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 - 상
지영 지음 / 아름다운날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 왜국의 장수와 조선에서 전쟁포로로 끌려온 여인이 만난다. 그들의 사랑은 너무 힘들고 어렵고 고달프다. 하지만, 절대 잊혀지지 않는 가슴의 아릿함으로 남아 오래전 읽은 책장의 표지만 보아도 손끝으로 한번 쓰다듬어 주게 된다.

  임진왜란의 끝무렵. 본국으로 도망가던 왜병들은 닥치는 대로 조선양민들을 관선(船:배)에 싣고 노비로 끌고 갔다. 그 속에 요양차 강릉에 머물다 붙잡혀온 모녀가 있었으니, 윤이규 도지사영감의 처와 그의 무남독녀 딸 윤설연(렌)이었다. 당시 11살이었던 그녀는 병든 노모를 구환하며 일본에서 말그대로 천비의 신세로 연명하게 된다.  

  그러다 강릉 산사에 있을때 인연이 닿아 목숨을 구해주었던 일본의 무사 신겐을 만나 그의 양딸이 된다. 어머니는 결국 지병으로 돌아가셨지만, 렌 어머니의 단아하고 고운 모습에 반했던 신겐은 렌에게라도 아비노릇을 하고 싶었던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렌의 나이 18세때 그가 주군으로 모시고 있던 가토 당주(지방수령정도)의 눈에 띄게 되어 정략적 목적으로 히타치의 다이묘(수령) 키타가와 류타카 측실로 바쳐지게 된다.  가토 당주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간자 역할이었고 그녀의 거부할 수 없는 족쇄는 일본에 같이 끌려왔던 사촌오빠의 목숨이었다. 

  키타가와 류타카는 당시 일본내의 실세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하나뿐인 조카로서 어린 나이에 생모가 히타치성에 침입한 원수 가문인 아시카가家의 장손에게 처참하게 유린당하고 죽은것을 목격한다. 그 때 이미 그의 마음은 정이라곤 발 붙일수 없이 말라버렸고, 오직 살의와 공격만이 남게되었다.  

  폭력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복수를 잉태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류타카의 부친은 복수를 다짐하고 도쿠가와의 힘을 빌어 아시카가를 친 후 두 딸을 데려와 하나는 자신의 측실로 하나는 아들 류타카의 정실로 삼는다. 그녀들 역시 피해자였지만 이미 감정이 말라버린 두 부자에게서 받을 수 있는건 냉대와 멸시 뿐이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히타치의 다이묘는 류타카가 되었지만 아시카가에서 온 두 자매는 각각 죽은 전 다이묘의 측실로 하나는 현 다이묘의 정실로 남게되었다.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끌려와 분풀이 상대밖에 되지 못했던 전 다이묘의 측실, 즉 류타카의 서모인 마사코는 이제 34살이 되었다. 비참함에 자살하려던 그녀를 살게 해준건 뜻하지 않게 생긴 전 당주의 아들 요시노와 다시 자신을 찾아와 준 어린 시절의 정혼자였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이를 갈며 복수를 꿈꾼다. 그 복수엔 저보단 나은 편에 속했던 여동생도 포함되어 있어서 정략적인 목적으로 받아들인 류타카의 측실 6명을 선동해 아기를 갖은 여동생에게 독을 먹이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 단지 정실이라는 이유만으로. 결국 동생은 시기보다 앞당긴 난산으로 아기는 어렵게 낳았지만 끝내 죽어버리고  이 사실을 알게된 류타카는 정실에 대한 정때문이 아니라 여자들이란 존재에 질려서 차마 그녀들의 친정을 생각해 죽이지는 못하고 측실들 모두 북쪽 동실에 유폐해 버린다. 그것이 4년전의 일이었다.

  이제 그 아이, 세이쥰은 4살이 되었다. 하지만, 어미도 없이 잔정없는 아비 속에서 자란 아이는 타고난 영민함을 밖에 보이기도 전에 말을 더듬게 되었고, 점점 포악해지기만 했다. 렌과 류타카가 첫만남도 렌이 가토 당주의 문사로서 히타치를 방문했을때 세이쥰이 죽은 생모가 연못에 있다는 요시노의 거짓말을 믿고 뛰어든것을 마침 곁에 있던 렌이 구해주면서 이루어졌다. 그때 렌은 맑고 담담하게 "히타치의 다이묘는 군자가 아닌 소인배"란 말을 함으로써 류타카에게 날카로운 첫인상을 남긴다.

  첫만남부터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 그녀는 일본의 전열도를 호령하는 도쿠가와의 앞에서도 당당하고 명민했다. 처음 가토 당주가 뇌물처럼 내민 계집을 받을 마음이 추호도 없던 류타카였지만 그녀에게로 향하는 호기심과 외숙부의 명을 어길수 없어 그녀를 히타치의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히타치에 혼자 남겨진 렌은 두번의 자살(?)시도를 막았다는 이유로 세이쥰에게 미움을 받지만 차츰  아이의 숨겨진 외로움과 영민함을 알아본 렌의 노력으로 친해지게 되자 그의 메노토(아이를 교육시키고 돌봐주는 사람)가 된다. 말도 안하고 포악하기만 하던 아이가 렌을 만나면서 보통의 아이처럼 웃고 떠들기 시작하자 다들 신기해했고 그 가운데 류타카도 있었다.

