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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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이 내게는 이사카 고타로의 첫 책이다. 오래 전부터 이사카 고타로라는 작가에 대해 이런저런 자리에서 들어왔으면서도, 번역된 그의 작품이 한 두 권이 아니라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만약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최적의 이사카 입문서가 되리라. 마치 마술이라도 보고 있는 기분이다.”라는 추천사를 읽고는 이거다 싶어서 주문해버렸다. 물론 여기에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이라는 무시무시하면서도 우아해 보이는 제목도 한 몫 하긴 했다.

 

그나저나 목 부러뜨리는 남자라니! 세상에 이런 캐릭터를 어디서 구경이나 해봤나 싶다. <목 부러뜨리는 남자의 주변>에서 처음 등장하는 오야부라는 남자는 결코 좋은 사람이라고는 말 할 수 없지만, 곰곰 살펴보면 그의 행동은 누군가의 짐을 덜어주게 된다. 현금자동지급기 앞에서 쩔쩔 매는 아이엄마나 할머니의 부담을 덜어주고, 자기와 닮은 남자를 대신해 빚쟁이들을 처단해주기도 하며, 괴롭힘 당하는 소년으로 하여금 버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목 부러뜨리는 남자 오야부는 기묘한 방식으로 곤경에 빠진 이들이 삶에서 제 나름의 실마리를 발견하도록 돕는다. 오야부 같은 무시무시한 청부살인업자가 이 답답한 세상에서 어떤 이의 숨통을 틔워준다는 것이 내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나의 배>는 이 소설집에서 나를 특히 미소 짓게 해준 소설이다. 일흔을 바라보는 와카바야시 에미 할머니의 이야기다. 에미 할머니는 탐정 구로사와에게 50년 전 긴자에서 만났던 추억 속 남자를 조사해 달라고 의뢰한다. 비록 추억 속 남자와 나눈 기간은 며칠에 지나지 않았지만, 평생을 평범한 일상을 보내며 살아온 에미 할머니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던 것. 에미 할머니는 더불어 구로사와에게, 60년 전 일곱 살 때 유원지에서 미아가 되어 만났던 소년과의 첫사랑도 들려준다. 에미 할머니의 남편이 프러포즈할 때 했던, “나의 배에 함께 타 주지 않겠느냐”는 말. 그러니까 에미 할머니는 추억 속 그 남자의 배를 탔으면 자기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이따금 떠올렸던 것이다.

 

작가는 에미 할머니의 50년 전 풋풋했던 시절을 되돌려낸다. 어처구니없게도 폭력의 현장에서 얻어맞던 남자와 데이트를 하게 된 에미. 이 장면의 묘사는 사랑스럽고 환하다. 두 남녀가 수줍게 주고받는 대화의 현장에 들어가 직접 그 이야기를 훔쳐 듣고 싶을 정도다. 에미 할머니의 옛사랑의 흔적을 더듬어 찾아간 구로사와는, 솜씨 좋은 탐정답게 추억의 그 남자를 찾아낸다. 그 남자의 사진을 기대하는 에미 할머니 앞에서 구로사와는 카메라로 에미 할머니의 남편이 누워있는 침대를 찍는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보여주며 말한다. “당신이 찾던 남자.”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60년 전 에미 할머니의 첫사랑까지도 구로사와는 부가서비스라며 일러준다. 마찬가지로 그 소년도 에미 할머니의 남편이었던 것이다.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있을 수도 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게 인생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미 할머니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이 내게 말할 수 없는 울림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킥킥 거리며 읽었던 <미팅 이야기>가 있다. 고리타분한 미팅이란 소재를 도대체 작가는 어떻게 풀어냈을까 궁금했는데, 웬걸, 미팅을 소재로 이처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데 놀랐다. 서로 다른 동기를 지니고 참가한 3쌍의 남녀. 그 중에는 이전에 연인 사이였던 두 남녀도 있다. 미팅 참가자들이 서로의 심중을 비끼며 나누는 대화의 묘미는 흥미진진하다. 여기에 한 배우가 목뼈가 부러져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끼어들고, 이를 두고 참가자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한다.  

