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의 회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2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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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무더워지고 땀이 줄줄 흐르는 더위가 찾아오면 덩달아 고개를 내미는 장르가 있습니다바로 공포여름이면 공포 영화가 개봉하기 마련이고무서운 이야기는 더위를 잊게 하고는 하죠개인적으로는 공포 장르를 즐기는 편이 아닙니다사실 거의 쳐다보는 경우도 드물죠특히나 그게 피가 난무하거나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하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넘깁니다그런데 오늘 소개할 책은 정작 귀신 이야기네요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실 수도 있겠지만이 책은 조금 다릅니다공포라고는 하지만 피가 나오지도 않고귀신이 달려들거나 놀라게 하지도 않아요이 책에 등장하는 귀신은 그저 예상치 못한 장소에 서 있는 정도입니다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의 움직이지도 않아요다만 특이한 점은 이 귀신이 어린아이 근처를 맴돈다는 것입니다아이와 귀신오늘의 책은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 The Turn of the Screw입니다.

 

 

  • 아이와 귀신 이야기

 

만일 어린아이 하나가 나사를 한 번 더 죄는 효과를 낸다면어린아이가 둘일 경우 어떻게 되겠어요?”

 

  크리스마스 전날 밤난롯가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무서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합니다그리고 갑작스레 툭 던진 더글라스의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관심을 표합니다더글라스는 그의 지인이었던 가정교사가 겪었던 일이라고 말하며 가정교사가 썼던 글을 소개하기로 합니다그렇게 독자 역시 난롯불 옆에 앉아 기묘하고도 무서운 이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지요.

 

 

  • 전신 거울과 가난한 시골 목사 막내딸

 

  먼저 이 으스스한 이야기의 화자인 가정교사에 대해 살펴보죠.

 

어느 가난한 시골 목사의 막내딸이었던 더글러스의 옛 친구가 스무 살 나이에 처음으로 가정교사라는 직무에 응하기 위해 불안한 마음으로 런던에 올라왔다는 것이다.

 

  가정교사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젊은 여성입니다게다가 가난한 시골 목사의 막내딸이죠그런 그녀가 런던에 올라와 만난 자신의 고용주는 젊고 잘생기고 아주 부자인 신사입니다세상 물정 모르는 그녀가 이 잘생기고 부유한 신사에게 빠지는 것은 당연한 순서일지 모르겠습니다그런 그녀에게 신사가 부탁한 일은 블라이에 있는 저택에 내려가 자신의 조카 둘의 가정교사가 되어주는 것이지요게다가 이 스무 살 여성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합니다.

 

  높은 보수에 호감 가는 고용주하지만 어쩐지 이제 막 시골에서 올라온 스무 살 젊은 여성이 맡기엔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죠.

 

그 여자에게 앞날은 다소 음울하게 느껴졌어요젊고 경험도 없는 데다 신경질적이었거든요책임이 막중하고 말을 나눌 사람도 적고실로 엄청나게 외로울 거라는 상상이 들었죠.

 

  가정교사는 마치 귀부인이 된 것처럼 마중 나온 거대한 유람용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들어갑니다다시 한번 상기해볼까요가정교사는 젊고 경험이 없었습니다그녀는 시골에서 막 올라왔고가난한 목사의 막내딸이었죠그런 그녀가 블라이의 저택에서 마주한 모든 것은 생경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죠.

 

  일단 저택부터 내가 살았던 초라한 집과는 다른 웅장함이 있었고가정교사는 저택에서 가장 좋은 방을 사용하게 됩니다그리고 거기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던 긴 거울도 있었죠이렇다 보니 다수의 하인과 아이들을 맡게 된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다소 혼란스러웠을 거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커다란 표류선에 갇힌 몇몇 승객들이라는 상상을 했다그렇다면 이상스럽게도 나는 그 배에서 총지휘를 맡은 키잡이가 된 셈이 아닌가!

 

  그녀는 갑작스럽게 자신이 누리게 된 위치에 막중한 책임을 느낍니다하지만 동시에 내심 기뻐하기도 하죠그리고 그 기쁨의 많은 부분은 호감을 느꼈던 자신의 고용주에게 있기도 하였습니다.

 

요컨대 나는 자신을 비범한 젊은 여자로 상상하였고이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리라는 믿음에 위안을 얻는다고 말하련다.