   류타카가 처음 본 렌은 사람을 잡아끄는 맑음과 탄복할 만한 영민함, 아무나 무시할 수 없는 당당함을 지닌 어린 계집애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너무나 따스하고 보드라워서 어려서 그를 떠난 어미의 품속을 떠올리게 했다. 언젠가 부터 그녀를 쫒는 자신이 낯설어 처음엔 일부러 밀어내려 하지만, 시나브로 렌을 가슴에 품게된다. 그리고 그녀를 일곱번째 측실로 삼는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짙고 깊은 그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을 수 있었던 렌. 하지만, 조선인 포로로 끌려온 렌의 입장으로선 어머니를 병들어 죽게하고 조국을 침략한 왜장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그녀의 혼란은 그녀 자신뿐만이 아니라, 류타카도 힘들게 하였지만, 류타카의 끊임없는 구애에 그녀 역시 류타카를 어느새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만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기에 류타카는 항상 그녀의 사랑에 목마르고 애타했다. 그녀가 떠나버릴 것 같아서.

  이런 와중에 히타치의 비어있는 정실 자리에 다시 정략적인 이유로 혼인을 강요하는 도쿠가와. 완강하게 거부하려는 류타카를 렌이 아픈 마음으로 설득한다. 아무리 아끼는 조카일지라도 열도의 엄격한 쇼군 체계에서 주인의 뜻을 거슬려서 그에게 불이익이 올까 두려운 마음에서였지만 류타카는 렌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라 생각하고 서운한 마음에 울분을 터뜨린다.결국 모두에겐 좋은일이고 두 사람에겐 악몽같은 그의 두번째 혼인식이 도쿠가와의 성에서 거행된다. 

  혼례가 있고 이레 동안만 정실곁에 머물던 그는 다시 렌에게 아무일 없다는 듯 돌아오고, 정실 하루는 철저히 무시된다. 너무나도 감출 줄 모르는 그의 '애첩사랑'은 하루의 대단한 가문을 불편하게 했고, 결국 렌은 도쿠가와의 호통에 무릎끓은채 하루낮하루밤을 정실 하루의 전각 앞마당에서 석고대죄를 해야했다. 류타카는 이를 갈며 온밤을 지새운다. 자신의 성으로 돌아온 류타카는 하루가 우레(신부가 처음으로 시댁의 문을 넘는것)를 하기도 전에 문앞에서 렌만 말에 태우고는 보름간의 휴식을 찾아 떠난다. 산속 깊은 온천지역에 렌을 데려온 류타카는 그동안의 미안함에서 나온 어색함을 풀고, 렌 역시 그 순간만은 모든것을 다 잊고 그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행복하고 서글픈 밀월여행이었다.

   그들이 아쉬운 보름을 보내고 돌아온 날 하루의 회임소식을 듣게된다. 모든것이 두쪽으로 쫙 갈라졌다. 하늘도 땅도. 온세상은 암흑으로 변했지만 렌은 소리칠 수 없었다. 류타카 역시 한발 다가온 렌이 이제 자신 때문에 다시 두발 물러날 것을 생각하니 미칠듯 했다. 또한 텅빈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원망하는 말 한마디, 속을 내비치는 울음하나 보이지 않는 렌에게 괜스레 화가 났다. 그 순간 칼을 들어 모든것을 끝내리라 결심하는 류타카에게 울음을 터뜨리며 렌이 매달린다. 사랑에 빠진 류타카는 울부짖는 렌을 보듬어 안으며 사과 대신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마음을 내보이는 렌이 마냥 고마워서. 하지만, 끝내 무슨 말인가를 해주려던 그는 하지 못하고 삼켜 버린다.   

  다케 가문의 장녀 하루는 사실 사랑하는 정혼자가 있었다. 지난 전쟁터에서 죽지만 않았다면 그녀도 이런 취급을 받으며 히타치에 머물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혼자의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자리를 지켜야했다. 그러기 위해선 류타카의 마음을 다 차지하고 있는 렌을 치워야했다. 그래서 하루는 렌에게 제발 아이에게서 아버지를 뺏지 말아달라며 그의 곁을 떠나 달라고 말한다. 렌은 순간 갈등한다. 그때즈음 그녀는 이미 자신의 지병 '궐심통'-흔히들, 사랑을 하면 죽게된다는 심장병-을 알고 있었기에 절대 그녀의 자리를 뺏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사실대로 말하고 매달려 볼까... 그냥 그의 곁에 이렇게 머무르게만 해달라고...하지만, 그녀는 차갑고 담담하게 소도(刀칼)까지 꺼내보이며 자해까지 언급하는 하루를 엄하게 나무라며 생각할 말미를 달라고 말한다. 물러나오는 길에 그녀는 속울음을 울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죽어도 갖을 수 없는 류타카의 아기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려고 한다는것이 화가나면서 서글펐다.. 

