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정세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출판사는 원고 없이 오직 작가의 상상력만 믿고 후속 소설집 계약까지 마쳤다. "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꾼이기에?

얼마나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줬기에?

고즈넉이엔티는 정세진 작가님의 '상상력'만 믿고 작품 계약까지 마치게 된 걸까요??




그래서 제가 직접 읽어보고 그 후기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제도, 내용도, 분위기도 각기 다른 일곱 편의 이야기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술 읽히더라고요!

마지막 이야기까지 읽었을 때는 “왜 다음편 없어요!” “더 써주세요 작가님!”이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정세진 작가님이 들려주는 일곱 이야기들의 매력을 소개해볼까요?




(직접 읽어보실 분들을 위해 스포일러는 최대한 자제했습니다.)








1.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 딱 1억 원짜리 비밀이면 됩니다. ”


납치된 아이.

부모와의 협상에 나선 인질범.

인질범의 요구는 지극히 단순했습니다.


1억만 주세요. 그럼 아이는 무사히 가정으로 돌려 보내드립니다.”


전형적인 인질범의 요구.

아이의 부모는 정원 딸린 저택에 기거할 만큼의 부자였으니, 1억 정도는 쉽사리 내줄 수 있는 돈이겠지요.

어쩌면 재력을 앞세워 감히 내 아이를 납치한 불한당들에게 지독한 복수를 감행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이 인질범, 1억에 이어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을 요구합니다.


다름 아닌 두 부부의 비밀.

자신을 신고하기는커녕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만큼 은밀한 비밀을요.


과연 이들 부부가 감추고 있는 비밀이란 무엇일까요?


* * * * *


1억 원짜리 비밀이라. 단순히 돈의 액수만 본다면 사업상의 비밀이라든지, 정말로 1억 원을 숨겨놓은 금고의 위치라든지, 그런 비밀 밖에 떠오르지 않는데요. 그러나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는 비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값어치는 1억이 아니라 몇 억을 줘도 모자르겠죠? 이를 이용하여 완전범죄를 계획하고 부부를 압박하는 인질범의 심리전이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간단한 아이디어로 이렇게 긴장감 넘치는 작품을 써내다니, 정세진 작가님은 '천재 이야기꾼'이 맞나 봐요.






2.

인터뷰



이유야 어쨌든 지금 내 앞에 마주 앉은 이 남자는 이제껏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여기, 혜성처럼 불현듯 나타나 별처럼 그 누구도 닿지 못할 경지에 이른 존재가 있습니다.


강인욱 대표.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하는 투자 시장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증권가의 '예언자'

오늘날 강 대표는 거대한 폭풍처럼 경이롭다 못해 경외적인 존재가 되었죠.


그런데 신처럼 군림하던 강 대표가, 어느 날 갑자기 인터뷰를 요청합니다.

그것도 경제지 전문기자가 아닌 연예부 1년차 풋내기 기자를 지명하면서.


왜 하필 그를 지목한 걸까요?

그런 의문이 제대로 해소되기도 전에, 강 대표는 더욱 더 믿지 못할 이야기를 꺼냅니다.


“난 과거를 볼 수 있어.”


* * * * *


아마 웹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강 대표의 비밀을 쉽게 예측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이야기는 강 대표의 비밀이 드러난 다음에 시작되죠. 만약 여러분이 늙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라면 어떨 것 같나요? 같은 인생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 살아가며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예측하는 경지에 이른다면요? 모두가 한 번쯤은 꿈꿔보는 삶. 그럼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상상해볼까요? 나를 제외한 모두가 늙어가는 삶. 어제와 똑같은 내일이 평생 반복되는 삶. 여러분은 이런 삶도 꿈꿔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3.

어쩌면 운이 좋아 우연처럼



나는 온종일 쏟아지는 행운을 거부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주인공은 행운의 여신으로부터 총애를 받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그 여신이 상당히 쪼잔하다는 점이죠.