 

  천사같이 어여쁜 어린 소녀 플로라와 자신을 믿고 돕는 그로스 부인까지버겁기는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플로라의 오빠인 역시나 천사 같은 소년 마일스가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편지를 받고도 가정교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죠아이들은 천사 같았고저택은 평화로워 보였으니까요그녀가 귀신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죠.

 

 

  • 귀신을 보는 가정교사

 

  이 이야기에서 가정교사는 귀신과 총 8번 마주칩니다처음 마주친 귀신은 전에 이 저택에 있었던 남자 퀸트였고후에 마주치는 귀신은 자신의 전임교사 제셀 양이었죠가정교사는 이 둘을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하지만 그녀의 묘사는 꽤 구체적입니다.

 

남자 귀신에 대한 묘사

 

붉디붉은 머리카락에다 오밀조밀한 곱슬머리의 창백한 얼굴이었어요길고 꼿꼿한 몸은 보기에도 좋은 형상이었죠그리고 다소 괴이한 자그마한 구레나룻은 머리카락만큼 붉었지만눈썹은 다소 검은 편이었고특히나 활 모양으로 굽어 있어 마음대로 움직이는 듯이 보였죠눈매는 날카롭고 이상했어요끔찍하긴 했지만난 그 눈이 다소 작고 매우 고정되어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아요입은 넓고 입술은 가늘었어요게다가 자그마한 구레나룻만 제외하고는 꽤나 말끔히 면도를 했던데요그 사람은 마치 배우 같은 느낌을 주더군요.”

 

여자 귀신에 대한 묘사

 

  “상복을 입고 있었어요다소 빈약하고 초라하던데하지만 정말이지 굉장한 미모를 가졌더군요.” 나는 내 비밀을 들어준 사람을 마침내 어느 지경까지 몰고 갔는지 이제야 깨달았다부인이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보기 좋은 용모였어요정말이고말고요.” 나는 주장했다. “굉장한 용모였죠하지만 품위는 없었어요.”

  그로스 부인은 천천히 내게 돌아왔다. “제셀 양은 품위가 없었어요.”

 

  가정교사는 자신이 본 귀신의 모습을 그로스 부인에게 확인하였습니다그로스 부인은 퀸트와 제셀 양 둘 다 본 적 있기 때문이었죠무서운 것은 단순히 귀신이 나타났기 때문이 아닙니다퀸트가 마일스를제셀 양이 플로라를 노리고 있으므로 무서운 것이죠.

 

  “어린 마일스를 찾고 있었어요.” 불길하리만큼 선명한 생각이 이제야 나를 사로잡았다. “그게 그 사람이 찾고 있던 거였어요.”

  “하지만 어떻게 아세요?”

  “알고말고요여부가 없는데요!” 나의 흥분이 고조되었다.

 

  “그럼요하지만 플로라가 알고 있던 사람이에요당신도 알던 사람이죠.” 그런 다음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려고 입을 열었다. “내 전임자였던 죽은 가정교사였어요.”

  “제셀 양 말이에요?”

  “그럼요당신은 내 말을 믿지 않겠죠?” 나는 다그쳤다.

  부인은 당황하여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요?”

  신경이 곤두선 나는 순간적으로 이 말에 안절부절못했다. ‘그렇다면 플로라에게 물어봐요그 애는 확실할 테니까!’ 그러나 이렇게 말하려다 나는 금방 자신을 억제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귀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아이들과 가정교사의 눈치 싸움이 첨예해집니다하지만 금기에 가까운 주제를 직접 건드리지 못하고 서로 주변을 빙빙 돌기만 합니다아이들은 여전히 가정교사의 앞에서는 천사처럼 아무 문제 없는 듯 행동하고가정교사는 계속 귀신을 봅니다이 괴리에서 긴장감은 극대화되죠.

 

 

  • 귀신을 보는 가정교사'?'

 

  하지만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귀신에게만 있지 않습니다귀신이 분명히 존재하고 가정교사는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정작 귀신을 보는 것은 가정교사 혼자만이라는 점입니다일인칭으로 서술되는 이야기에서 귀신을 보는 일은 모두 가정교사의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죠마일스나 플로라가 귀신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하지만 실상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오로지 가정교사의 느낌이죠게다가 가정교사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로스 부인 역시 귀신을 보지 못합니다심지어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귀신을 가리켜도 그로스 부인은 이렇게 대답할 뿐입니다정말 황당하군요선생님도대체 어디에서 뭘 보고 있는데요?” 혼자만 귀신을 본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바로 이 순간에 독자는 가정교사의 시선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게 되고지나왔던 모든 것이 소름 끼치는 의혹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구심으로 가정교사를 바라보면 가정교사의 생각에 석연찮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다시 한번 가정교사의 말을 살펴볼까요.