 

무엇보다 <미팅 이야기>의 근사한 엔딩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팅이 끝나고 참가자들이 모여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이다. 미팅 자리에서 여자들에게 좋은 평가도 받지 못하고, 심지어 목 부러뜨리는 남자로 의심까지 받았던 사토라는 남자. 이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남자가 갑자기 악기점에 들어가 견본용 전자피아노 앞에서 서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밤의 공기를 빙글빙글 휘젓는 멜로디, 사람을 울게 하고 위로해주는 멜로디다. “촌스러운 코트에 푸른 수염 자국, 눈썹이 덥수룩한” 남자도 이런 멜로디를 들려줄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목을 부러뜨려 살인을 막 끝낸 남자도 천재 피아니스트의 콘서트 포스터를 보며 동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반전의 캐릭터들이 나로 하여금 이사카 고타로의 다른 소설들을 찾아보고 싶게 만든다.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에서 내가 특히 눈여겨 본 것은 이사카 고타로 소설이 지니고 있는 어떤 균형 감각이다. 그 균형 감각은 <월요일에서 벗어나>에서 내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했던 빈집털이 탐정 구로사와의 말에서 잘 드러나 있는 것 같다. “난 사람 마음이나 선악은 잘 모르겠어. 다만 적어도 공정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야. 상대를 비판할 때도 상대 사정은 고려하고 싶어.” 이 말이야말로 이사카 고타로 소설 세계를 지탱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사카 고타로 소설에 따르면, 선악을 판단하는 일은 작가의 권리가 아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사적 복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누명 이야기>에서 그 아버지의 복수가 정당한지 여부에 작가가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것도 그래서일 테다. <누명 이야기>의 목 부러뜨리는 남자는 다만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짐을 대신 져줄 뿐이다. 이것은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사카 고타로의 안간힘이기도 할 것이다. 이 소설집 도처에 보이는 그의 균형 감각이 미덥고 고맙다. 그래서 이사카 고타로 소설 한 권을 이제 막 발견한 내 자신에게 이렇게 되뇌어 보는 것이다. “웰컴, 이사카 고타로 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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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아이 고 - 내 남편의 아내가 되어줄래요
콜린 오클리 지음, 이나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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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진단을 받은 여자가 있다. 나이는 스물일곱. 4년 전 걸렸던 암이 완치되어 안도하며 행복한 일상을 누리고 있었는데, 재발했단다. 이제 사랑하는 남편을 놔두고 세상을 떠나야만 한다.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여자는 결심한다. 남편 잭에게 새 아내를 구해주고 떠나자고. 아무리 남편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렇지, 이게 가능할까? 이런 의문이 치솟지 않을 수 없는 설정이다.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이 10여 개국에 판권이 팔렸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나는, 어찌 보면 통속적일 수 있는 ‘남편을 위한 새 아내 구해주기’라는 테마를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다뤘을지 너무도 궁금했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에서 내 마음을 기어코 움직이게끔 하는 무언가가를 보았다.

 

그 무언가란 우선 소설 화자 데이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력에 있다. 맨 마지막 장을 제외하고 시종일관 데이지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 데이지란 캐릭터는, 정말이지 사랑이 넘친다. 이를 테면 유방암으로 인해 가슴을 절제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데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어째서 허벅지나 쏙 들어가주면 고마운 배에는 암이 걸리지 않는 걸까? 그럼 기꺼이 포기했을 텐데” 이 비참한 상황에서 나라면 이런 혼잣말을 중얼거릴 수 있을까. 이처럼 명랑해지려 끊임 없이 애쓰는 화자 데이지에게 자꾸만 끌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남편 잭에게 새 아내를 구해주는 일은 어떻게 진행될까.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쉬울 리는 없을 테다. 아무려나, 그 쉽지 않은 일을 위해 데이지는 안간힘을 쓰지만 잭에게 적합한 아내가 쉬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데이지는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에 잭의 사진과 신상 정보를 올리기까지 한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겨우 적임자랄 만한 여자를 발견해낸 데이지. 그러나 막상 새 아내 후보자 패멀라를 보면서 치솟는 미묘한 심리를 데이지는 어찌할 수 없다. 데이지는 패멀라의 장점에 안도하면서도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결점이랄 만한 걸 찾으려 한다. 거기다가 잭과 패멀라가 이미 알고 있던 사이임을 알고 나자 데이지의 불안감은 극도에 달한다. 잭을 안고 있을 때에도 데이지의 머릿속에서 패멀라는 떠나지 않는다.

 

