의 욕망, 삶을 향한 몸부림과 같은 교과서적 대답은 충분하지 않은 느낌이다.  

이 작품을 재독하게 되면 그에 대한 대답이 찾아질까? 생각해보려다 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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