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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
조해진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의 주인공 민은 서른다섯 해를 살아온, 속이 텅 비어버린 고치 같은 여자다. 생은 기차 같은 거라서, 각기 다른 생애들이 길게 이어져 전체 삶을 완성한다고 믿는 여자. 돈으로 치환되지 못하는 가구들 사이에서 무지개를 발견하는 여자. 모든 상황에서 자신이 무고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자. 그래서 어쩐지 자꾸 안쓰러워 눈길로 쓰다듬어주고만 싶은 여자.
중개업자 보조 일을 하는 민의 취미는 중개를 맡긴 사람들의 공간에 그 공간의 주인으로 드나드는 것이다. 생활 공간은 무심히 그 공간에 살고 있는 이의 삶의 단면을 내보이는데, 민은 그 단면 속으로 들어가 자신과 다른 타인의 생을 입어보길 즐긴다. 단 30분의 생이라도. 그리고 그 공간의 문을 나서며 하나의 죽음을 겪는다.
새롭게 시작된 길은 기차처럼 칸과 칸으로 이어져 있었다. 대학생, 헤어디자이너, 서점 직원, 요가 강사, 호프집 주인, 대형 마트 계산원, 휴대폰 판매원, 그리고 오늘 지나온 만화가의 생애가 기차 칸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칸에서 칸으로 이동할 때마다 작은 죽음이 지나갔고 민은 그 모든 죽음에 균일한 분량의 애도를 표했다.
p.206
민의 주변에는 최선을 다해도 도시 주변부로 밀려나고, 자리를 내줘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시의 그림자처럼, 어두운 구석으로 밀려나는 사람들. 존재 자체가 무가치해 사라져버리길 강요받는 사람들. 그럴 때마다 민은 “나도, 나 하나가 감당이 안 돼” 하며 외면해버리려고 하지만, 곧 속수무책의 마음으로 그 앞에 서성거린다.
누군가 세상을 떠날 때, 누군가는 세상에 빛을 본다. 순환되는 세상은 견고하다. 그러나 한 존재가 사라질 때마다 남은 사람은 그 빈자리를 쉬이 잊지 못한다. 작가 조해진은 그런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높은 곳에 올라가 어색한 목소리로 ‘투쟁’을 외쳐야 하는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이유 없이 타인 앞에서 쉽게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들을, 잘못도 없는데 고달프기만 한 생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을 묵묵히 지켜본다. 그리고 그 묵묵한 걸음을 기꺼이 나는 따라 걷고만 싶다.
민은 궁금했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되는 동안 결핍은 보완되고 상처는 치유되는 것, 혹은 삶이란 둥근 테두리 안에서 부드럽게 합쳐지고 공평하게 섞이는 것이므로 아픈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것, 그런 환상이 가능할까. 누군가 죽은 자리에서 누군가는 태어나는 방식으로 무심히 순환하며 평형을 유지하는 이 세상에서 꿈에서 본 죽은 노인을 기억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그러나 민에게 그렇게 일러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자명한 건 오직 하나, 미니 회전목마를 타기엔 민 역시 몸집이 너무 커져버렸다는 것뿐이었다. (p.186-187)
덧. 독서의 계절을 열기에 더없이 좋은 소설. 특히나 겨우겨우 버텨낸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