때문에 주인공은 한 번의 행운과 한 번의 불행을 번갈아 겪는, 말 그대로 불운한 삶을 살게 됩니다.


행운이 찾아오는 횟수가 빈번해질수록 불운이 발생하는 일 또한 잦아지는 상황.

그래서인지 주인공은 매사에 신경질적이고 쌀쌀맞게 행동합니다.

일부러 행운을 쫓아냄으로써 불운 또한 다가오지 못하게 만드려는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에게 ‘행운’이 다가오고 맙니다.


매사에 심술궂고 퉁명스러운 주인공인데도, ‘행운처럼’ 화사하게 웃어주는 그녀.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요?


* * * * *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행 때문에 늘 불안해하는 주인공이 불쌍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까칠하게 대하는 주인공이 ‘웃프기도’ 하고, 그럼에도 행운처럼 찾아온 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주인공을 보며 흐뭇해지는, 간질간질한 사랑 이야기였어요. 마치 잔잔한 멜로 영화 같은 분위기가 앞의 두 작품과는 상반되면서도 이 작품만의 색깔을 인상적으로 드러내고 있네요. 곡예사처럼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정세진 작가님! 이런 소설 더 써주시면 안 될까요?






4.

도적



자고 일어나면 인생이 달라져 있기를 바란다.


차라리 성공조차 하지 못했더라면 가슴 한쪽이 이토록 쓰라리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한때는 잘나가는 로맨스 소설 작가였기에, 오늘날 ‘나’가 느끼는 패배감은 더욱 쓰라린 것이었죠.


조언이랍시고 늘 곁에서 말로 비수를 꽂는 친구.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스타작가가 되어버린 후배.

‘나’는 정말로 패배자가 되어버린 걸까요?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 라디오를 듣던 ‘나’는 김광석의 데뷔 38주년 콘서트 소식을 듣습니다.

어?

잠깐만요.

김광석의 데뷔 38주년이라고요?

김광석이 살아 있다니, 거긴 대체 몇 번 지구인 거죠?


이내 ‘나’는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잠들 때마다 ‘나’는 두 평행세계를 오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먼저...


나보다 잘나가서 재수 없는 후배놈부터, 어떻게 해볼까요?


* * * * *


평행세계란 설정은 언제 봐도 매력적인 소재입니다. 이쪽 세계에서는 평범한 회사원인 내가 평행세계에서는 조물주 위의 건물주로서 떵떵거리며 살아갈지도 모르고, 이쪽 세계에서는 매일같이 회사 사람들과 복작거리는 내가 평행세계에서는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서 외롭게 고독을 곱씹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렇다면 두 세계가 서로 연결되었을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래도 너는 잘 살고 있는구나, 하며 평행세계의 나를 보며 흐뭇해 해야 할까요? 아니면... 쟤나 나나 똑같은 '나'인데, 확 뺏어버려?






5.

산 자들의 땅



그저 고향에 남아 살아갈 뿐이었다.


도시는 오래전에 멸망했습니다.

정확히 어떤 원인으로 멸망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단지 ‘종말’이라고 낙서된 ‘원자력발전소’의 광고판을 보고 추측할 뿐이죠.


하지만 도시 따위야 멸망하든 말든, ‘산 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도시 안팎을 오가며 살아가고,

누군가는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지 못하는 몸으로 죽지 못해 살아가고,

누군가는 방사능보다도 더 무서운 돈 때문에 허덕이며 살아가죠.


그렇다면 이들의 삶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 이들은 왜 이토록 꾸역꾸역 삶을 살아가는 걸까요?


* * * * *


흑백영화처럼 고즈넉하게 펼쳐지는 멸망의 풍경. 이러한 종말론적인 분위기 아래 진행되는 한 가정의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어요. 동생이 아버지를 먹여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시를 드나드는 동안, 누나는 ‘코인’ 때문에 생긴 빚을 갚고자 ‘아트페어’에 아버지의 그림을 출품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는 이들 모두에게 각자의 사정과 삶이 있는 상황. 그 어떤 것도 판단할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바꿔나갈 수 없기에, 그저 끝을 향해 흘러가는 삶이야말로 진짜 종말이 아닐까요?






