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지개 - 언어학 고종석 선집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책장에 꽂힌 고종석의 저서들을 눈으로 훑으며 헤아려 보니, 스무 권 남짓 된다. 마음이 가끔 헛헛해질 때면, 나는 고종석의 책을 펼쳐든다. 고종석의 글이 무슨 힐링의 위력을 지닌 것도 아닌데도, 문체의 단정함에서 얻는 마음의 안정이랄까,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정돈되는 느낌이다. 나는 고종석의 오랜 독자라는 사실을 어엿한 자랑으로 여긴다.


[언어의 무지개]는 고종석이 쓴 언어학 글 가운데 진수만 가려 실은 책이다. 아마도 이 책에서 언급되는 언어학 지식들을 아무런 부담 없이 쭉쭉 읽어 내려갈 만한 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언어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애초에 만만하지가 않다. 혹시 서점에 가시거든 한국어통사론 학술서 가운데 아무 책이나 골라잡아 훑어보시라. 한국어로 쓰여 있는 게 분명한데도 한 페이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나 자신 대학 때 멋모르고 한국어통사론 수업을 들었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다. 경제학 학부전공생들이 쩔쩔매는 수리경제학이나 계량경제학보다 한국어통사론이 내게는 곱절은 더 어려웠다.

 

그렇다면 왜 굳이 어려운 언어학에 관한 글들만 모아놓은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잠깐 언급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문체 때문이다. 그 자신 언어학자이기도 한 고종석은 이 책에 실린 글들에서 자신의 전문지식을 자유자재로 부리면서 문체의 맛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고종석의 문체는 언어학 지식에서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퍽퍽함을 눅여준다.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대하여’란 부제를 단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에서 언어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고종석의 반론을 읽을 때는 짜릿하기까지 하다. 예컨대 복거일의 영어공용어화론에 대한 최원식의 반론 가운데 다음과 같은 발언들이 있었다.


“서구주의와 국수주의는 단순한 대립물이 아니라 일종의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서구주의의 뒤집혀진 형태가 국수주의다”
“(복거일의) 서구주의는 민족주의의 매우 특이한 변종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고종석은 “예컨대 나는 최원식의 말투를 빌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와 장준하는 단순한 대립물이었던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김동리의 뒤집혀진 형태가 김정한이다, 백낙청은 김현의 매우 특이한 변종이다…, 에라, 어차피 만물은 유전하는 것인데 자유주의의 전화(轉化)가 파시즘이고, 파시즘의 전화가 민주주의고, 민주주의의 전화가 볼셰비즘이고, 볼셰비즘의 전화가 아나키즘이고, 그래서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다, 늬들 왜 싸우니 그놈이 그놈인데….”


이보다 더 통쾌한 반격을 나는 이제껏 어느 글에서도 만나보지를 못했다.(혹시 그런 글을 알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부디 알려주시라.) 같은 글 116~118페이지에 있는 “나는 양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오로지 욕하기 위해서만 <조선일보>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로 시작되는 주석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가 무려 124페이지에 이르는 장문의 글임에도 이 선집에 실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납득하게 될 것이다.


[언어의 무지개]를 탐독해야 하는 다른 이유는 이 책에 실린 글들이 세계시민주의자 고종석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 보인다는 데 있다. 고종석의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언어의 순수성에 집착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망한 일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특히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를 마무리하면서 “영어공용어화의 반대가 지닌 계급적 함의”를 지적한 부분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고종석의 말대로 영어공용어화 반대론자들은, 그 의도야 어쨌든, 지식과 정보에 대한 특정 집단의 독점을 승인한 셈이니까. 반대론자들은 영어공용어화 여부와 무관하게 사회 지배계층이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했다.

 

[언어의 무지개]를 통해 얻는 지적 자극에 관해서도 말해야 한다. 한글이 로마문자나 그리스문자에 견줘 미적으로 아쉬운 이유를 한글의 모아쓰기 관습에서 찾는 대목이라든가, 저 유명한 사피어-워프 가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대목, ‘한글소설’이란 용어가 왜 적절하지 않음을 밝히며 이를 ‘한국어소설’이라고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이 그렇다. 나아가 고종석이 [어린 왕자]의 한국어 번역이 프랑스어문학에 속하는지, 한국어문학에 속하는지를 물을 때, 나는 그의 답변을 열심히 밑줄을 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예전에 이미 읽은 내용인데도 그렇게 된다.


나는 이 책 구석구석에는 한국어에 대한 고종석의 애정을 읽는다. 심지어 한국어에 대해 고종석이 가끔 이런저런 투정을 늘어놓는 대목도 내게는 그렇게 읽힌다. 그렇기에 나는 “표준어주의는 국민국가 내부의 제국주의” 같은 표현이나 조금은 과해 보일 법도 한 고종석의 논지에까지도 마음을 주게 된다. 그러나 한국어에 대한 고종석의 곡진한 조언들이 학계나 한국어 교육 현장에 계신 분들에게 별다른 인상을 준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짧게는 8년에서, 길게는 16년 이상의 세월을 통과했는데도 그분들은 꿈쩍도 않는 것 같으니 말이다. 잘난 국어학자들이나 국어교육자들에게 이 책을 강매할 수도 없고, 애석한 노릇이다. 고종석의 “초라하고 어설픈 자식”이라도 되고 싶은 나는, 그저, 서툰 서평이나마 보탤밖에 다른 길을 찾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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