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가 오십이 다 돼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녀를 유목민, 혹은 유목의 예술가라 불렀다. 오랫만에 돌아 온 고향은 햇살같은 유년의 추억이 여전히 달음박질 치고 있었다. 작가가 아직  어른이 되기 전엔 자주 강둑을 찾았다. 물 속에서 가만가만 쉬고 있는 돌맹이와 바람의 리듬에 맞춰  춤추는 갈대들 곁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금새 마음이 편안해지는걸 느꼈다.  

 

   소녀는 자랐고 유랑을 떠났다.  자궁같은 고향의 바깥, 세계의 산과 강을 따라가며 가슴에서 길어올린 꿈 같은 것들을 그림과 영상으로 기록했다. 기분이 나면 춤을 추고 굿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고향을 닮은 강을 만났을 땐 작은 배를 만들어 띄우기도 했다.    

 

   서른 살 겨울이었다. 노마니즘이라는 생소한 스타일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나이 오십 넘은 작가가 그을린 얼굴로 한 눈에도 건강해 보이는 팔과 다리를 힘껏 흔들며  고향 하천가를 걷고 있었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작은 편집실 모니터를 찢고 내 심장으로 들어왔다. 방송대본을 써야할 모니터엔  ‘떠나야겠다 이제 때가 되었다. ’  는 글귀가 깜빡이고 있었다. 

 

                     막차타고 떠난 Beautiful way




  워킹홀리데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관심을 갖게 된 게 나이 서른이 다 돼서였다. 그저 막연히 혼자서 일 년쯤 다른 나라를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만 갖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떠난다는 계획같은 건 애초부터 만들지도 않았다. 그저 가고 싶다. 아- 정말 떠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한 장이 곱게 접힌 채로 몇 해전부터 나의 뇌 깊은 방 어디쯤에서 발효되고 있었을 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만 서른살까지만 발급되는 젊은이들을 위한 모험티켓이니까 . 돌아보면 언제나 내 인생이 그런 식이었다. 개학 전날 밀린 일기 한 번에 몰아쓰기, 고 3 되고 나서야 정신차리고 공부하기, 마감 시간 전에 몰아서 대본쓰기..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겨우겨우 턱걸이하듯 꼴딱 꼴딱 숨 넘어 갈듯 힘겹게 넘겨온 서른 해였다.  

 

   이번 여행도 그랬다. 대부분 대학시절 감행하는 워킹홀리데이를 나이 서른에 간신히 슬라이딩으로 비자를 얻어낸 것이다. 게다가  혼자 맘 먹는다고 훌쩍 떠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이번 여행의 당위성에 대해서  통보하고, 설득하고, 그것도 안 되면 협박이라도 해야 할 대상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난 결혼까지 한 몹쓸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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