6.

나를 버릴지라도



“ 엄마가 저를 찾을 수 있게 전해주세요. 엄마, 아빠 꼭 만나게 해주세요. ”


어느 날, 소녀는 납치되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괴한들에게 납치된 소녀는 외딴 섬으로 팔려나가죠.

그곳에서 소녀는 노예처럼 혹사당하며, 이곳에서 평생 ‘아들 낳고 손주 낳고’ 살아갈 위험에 처합니다.

소녀에게 과연 구원의 손길은 찾아올까요?


한편, 전직 프로복서였던 사내는 수상쩍은 회사에 채용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로부터 하청을 받고 일한다는 정체불명의 회사.

사장은 두루뭉술한 말만 늘어놓더니, 대뜸 사내와 함께 외딴 섬으로 향합니다.

도대체 사내는 무슨 회사에 입사한 걸까요?


* * * * *


솔직히, 다소 읽기 괴로웠던 소설이었습니다. 납치당한 아이들이 겪는 절망과 폭력이 여과없이 묘사되고 있다 보니 그야말로 물 없이 고구마를 삼킨 듯 속이 턱턱 막히더라고요. 중반까지도 이러한 ‘고구마’가 해결되지 않으니 답답함에 책장을 넘기는 손길만 절로 빨라졌죠. 하지만 이 또한 정세진 작가님이 의도한 것이었을까요? 후반에서 묵직하게 치고 들어오는 ‘사이다’에 저도 모르게 키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네요. 어떤 사이다였냐고요? 아무래도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해야겠네요.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7.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지만 나의 시간은 멈췄다



나는 지금 심금을 울리는 애달픈 감정을 이곳 법정에 살포해야 한다.


‘나’는 여섯 살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육신은 여섯 살에 성장이 멈춰버렸죠.

때문에 ‘나’는 평생을 여섯 살로 살아가야 합니다.

정신은 열여덟 살 소년이라고 한들, 타인의 눈에는 여전히 여섯 살 꼬맹이에 불과했으니까요.


하지만 영악한 ‘나’는 이러한 신체적 특징을 제대로 활용해보고자 머리를 굴립니다.

변신 공룡 로봇을 갖고 노는 법을 배우고,

옷을 함부로 벗어 사방팔방에 던져놓는 법을 배우고,

똥 얘기만 들어도 자지러지게 웃는 법을 배우죠.

심지어 혀짧은 소리를 위해 치과에서 앞니 두 개를 뽑아버립니다.


‘나’의 목적은 단 하나.

바로 보육원을 벗어나 제대로 된 가족에게 입양되는 것!


과연 '나'의 입양 작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 * * * *


누군가를 속인다는 것은 비상한 머리뿐만 아니라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특히 거짓말의 크기가 커질수록, 또 그 내용이 황당할수록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이 작품의 주인공 또한 그렇습니다. 여섯 살처럼 말하기 위해 생이빨을 뽑는 과감함이라니! 그런 용기라면 비록 여섯 살에 갇혀버린 몸일지라도 뭔들 못하겠어요. 그런데 이야기가 결말로 도달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용기를 발휘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오고야 맙니다. 낯선 사람을 속이는 건 그럭저럭 쉬웠나요? 그럼 소중한 사람들을 속이는 것도 그만큼 쉬울까요?








정세진 작가의 기념비적인 데뷔작,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토끼든 비둘기든 마음대로 튀어나오는 마술사의 모자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리뷰를 쓰는 것조차 마냥 즐거웠으니까요.


이토록 대단한 소설을 혼자 읽어서는 안 되겠죠?

부디, 제 리뷰가 정세진 작가님의 매력을 이곳저곳으로 퍼트리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여러분 모두 즐거운 독서되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