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100쇄 기념 특별개정판)
공지영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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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법]이 시행된지도 어느덧 만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와 영화 [도가니]를 통해 실제 존재했던 광주 '인화학교'의 장애인 성폭행에 대한 사회적 고발은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켜 장애인 여성을 성폭행을 하거나 13세 미만 아동에 대한 성폭행을 했을 경우 7년, 10년형의 징역형을 사는 일명 [도가니법]이 그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인화학교'의 복지재단 '우석재단'은 권력이라는 무기로 그 지역사회에 기득권 세력과 맞물려 온갖 악행을 저지른 또다른 세력집단의 국가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했기에 '무소불위'의 힘으로 법마저도 짓누려려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법위에 존재하는 또다른 신격화된 집단마냥.
우리는 그런 집단을 '왕국'이라 불렀고 그 왕국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따로 분리된채 거짓을 은폐하며 자기들만의 힘을 구축하고 그 왕국속에 갇혀있는 힘없는 약자들을 이용하고 군림해왔던 시절이 있었다.
때론 종교라는 미명아래 사이비 집단으로, 때론 복지재단이라는 허울좋은 미명아래 착취와 폭행, 살인을 저지르며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던 그들.
그 왕국들이 어느 순간 희뿌연 안개들이 걷히며 언론을 통해, 방송을 통해 진실이 들어날때도 그들은 '할렐루야'를 외치고, '주님'을 외치며 그들이 떠받들었던 주인을 언론이, 방송이 모함한다며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부정하지 않았던가!
작품속 진실을 감추고 거짓으로 다가오는 음습하고 희뿌연 '안개'는 '자비'와 '사랑'이라는 위장을 한채 그렇게 무진시의 상징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하나의 왕국, 안개가 짙게 드리워진 무진시의 왕국 '자애학원'은 몇 수십년을 복지재단이라는 이름으로,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학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져 사람들의 귀와 눈을 멀게 했다.
그 이면에 드리워진 악마와도 같은 갖은 악행은 가난이라는 굴레와 신체적 약점을 가진 장애아들을 무참히 짓밟고 그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하나의 '악의 집단'이라 할수 있다.
듣지 못하고 말할수 조차 없는 장애아들, 과자를 파삭거리며 먹는 어린 "유리", 그 "유리"에게 과자값 1,000원을 주며 성폭행을 수없이 자행한 "박보현"이라는 악마와 같은 생활 지도교사.
청각장애아면서 지적 장애까지 갖고 있던 그 어린 "유리"를 교장이라는 "이강석"과, 그의 쌍둥이 동생인 행정실장 "이강복", 그리고 생활지도교사인 박보현이라는 자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행한 성폭행은 분노를 넘어 눈물이 나게 한다.
교장실에서 청각장애아인 열 다섯살의 "연두"에게 컴퓨터 화면속의 남자,여자의 벗은 몸을 보여주고 그것을 본 "연두"가 수치심을 느껴 화장실로 도망간 것을 이용해 화장실 문을 잠그고  강제로 성폭행하는 교장이라는 "이강석"을 보며 과연 인간의 악행은 어디까지일까? 하늘에 묻고싶은 심정이다.
교장이라는 미명아래 화장실에서, 교장실에서 무참히 성폭행을 일삼으며 만일 여기서 본 걸 말하면 가만두지 않을거라고 위협하는 짐승과도 같은 그의 '악마적 수화'는 어쩌면 "유리"와 "연두"에겐 그 어떤 세상의 무서움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무서운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을 눈감아 주는 유착관계로 발전된 그들의 세계를 보며 우리는 과연 '정의란 무엇인지', '과연 정의는 살아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그런 악행을 신고하지만 묵인해버리는 "장경사"같은 경찰들, 오래전부터 있어온 '자애학원'과 경찰의 유착관계를 암시하게 만든다.
경찰뿐만이 아닌 학교 관할 감찰기관인 장학재단 "최수희" 장학관마저도 교장 "이강석"과 '무진 영광제일교회'의 같은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유착관계는 같은 세계에 공존하는 '동업자'같은 관계이기도 하다.
심지어 죄를 지으면 징벌을 받아야 할 곳, 만인에게 평등하게 판결해야 하는 '법'이라는 곳에서 조차 법조계 인사들과의 유착관계로 그들은 쉽게 풀려나고 아무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살아가니 말이다.
그런 그들앞에 기간제 교사인 "강인호"와 무진인권센터에서 일하는 "서유진". 그들이 있었기에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것이 아닌가 느끼게 한다.
작은 저항이 큰 저항이 되어 거짓된 세계의 세상을 온 천하에 알림으로써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 가듯이 그들은 작은 힘이지만 '정의를 위해', '진실을 위해',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시작했는지 모른다.

 

 