 

  “어린 마일스를 찾고 있었어요.” 불길하리만큼 선명한 생각이 이제야 나를 사로잡았다. “그게 그 사람이 찾고 있던 거였어요.”

  “하지만 어떻게 아세요?”

  “알고말고요여부가 없는데요!” 나의 흥분이 고조되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그게 더 무서운 거죠혼자서만 알고 있거든요여덟 살밖에 안 된 아이가 말이에요!” 나는 기가 막혀 말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로스 부인도 입만 더욱 크게 벌릴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알았죠?”

  “난 거기 있었어요내 눈으로 보았으니까요플로라가 완벽히 알고 있다는걸요.”

 

  그로스 부인이 묻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알았죠?’ 가정교사는 대답합니다. ‘알고말고요.’ 아주 짧은 귀신과의 마주침에서 가정교사는 모종의 확신을 갖습니다아이들이 귀신과 소통하고 있다고 말이죠심지어 저택에서 도망치려다 귀신과 마주친 일화를 나중에 그로스 부인에게 이야기할 때에는 마치 자신이 귀신과 대화하려고 했다는 듯이 말합니다게다가 귀신이 자신에게 고통을 호소했다고까지 말하죠가정교사의 의심은 귀신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그로스 부인도 의심하죠.

 

부인은 내가 외로운 처지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주인이 눈여겨보지 않은 나의 매력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이 기막힌 계략을 꾸몄다고 생각하며나를 조롱하고 흥겨워하며 경멸했다.

 

  가정교사의 표현을 다시 요모조모 뜯어보면 이상한 부분도 많습니다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이 기회라고 말하기도 하고귀신을 보았을 때 증거를 포착했다는 짜릿한 기쁨을 느꼈다고도 말합니다특히 결말 부분에서는 아이에게 집착하는 모습도 볼 수 있죠.

 

 

  • 믿어도 안 믿어도 무서운 이야기

 

  어떤가요이 모든 귀신 소동이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렸던 가정교사의 망상에 불과한 것이었을까요하지만 가정교사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퀸트와 제셀 양의 모습을 그로스 부인에게 꽤 상세히 묘사한 부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가정교사는 정말 귀신을 본 것이었을까요그런데 어째서 그로스 부인은 보지 못했던 것일까요의문은 끊이지 않습니다.

 

  심리소설공포소설고딕(Gothic)소설이라고 불리는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이 소설은 화자의 시선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드는 소설입니다우리는 흔히 화자의 이야기는 진실로 믿기 마련입니다마땅한 근거가 없음에도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으레 화자가 하는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죠그러니 나사의 회전의 믿음직하지 않은 화자(unreliable narrator)의 존재는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피가 나오거나 잔인하지도 않은 이 이야기에 소름이 끼치는 이유죠.

 

  무더운 여름어느 시선이든 좋으니 이 가정교사의 이야기를 읽어보심은 어떨까요가정교사의 시선을 진실로 믿거나 말거나 두 경우 모두 더위를 잠시 잊게 할 소름 끼치는 이야기일 테니까요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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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 마카롱 에디션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곽명단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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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으리으리하고 웅장한 궁전치렁치렁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흔히 공주라고 하면 좋은 환경에서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를 것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죠오늘은 조금 특별한 작은 공주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하지만 이 작은 공주는 앞선 공주와는 참 달라요오늘 소개할 책은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소공녀 A Little Princess입니다.

 

  익숙한 제목이지요저 역시도 많이 들어본 책입니다물론 이전에 읽어본 적은 없지만요언제나 그렇듯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정작 읽어본 적 없는 책들을 좋아하는 터라 소공녀를 집게 되었습니다.