이처럼 마음이 약한 우리의 주인공 데이지는 잭에게 새 아내를 구해주고 떠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데이지는 이 일을 제대로 감당해내지 못한다.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절친 케일리에게 상처를 주기까지 한다. 케일리를 떠나보내며 데이지는 이렇게 고백한다. “제대로 죽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사실 새 배우자를 찾아주고 떠난다는 생각을 끄집어낸 것부터가 기적이다. 데이지는 잭을 끔찍이도 사랑해서 그런 발상을 떠올렸지만, 세상 누구보다 잭을 사랑하기에 이 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데이지가 심리치료 공부를 했다는 사실이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 소설에 무슨 대단한 신파가 들어있는 건 아닌데도, 잭을 향한 데이지의 애틋한 사랑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 가슴은 자꾸만 먹먹해진다.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는 특히 그랬다. 데이지는 세상을 떠나고, 마지막 장에선 남편 잭이 화자로 등장한다. 혼자 남게 된 잭은 데이지 없이 어떻게 버티며 살아갈 수 있을까. 데이지를 버티게 해주는 건, 잭을 잘 챙겨주는 꼼꼼한 새 아내가 아닌 한 마디 말이다. 바로 ‘어디에 있든지.’라는 말. “‘어디에 있든지.’ 그렇게 말하면 데이지가 쪽지 남기기를 잊고 직거래 장터나 요가 수업에 간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고 잭은 고백한다. ‘어디에 있든지.’ 이 말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주는 작가의 선물이 아닐까. 이 귀한 선물이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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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소풍
목혜원 지음 / 화양연화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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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끌렸던 것은 사실 출판사 이름 때문이었다. 바로 ‘화양연화’. 아마도 적지 않은 이들의 가슴 속에 ‘인생의 영화’로 남아있을 이 영화제목이 출판사 이름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소설은 화양연화 출판사의 첫 책이니까.


그렇게 만난 [야간 소풍]의 이야기는, 사실 새롭지 않았다. 한 남자가 결혼을 앞둔 연상의 여자와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설정이야 숱하게 접한 것이니까. 그렇다고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나 여자 주인공이 엄청한 매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 빠리에 살다가 서울로 와 공익근무를 이제 막 마친 스물둘 은우나, 미술관에서 근무하며 결혼을 앞두고 있는 스물아홉 미란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야간 소풍]에는 눈길을 쉬 거두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내 눈길을 멈추게 했던 것은 아마 문장이었을 것이다. “기침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고, 그것은 마치 그녀가 그에게 건네는 첫인사인 것만 같았다. 그날 밤 새벽, 야간 근무로 역무실 구석의 소파에서 새우잠을 청하던 은우의 마음도 밤새 콜록거리며 울렸다. 그제야 그는 이 도시가 처음으로 좋아졌다.” 첫눈에 반한다는 이야기는 널리고 널렸지만,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라면 믿어도 괜찮겠지 싶었다.


감성 가득하면서도 자못 농염함 문장들이 특히 마음에 오래 남는다. “끝없이 미끄러지며 맞닿는 둘의 입술과 혀 사이로 빗물이 흘러들어 청아한 맛을 냈다. / 쏟아지는 빗줄기 틈으로 비치는 햇살이 다양한 빛깔들로 공중에 은은히 번졌다. 두 사람은 함께 비와 햇빛에 젖었다.”와 같은 문장. 오래 마음에 두고 싶은 문장들로 가슴 떨리는 사랑의 순간이, 이 소설 도처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처럼 아름다운 문장들이 놓이는 장소들이 이 소설에는 있다. 남산과 장충단공원, 옛 신촌역사, 석촌호수, 홍릉수목원 등. 우리가 한 번쯤은 가봤을 법한 장소들이다. 가보지는 않았더라도 귀에 익은 장소들이다. 은우와 미란은 이 장소들을 거닌다. 처음엔 그런 장소들을 돌아다니면서 미란의 전 남친 현채와의 추억을 정리하자고 했던 두 사람은, 차츰 이 풍경들 속으로 서서히 녹아들며 사랑을 나누게 된다.


목혜원 작가는 자칫 막장으로 흐르기 쉬운 소재를, 비린내 나지 않게 유쾌한 기분으로 읽을 수 있도록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다만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은우가 미란의 직장 후배였던 보영과 빠리에서 만나 약혼했다는 점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작가는 좀더 드라마틱하게 은우를 서울로 돌아가게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대목을 읽은 다른 독자들의 감상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문장들과 묘사들로 가득 찬 한국 연애소설들을 찾지 못해 일본소설들을 찾아다녔던 나로선 [야간 소풍]은 무척 반가운 소설이었다. 목혜원 작가의 다음 연애소설이 기다려진다. 부디 연애소설로 일가를 이뤄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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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무지개 - 언어학 고종석 선집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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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에 꽂힌 고종석의 저서들을 눈으로 훑으며 헤아려 보니, 스무 권 남짓 된다. 마음이 가끔 헛헛해질 때면, 나는 고종석의 책을 펼쳐든다. 고종석의 글이 무슨 힐링의 위력을 지닌 것도 아닌데도, 문체의 단정함에서 얻는 마음의 안정이랄까,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정돈되는 느낌이다. 나는 고종석의 오랜 독자라는 사실을 어엿한 자랑으로 여긴다.