그리고 마침내 어렵게 자신을 찾아와 준 사촌오빠와 함께 탈출을 결심한다. 떠날날이 잡히자 그녀는 하루하루가 애틋했다. 류타카는 전에 없이 애정을 표현해주고 먼저 손 내밀어 주는 렌을 보며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여 준것에 한없이 기쁘고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다 마지막 밤. 

  잠든 류타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슬픔에 눈물짓던 렌의 눈물방울이 그의 잠을 깨우지만, 잠든 줄 알고 빠져나가는 렌의 뒷모습에 배신감과 분노에 치를 떨면서도 그녀를 이렇게 놓칠까 두려워 한다. 결국 탈출은 실패를 하게 되고 같이 잡힌 남자가 사촌 오라비라는 걸 알게 되지만 류타카는 더 화가 난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그대로 떠나려 한 그녀에게. 하지만, 오라비와 같이 며칠을 감금된 채 물한모금 안 넘기던 렌이 쓰러지자 류타카는 심장이 무너짐을 느낀다. 그리고 그제서야 렌의 병명을 제대로 알게된다. 류타카는 오라비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렌은 그의 곁에 남아야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보낼 자신이 없었다. 렌은 류타카에게 자신의 결정으로 그의 곁에 남는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자신이 떠나려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이성을 잃은 그의 모습에 더 가슴이 아파서, 죽더라도 가족과 조국을 버리더라도 그의 곁을 지키고 싶을만큼 그를 사랑한다는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얼마 후, 키타가와家에 전쟁의 희생물로 시집와 복수의 칼날을 갈던 류타카의 서모는 자신의 친정과 내통하여 히타치의 성을 기습 공격하고 불에 휩싸인 곳에서 렌은 임신한 하루를 위해 호위무사를 양보하고 자객과 불에 맞서야했다. 불기둥과 연기가 그녀를 덮치는 순간 그녀의 가장 큰 후회는 류타카에게 자신의 사랑을 한번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 

류타카 역시 쏟아져 들어온 기름과 불방망이, 숨어들어온 자객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간신히 렌을 찾지만, 어디에서도 그녀가 보이지 않자 불타는 집으로 뛰어들려한다. 말리는 수하들의 손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그의 맘속엔 그녀에게 사랑한단  말을 하지 못했다는 후회만이 가득했다.....

 

 

참,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슬프고, 그러면서도 멋있는 얘기다. 명성만큼이나 짜임새있고, 인물들의 캐릭터들도 확실하고, 곱고, 멋있다. 임진왜란 때의 일본이란 배경도 그렇고 자칫, 일본이란 나라의 선입관 때문에 남주의 이미지가 참 조심스러울법도 한데, 전혀 거부감이 없이 너무나 멋있다.  

현실적으로 봐서는 처,첩이 일곱이나 있는 사내의 두번째 부인자리. 그게 여주의 자리라니, 기막힐것 같은데도 이 이야기 속에서는 아름답게만 비쳐지니. 

나도 류타카처럼 '렌'에게 홀렸나보다...^^  

아니, 난 사실 투박한 무장 류타카의 짧고 기교없는 문장 속 '밀어'들에 홀렸다... 

반복되는 말…'피식' 웃었다. 라는 말이 '싱긋'이라는 서양식 웃음보다 정서에 맞아서 더 좋았다. 그리고, 이 소설의 시점이 여주도, 남주도 전지전능도 아닌 다소 복합적이라는 것이  참, 읽는 내내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로맨스소설에선 흔치않은 남주와 여주의  죽음.

물론,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으로 같이 죽어 해피엔딩이라고 주장하듯이 이 글 역시 둘이 미워해서 헤어진것이 아니니 새드엔딩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슴이 짠하고, 그렇게 서로를 사랑했는데, 사랑하는 여자를 먼저 보내고 남은 세월동안 어떻게 살았을지....류타카가 너무 가엾었다.   

이제 같이 있는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다행이다 싶고 기분이 좋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이면 연못을 바라보며 렌을 그리워하는 류타카가 떠오를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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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는개 가득한 靑山 아래 홀로 핀 매화꽃이 

햇귀 드리운 못가에 곤히 잠든 연꽃을 보고는 

꽃송이째 물위로 떨어진다. 

볕 아래 꽃 피우는 계절이 다르기에 서로 닿을 연이 아니건만, 

精은 그보다 깊은지라 꽃으로 하여금 제 철을 잊게 하니, 

보는 이의 애를 긋는다. 

하늘의 飛雪은 두 꽃의 설움인 양 눈물인 양 물위로 젖어들고 

희미한 달빛 아래 남겨진 것은 닷오는 마음뿐이라. 

사람의 한뉘 덧없다지만, 이내 눈물 드리워 기다린다. 

빗속의 잘패향이 운무처럼 멀리 퍼져 아련해지면 오시는 님이여, 

그대 닷오는가, 진정 닷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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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흰눈이 나리면 내 가슴이 두근거릴 것 같다. 

400년전 렌과 류타카를 볼 수 있을것 같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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