 


  • 부자 아빠와 작은 공주

 

  줄거리는 간단합니다어린이 소설로 분류되는 책이기도 하고 고전이다 보니 복잡하지 않은 줄거리를 갖고 있지요지금의 독자들이 읽는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젊고 잘생기고 아주 돈이 많은 한 남성이 있습니다그리고 슬하에는 어린 딸을 하나 두고 있죠인도에서 부유하게 지내던 부녀였습니다딸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 크루 대위는 딸을 영국 기숙학교에 보내기로 하죠바로 민친 어린 숙녀 학교입니다학교는 민친 교장과 그녀의 자매 아멜리아가 운영하고 있습니다지금으로 말하자면 민친 교장은 아주 현실적인 인물이지요자신에게 득이 되는 바를 정확히 따지고인정머리라고는 없는 인물입니다그런 민친 교장에게 크루 대위의 어린 딸 사라는 아주 소중한 학생이지요사라의 아버지가 아주 부자이니까요그래서 사라는 본인이 의사와는 상관없이 특별한 대우를 받습니다하지만 사라는 그런 취급을 과시하거나 뽐내는 아이가 아닙니다아이답지 않을 정도로 아주 생각이 깊은 아이니까요.

 

  “사람들에게는 어쩌다 우연히 생기는 일이 많아내게는 좋은 우연이 많이 따랐어어쩌다 보니 늘 공부하고 책 읽는 게 좋았고배우고 읽은 걸 잘 기억하게 되었지또 어쩌다 보니 잘 생기고 다정하고 머리 좋고내가 좋아하면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거고난 본래 착한 아이가 아닐지도 몰라갖고 싶은 걸 다 가질 수 있고 모두들 잘해 준다면누구라도 착해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거 아닐까?”

 



  •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공주

 

  이야기가 이렇게만 흘러갈 리 없겠지요인도에 남아 사업을 벌이던 사라의 아버지 크루 대위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고사라의 생일날 사라에게 이 소식이 전해집니다사업의 실패로 모든 재산을 잃고 갑작스레 무일푼으로 전락한 소공녀사라이해타산이 빠른 민친 교장의 사라를 대하는 태도는 급변합니다언제나 비싼 옷과 최고급을 누리던 사라는 이제 부엌데기로 초라한 다락방에서 지내게 됩니다비싼 옷도 더 이상 입지 못하고제대로 된 음식도 먹을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하죠.

 

  사라는 이 역경을 어떻게 버텨낼까요누리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이제는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야 하는 소공녀 사라사실 사라에게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바로 상상력이지요상상력이 왜 특별한’ 능력인지 고개를 갸웃하실 수도 있습니다사라는 단순히 상상만 하지 않습니다상상하고실제로 그렇게 믿죠.

 

  “우리가 볼세라 어느새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네하기야 쟤들은 언제나 그래번개처럼 빠르다니까.”

  사라가 외쳤다.

  어먼가드는 사라와 그 인형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저 인형이걸을 수 있단 말이야?”

  어먼가드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럼적어도 난 걸을 수 있다고 믿어적어도 난 쟤가 걸을 수 있다고 믿는 척해그러면 진짜처럼 믿기거든넌 무엇인가를 믿는 척해 본 적 없어?”

 

  사라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바꾸어 상상하고그대로 믿으려 노력합니다이런 풍부한 상상력으로 사라는 언제나 아이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었죠그리고 상황이 절망으로 바뀐 이후에도 사라는 자신의 놀라운 상상력으로 힘든 나날을 버팁니다.

 

  “군인은 불평하는 법이 없어나도 그럴 거야난 지금이 전쟁 중인 척할 거야.”

 

  “그래그게 좋겠어여기가 바스티유 감옥인 척하는 거야그럼 나는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사람이 돼한 해 두 해그렇게 몇 해 동안 여기서 지낸 거고그래서 모두들 나를 잊어버린 거지민친 교장은 옥사장이고베키는…….”

  이때 사라의 눈빛이 더욱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래베키는 내 옆 감방에 갇힌 사람이야.”

