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능력이 생긴다면 아빠부터 없애볼까 상상초과
청예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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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여운 친구의 이름은 클레입니다.


클레는 그저 세상이 불타는 걸 보고 싶어 하는 친구죠.


클레가 딱히 세상에 불만을 품은 건 아닙니다. 단지 물고기를 폭파시키는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할 뿐.


따라서 클레는 오늘도 폭탄을 바리바리 싸 들고 눈에 보이는 몬스터들을 죄다 폭☆발★시켜버리고 다닙니다.


심지어 촉법소년이라서 아무도 클레를 말릴 수 없다고 하네요.







이 무섭게 생긴 아저씨의 이름은 조커입니다.


3년 전, 날강두의 노쇼 이후로 공식적으로 '메시 지지'를 선언한 이 아저씨는 세상에 불만이 많습니다.


때문에 세상을 불태울 기름값을 벌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마피아들의 삥을 뜯고 다니시죠.


다만 배트맨을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정작 배트맨은 원더우먼이랑 썸을 타고 있으니 상심이 큽니다.


오죽했으면 배트맨이 놀아주지 않는다고 배 두 대를 훔쳐서 고담 시 시민들과 한강 유람을 떠나는 기행을 벌였겠어요.







이 인자한 미소를 지니신 할아버지의 이름은 잼 아저씨입니다.


밀가루 반죽만으로 호빵맨, 식빵맨, 카레빵맨 등의 무시무시한 전투병기를 제작할 수 있는 할아버지죠.


잼 아저씨 또한 세상에 불만이 매우매우 많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의 모든 세균맨들을 남김없이 소각하는 걸 꿈꿨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죠.


이제 잼 아저씨는 뼛속까지 썩어 빠진 세상을 통째로 불태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한 명 더.


세상에 불만이 아주아주 많은 친구가 있습니다.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빠.


아빠에게 맞기만 하는 엄마.


매일같이 학교에서 얼굴을 맞대야 하는 일진 무리들.


2만 원짜리 카디건도 고심과 흥정 끝에 구입해야 하는 지갑사정.






우스꽝스러운 2만 원짜리 카디건 하나에 그럭저럭 잘 샀다며 만족해야 하는 내가 싫었다.


원래 사람이란 한번 마음에 들지 않는 걸 발견하면 어떻게든 더 싫어하고자 용을 쓰는 법입니다.


그런데 주인공 '나'는 굳이 이런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세상이 먼저 자길 싫어하도록 판을 깔아주네요?


적어도 내 삶은 아무리 노력해봤자 행복과 등가교환 되지 않았다.

행복과 불행에는 사이클이 없었다.


허나 아쉽게도 '나'에게는 클레의 통통 폭탄도, 조커의 캠프파이어용 돈다발도, 잼 아저씨의 전쟁병기 제작 능력도 없습니다.


세상이 제발 나 좀 싫어해달라고 온갖 불행을 가하는데 고등학생 2학년짜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







물론 이런 초등학생들이 존재하는 세계관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습니다만...






애석하게도 이런 세상에서 '나'가 믿고 의지할 대상이라고는 조향사를 꿈꾸는 베프 시우뿐.


아이돌에 환장하는 시우는 머릿속이 꽃밭이지만 정작 그 향기가 '나'에게까지 전달되진 않습니다.


오히려 시우와의 시간이 즐거울수록, 비참해지죠.


내가 시우처럼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한 적이 언제였던가.


원래 인생이란 공평보다는 불공평에 더 가까운 법입니다.


쟤가 주식을 사면 우상향인데 내가 주식을 사면 우하향.


쟤가 산 코인은 떡상하는데 내가 산 코인은 떡락.






하지만 이러한 불공평은 언제까지나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주식 사라, 코인 사라,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거 아니잖아요?


전적으로 내가 선택한 불공평이란 말이죠.







안 그래요?


안 그래 카카오게임즈야?






하지만 '나'가 마주하는 불공평은 결코 '선택'이 아닙니다.


즐거운 상상이 가득한 하루를 보내더라도 우리 집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런 가족을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아버지도, 이런 어머니도 선택한 적이 없죠.


아니.


이런 세상에 태어나는 것조차 '나'의 선택과는 무관했습니다.






선택하지 않은 가정.


선택하지 않은 부모.


선택하지 않은 존재.


선택하지 않은 불공평과 불행.






따라서 '나'는 이러한 세상에 불만이 많습니다.


아주아주아주아주 많습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괜히 태어나서, 지지리도 고생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나'에게, 초능력이 주어집니다.


"내가 주는 모든 능력은 그 능력을 받을 아이들이 가진 불행에서 비롯된다."


꿈에서 만난 신비로운 백호신으로부터 초능력을 부여받은 '나'


'나'가 지닌 능력은, 바로 상대에게 원하는 만큼의 고통을 주는 것.


'체헤버리라지.'


'아주 조금만 더 아팠으면!'


'견딜 순 있지만, 살짝 거슬릴 만큼만 아파보길.'


'딱 1초 동안만 쿡 찌르는 고통.'


초능력을 사용하는 데 그 어떤 조건도 한계도 없습니다.


'변신!' 같은 부끄러운 명령어도 필요하지 않죠.


그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면 됩니다.


상대가 느낄 고통을.






마냥 세상에게 당하기만 했던 '나'에게


마침내 세상에 반격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 것입니다.






아빠도,


일진 무리도,


이제부턴 당한 만큼 되갚아줄 차례죠.


'나'를 아프게 했던 만큼 아프게 해줘야 할 차례죠.


어쩌면 지금껏 '나'가 당하고 아팠던 것보다 더!







하지만 '나'가 받은 초능력에는 복수보다 더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능력을 주는 이유는 네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기 위해서다.

네가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면 능력도 자연히 소멸한다.


행복을 느끼면 초능력이 소멸한다는 것.


다시 말해 초능력을 계속 사용하려면 행복해져선 안 된다는 것.


즉, 초능력이 있는 한 '나'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






공자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복수를 하려면 두 개의 무덤을 파라."


복수를 당하는 쪽의 무덤 하나.


그리고 복수를 행하는 쪽의 무덤 하나.


복수는 양쪽 모두를 파멸시킬 테니, 따라서 두 개의 무덤을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나'는 초능력을 앞세워 자신에게 불행을 안겨준 이들에게 똑같이 불행을 안겨주려고 합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똑같이 상처를 주려고 하죠.






그러나 '나'에게 초능력이 계속 존재하는 한,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아빠를 없애버리고 일진 무리를 모두 쫓아버리면, 그것이 곧 행복일까요?


'나'에게 불행을 안겨준 세상을 뒤엎어버리거나 불태워버리면, '나'는 그 세상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행복을 느낀다고 한들,


초능력으로 거머쥔 행복은 초능력이 사라진 다음에도 고스란히 유지될까요?





<초능력이 생긴다면 아빠부터 없애볼까>는 독자에게 함부로 조언을 건네는 소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죠.






초능력으로 인해 벌어지는 온갖 소동을 따라가다보면, 독자는 '나'와 함께 자연스레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바로 꿋꿋함이죠.






세상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작정하고 덤벼든다면


오히려 꿋꿋하게 버텨내며 세상의 뜻대로 휘둘려주지 않는 것.


꿋꿋하게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며 나만의 행복을 하나씩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이자 최선의 반항이며


우리가 거머쥘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라는 것이


<초능력이 생긴다면 아빠부터 없애볼까>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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