[언어의 무지개]는 고종석이 쓴 언어학 글 가운데 진수만 가려 실은 책이다. 아마도 이 책에서 언급되는 언어학 지식들을 아무런 부담 없이 쭉쭉 읽어 내려갈 만한 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언어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애초에 만만하지가 않다. 혹시 서점에 가시거든 한국어통사론 학술서 가운데 아무 책이나 골라잡아 훑어보시라. 한국어로 쓰여 있는 게 분명한데도 한 페이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나 자신 대학 때 멋모르고 한국어통사론 수업을 들었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다. 경제학 학부전공생들이 쩔쩔매는 수리경제학이나 계량경제학보다 한국어통사론이 내게는 곱절은 더 어려웠다.

 

그렇다면 왜 굳이 어려운 언어학에 관한 글들만 모아놓은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잠깐 언급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문체 때문이다. 그 자신 언어학자이기도 한 고종석은 이 책에 실린 글들에서 자신의 전문지식을 자유자재로 부리면서 문체의 맛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고종석의 문체는 언어학 지식에서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퍽퍽함을 눅여준다.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대하여’란 부제를 단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에서 언어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고종석의 반론을 읽을 때는 짜릿하기까지 하다. 예컨대 복거일의 영어공용어화론에 대한 최원식의 반론 가운데 다음과 같은 발언들이 있었다.


“서구주의와 국수주의는 단순한 대립물이 아니라 일종의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서구주의의 뒤집혀진 형태가 국수주의다”
“(복거일의) 서구주의는 민족주의의 매우 특이한 변종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고종석은 “예컨대 나는 최원식의 말투를 빌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와 장준하는 단순한 대립물이었던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김동리의 뒤집혀진 형태가 김정한이다, 백낙청은 김현의 매우 특이한 변종이다…, 에라, 어차피 만물은 유전하는 것인데 자유주의의 전화(轉化)가 파시즘이고, 파시즘의 전화가 민주주의고, 민주주의의 전화가 볼셰비즘이고, 볼셰비즘의 전화가 아나키즘이고, 그래서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다, 늬들 왜 싸우니 그놈이 그놈인데….”


이보다 더 통쾌한 반격을 나는 이제껏 어느 글에서도 만나보지를 못했다.(혹시 그런 글을 알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부디 알려주시라.) 같은 글 116~118페이지에 있는 “나는 양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오로지 욕하기 위해서만 <조선일보>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로 시작되는 주석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가 무려 124페이지에 이르는 장문의 글임에도 이 선집에 실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납득하게 될 것이다.


[언어의 무지개]를 탐독해야 하는 다른 이유는 이 책에 실린 글들이 세계시민주의자 고종석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 보인다는 데 있다. 고종석의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언어의 순수성에 집착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망한 일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특히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를 마무리하면서 “영어공용어화의 반대가 지닌 계급적 함의”를 지적한 부분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고종석의 말대로 영어공용어화 반대론자들은, 그 의도야 어쨌든, 지식과 정보에 대한 특정 집단의 독점을 승인한 셈이니까. 반대론자들은 영어공용어화 여부와 무관하게 사회 지배계층이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했다.

 

[언어의 무지개]를 통해 얻는 지적 자극에 관해서도 말해야 한다. 한글이 로마문자나 그리스문자에 견줘 미적으로 아쉬운 이유를 한글의 모아쓰기 관습에서 찾는 대목이라든가, 저 유명한 사피어-워프 가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대목, ‘한글소설’이란 용어가 왜 적절하지 않음을 밝히며 이를 ‘한국어소설’이라고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이 그렇다. 나아가 고종석이 [어린 왕자]의 한국어 번역이 프랑스어문학에 속하는지, 한국어문학에 속하는지를 물을 때, 나는 그의 답변을 열심히 밑줄을 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예전에 이미 읽은 내용인데도 그렇게 된다.


나는 이 책 구석구석에는 한국어에 대한 고종석의 애정을 읽는다. 심지어 한국어에 대해 고종석이 가끔 이런저런 투정을 늘어놓는 대목도 내게는 그렇게 읽힌다. 그렇기에 나는 “표준어주의는 국민국가 내부의 제국주의” 같은 표현이나 조금은 과해 보일 법도 한 고종석의 논지에까지도 마음을 주게 된다. 그러나 한국어에 대한 고종석의 곡진한 조언들이 학계나 한국어 교육 현장에 계신 분들에게 별다른 인상을 준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짧게는 8년에서, 길게는 16년 이상의 세월을 통과했는데도 그분들은 꿈쩍도 않는 것 같으니 말이다. 잘난 국어학자들이나 국어교육자들에게 이 책을 강매할 수도 없고, 애석한 노릇이다. 고종석의 “초라하고 어설픈 자식”이라도 되고 싶은 나는, 그저, 서툰 서평이나마 보탤밖에 다른 길을 찾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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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돈키호테 - 전2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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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을 읽으며 기대하는 거의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유일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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