 

  상상의 힘은 정말 놀랍습니다힘든 나날을 사라는 상상력으로 버텨내죠하지만 그렇다고 상상력이 만능은 아닙니다제아무리 기를 쓰고 상상해보아도 때로는 이겨내기 힘든 것들도 있으니까요특히나 배고픔추위는 사라를 점점 지치게 합니다사라는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요이야기의 언제쯤 어떻게 사라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 소공녀 사라

 

  분명 상상력은 사라의 전매 특허에 가까운 놀라운 능력입니다사라는 자신의 상상을 믿음으로써 현실에 덮어씌우죠가난해진 이후에도 사라는 자신을 공주라고 생각하고공주라고 믿습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이것 하나만은 바뀌지 않을 거야내가 만일 공주라면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걸쳤다고 해도 속마음은 공주처럼 될 수 있어.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나 사라는 자신이 공주라고 믿고또 그렇게 행동하려고 노력합니다그래서 민친 교장을 비롯한 사라를 시기하는 아이들도 언제나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사라를 어쩌지 못하지요누더기를 입고 있어도제대로 씻지 못해서 더러워도사라는 언제나 품위 있게 공주처럼 행동하니까요.

 

  누군가는 낡은 소재뻔한 이야기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실제로 착한 주인공이 고난을 겪고 이겨낸다는 이야기는 흔한 소재 그리고 뻔한 이야기입니다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든 생각은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점이었습니다사라가 겪는 고난들그리고 분명 그러한 고난이 끝나는 날이 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 뻔한 이야기가 재미있더란 말이죠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하고요이제는 소공녀라는 단어를 보면 철부지 공주가 아닌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상상력으로 버티며 나아가는 사라를 떠올리게 되겠죠어른이 되어 만난 작은 공주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소공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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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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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고 단절.

 

  달린다달림과 달리는 길에 의문 따위는 없다눈앞에 주어진 길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달린다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불러 세운다그리고 이 길이 아니라고 말한다내가 달려야 할 길은 이 길이 아니라고그 말에 나는 멈춰 선다뒤돌아보니 출발점은 이미 까마득히 멀어져 보이지 않는다어떻게 해야 할까멈출까아니그냥 계속 달릴까그런데 이 길이 아니라는데?

 

  당황이런 순간을 표현하자면 당황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까요사실 당황이라는 말로 표현될 정도의 일이라면 다행이지요만약 그 사안이 아주 중대하다면자신의 삶 전체가 부정당하는 정도의 일이라면분명 당황이라는 말로 끝나지 않겠죠분노혹은 좌절절망그 어떤 격하고 무거운 감정을 덧대보아도 모자랄지도 모릅니다.

 

  손보미의 디어 랄프 로렌』 주인공 종수에게 바로 그런 순간이 찾아옵니다외국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종수는 어느 날 기쿠 박사로부터 갑작스러운 단절을 통보받습니다아무래도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좋겠다는 말이었지요기쿠 박사가 제아무리 조심스럽고 신중을 기하고 말하였다고 하더라도 종수에게는 여태까지 달려온 자신의 경력의 단절을 의미하는 말이었죠갑작스레 달리던 길이 끊기는 상황좀처럼 현실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런 순간종수는 자신이 달리던 길 위에 우두커니 멈춰 서야만 했습니다.

 

  “종수인생은 길어정말이지 길어.”

  나는 그게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가혹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이런 상황을 빠르게 수긍하고 극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대부분의 사람은 무풍지대에 떠 있는 돛단배처럼 목적과 동력을 잃고 표류할 것입니다종수도 마찬가지입니다그도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홀로 표류하죠그러던 종수가 잠긴 서랍장에서 발견한 것은 뜻밖의 물건입니다수영의 편지.

 

  “디어 종수나는 아주 잘 지내곧 결혼식을 올릴 거야나는 무척 행복해너도 잘 지내길 바란다.”

 

  머릿속에 물음표만 떠오르던 종수는 기억의 서랍장을 뒤지기 시작합니다그리고 깨닫죠고등학교 시절 수영과 랄프 로렌아니도대체 어떻게 그 일을 잊을 수가 있지?

 

 

  • 수영과 랄프 로렌

 

  고등학교 시절수영은 갑작스레 종수에게 찾아와 부탁합니다. ‘랄프 로렌에게 보낼 편지를 영작해주는 것.’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수영은 방금보다는 자신감이 떨어진 목소리로 다시 한번 더 말했다.

  “너에겐 정말 식은 죽 먹기일 거야.”

  그리고 덧붙였다.

  “난 정말이지 최선을 다하고 싶어.”

 

  전에는 말 한번 나눠본 적 없던 수영의 부탁이었죠그런데 그 부탁이라는 것 역시 종수가 보기엔 허무맹랑하기 그지없습니다.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쓰다니요도대체 왜무엇 때문에?