장애아들을 위해 투쟁했던 "강인호"가 끝까지 같이할수 없었던 마지막 장면은 못내 아쉽기도 하지만 어쩌면 현실속 우리 모두가 "강인호"처럼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이기에 이해할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투쟁가'였지만 아내의 간절한 부탁, 그의 딸 "새미"를 통해 그가 갈등속에 쓴 편지가 얼마나 고뇌하고 번민했는지 느끼게 한다.
그도 보통의 삶을 사는 소시민일진대 평범한 삶을 택하고 싶었으리라.
그가 끝까지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편지속 내용 "이웃을 위해, 더불어 함께하기 위해 싸울때 내가 스스로를 가장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안거야"라는 말처럼 그의 사고(思考)는 깨어있었기에 우리를 위안해준다.
그러한 사고(思考)를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유리,연두)은 "강인호"를 사랑하고 의지하지 않았던가. "유리"가 "연두"에게 말한 "강인호 선생님이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어"라는 그 한마디가 담고있는 의미가 "그러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어" 라는 의미로 들리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내가 과연 "강인호"였다면 어떤 판단을 했을까?
나에게도 "강인호"처럼 아내가 있고 딸이 있고 아들까지 있기에 그처럼 판단하지 않았을까 싶다. 현실속 삶의 무게가 억누를때 그 무게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수 밖에 없는게 인간이니까.
나만 바라보고 사는 '가족'이라는 또하나의 집단은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기에 어쩔수 없나보다.
실천적으로 끝까지 싸우고 있는 "서유진"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단지 인권을 위해서, 장애아들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그녀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가지고 있는 깨어있는 사고(思考),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인지 그 나침반과 같은 인생 좌표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서유진이 그의 딸 "하늘'이가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을때 급히 "장경사"의 차를 얻어 타고 가다 "장경사"가 그녀에게 말했던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가는게 편한데 왜? 세상을 바꾸려 혼자 애쓰는지, 왜? 그렇게 어렵게 살아가려 하느냐는 그의 물음에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이 한마디가 이 책에서 말하는 우리 모두에게 전달하고픈 얘기가 아닐까 싶다.
아마도 작가의 마음도 그녀를 대변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수 의견 못지않게 소수의 의견도 중요한 것이니까. 기득권층이 아닌 사람들도 저마다 그들만의 삶을 갖고 살아가는 인생이 있다고 말이죠.

 

 

지금 현재도 또하나의 논쟁이 되어 장애인학교를 짓느냐 마느냐로 지역주민들과 갈등을 빚고있는 '강서구 가양동'의 문제 또한 현재진형형의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한때는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을 비판하다가도 실질적으로 자기앞에 닥치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의 사고관(思考觀)이 뿌리깊이 자리하고 있어 편견에 대한 사고를 우리 자신 하나하나가 바꾸지 않는 한 이러한 문제는 항상 도사리고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명목상으로는 집값이 떨어진다고 반대하고 있지만 뉴스의 [팩트체크]를 통해서도 나와있지만 실질적 부동산 가격의 하락은 없었다.
실제 다른 지역의 장애인학교 부근 집값을  조사해봤지만 장애인 학교를 짓기 전(前)과 후(後)의 가격이 차이가 없음을 데이터를 통해서 분석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예전 1980~90년대 우리는 지레짐작 보통 사람이 아닌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경계를 가지고 선을 그어왔던게 사실이다.
예전 '월남전'에 참전해 손을 잃거나 발을 잃었던 일명 '상이용사'들을 보며 한손이 없는곳에 갈고리 모양의 쇠손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잘못 왜곡되어 그들을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왜곡된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의 상징인 '쇠손'. 어렸을적 갈고리 모양의 쇠손만 보면 어린아이들이나 부녀자 할것없이 그들을 피해가고 도망쳤던 옛 기억은 어쩌면 군사 정권하에서 국가를 위해 남의 나라에 가 총뿌리를 겨누며 싸웠던 우리의 형제들이 아닌가!
'베트남전 용사들'이라고 그렇게 외쳐놓고 그런 형제들을 팔이 하나 없다고 해서 갈고리 모양의 쇠손이라 해서 피해다니게 만든 우리 사회의 모순된 이면(裏面)은 그들을 온전히 살게 하지못한 국가의 잘못된 정책도 있지만 우리모두가 가지고 있는 사고에 기인한 것은 아닌지 생각케 한다.
뿌리깊이 고정관념이 되버린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않는 한 시대가 바뀐다 한들 변하겠는가!

 

 

어쩌면 신체적으로 비장애인인 보통의 신체를 가진 사람들중 가치관이 정립이 안된 자들이 악행을 저지르거나 반사회적, 반인륜적 행동을 함으로써 일으키는 사건,사고들이 정작 장애자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진실과 거짓사이에서 거짓을 택하고 빛보다는 어둠을 택하는 그들이야말로 이땅의 장애자들이 아닐까!
우리는 정의를 부르짖는다. 하지만 그 정의를 부르짖기전 우리가 말하는 정의가 과연 올바르게 정립되도록 했느냐 하는 것이다.
실천적 정의없이 말로만 부르짖는 정의는 한낱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지나지 않는다.
이타주의(利他主義)가 따르는 정의를 실천하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나를 희생할수있는 사고(思考)라도 갖고 있어야 함을 우리는 직시해야 할것이다.
꼭 남이 아니더라도 나한테 만큼은 진실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 자신까지도 속이는 위선자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사고(思考)를 가지고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때 장애인에 대한 편견 또한 바뀌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래야만 '광란의 도가니'같은 세상이 다시는 없을것이라 생각한다.

 

 

인권의 사각지대인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은 그들을 우리가 외면하지말고 우리가 함께 그들을 보듬아주고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그것은 한닢의 동정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에게 작은 관심이라도 보이는 것이다.
작품속 "서유진"이 "강인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처럼 "홀더" 즉 "홀로 더불어" '홀로 서고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되도록 우리는 그들 장애인들에게 설수 있도록 다함께 손을 맞잡는 사회를 만드는 것,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숨쉬며 살아가고, 그들과 함께하는 공존의 삶이 되도록 만드는 사회를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강한 메세지 때문일까요? 읽고 난뒤의 여운이 가시지를 않아 뇌리에 남아서 아직도 내가 '무진시'에 남아있는듯 합니다.
작가가 이 작품의 초교,재교를 보고나서 신열로 몸살을 앓았다고 한 말이 괜시리 나온 말이 아닌듯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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