 

  “시계시계가 필요해시계그게 있어야 해손목시계그래야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랄프 로렌으로 걸칠 수 있는 거란 말이야랄프 로렌은 시계를 만들지 않아손목시계 말이야그걸 생각하면 우울해져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 같아.”

 

  요컨대 수영은 랄프 로렌 컬렉션을 완성하고 싶은 거였습니다그런데 랄프 로렌에서는 시계를 만들지 않았고수영은 시계를 만들어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싶었던 거죠어처구니없는 부탁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하면서도 종수는 수영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 종수와 랄프 로렌

 

  다시 한 번아니도대체 어떻게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을 수 있지그때부터 종수는 랄프 로렌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합니다랄프 로렌과 관련된 기사를 읽고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조사하고인터뷰를 하죠하지만 대학원에서 쫓겨난 종수에게 갑자기 랄프 로렌을 찾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손에 쥔 것을 잃어버리고 공허를 참을 수 없어 자신을 달래듯 종수는 랄프 로렌을 조사하는 일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로부터 나 자신을 떨어뜨려놓으려고 했었던 것 같다내게 닥친 문제들에 너무 무심하지도혹은 너무 애쓰지도 않을 수 있다고그러니까 마치 공중에 걸린 줄 한가운데에 언제까지고 균형을 잡으며 서 있을 수 있다고그런 착각 속에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면서.

 

  대학원에서 그랬듯 종수는 랄프 로렌을 연구합니다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노력을 들이면서 말이죠수영과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쓰던 일은 아주 오래전 일이고실제로 기억 속에서도 까마득히 잊힌 일이었는데 말이죠이제 와서 랄프 로렌을 조사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훗날 병상에 누운 이모가 말했던 것처럼 종수는 그저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이었을까요일단 호랑이 등에 올라타면 멈출 수가 없듯이 말이죠.

 

 

  • 랄프 로렌헨리 카터조셉 프랭클레이첼 잭슨 여사섀넌 헤이스

 

  종수는 자신을 작가라고 속이며 랄프 로렌에 대해 조사합니다랄프 로렌과 인연이 있는 인물을 찾아 인터뷰를 하죠그 과정에서 종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역시 예상치 못한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하고알던 것과 다른 사실을 만나서 당황하기도 하죠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조사는 매번 벽에 부딪히지만 우연히 발견한 조그만 틈새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는 합니다.

 

  랄프 로렌을 조사하는 종수지만 그의 이야기에는 랄프 로렌만 있지 않습니다그의 어린 시절부터 관련된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의 이야기도 등장하고종수 자신의 이야기도 섞이고랄프 로렌과 관련 없어 보이는 섀넌의 이야기, ‘코끼리 뚱뚱보’ 에머슨 씨의 이야기도 버무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이 모든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 타인의 삶기억기록그리고 나의 이야기

 

  종수가 조사했던 것들녹음했던 이야기를 살펴본다 한들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는 쾌감 같은 것은 없습니다반전의 전율을 느끼게 하는 아슬아슬한 이야기도 없습니다그냥 조금씩 연관이 되어있는 듯 하면서도 전혀 상관없는 각자의 이야기들입니다종수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쓰레깃더미에서 가치가 있는 것을 귀신같이 찾아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이건 아무리 잘되어봤자기껏해야 재활용품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아니재활용품이라도 될 수 있다면 감지덕지일 것이다이 책 역시 여전히 많은 단절과 머뭇거림과 생략이 있다하지만 나는 여기서 만족하기로 한다.

 

  다만 종수는 이 모든 과정에서 다양한 삶을 그대로 보고’, ‘듣고’, 그리고 자신의 삶도 기억하게 되죠그가 오해했던 기억 속의 사람들자신을 내쫓았던 기쿠 박사랄프 로렌의 편지를 부탁했던 수영방문을 똑똑 두드리던 지아 류.

 

그는 그 순간, ‘기쿠’ 박사도 아니고, ‘미츠오도 아니고, ‘늙은 여우는 더더군다나 아니었다그는 그저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었다바로 이 과정을 통해 그는 다시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갈 동력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그제야 나는 깨닫게 된 것이다.

 

삶이 축제는 아닐지언정그게 자신을 지치게 하더라도계속 끌고 나가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그리고 잭슨 여사는 자신의 삶을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움직이게’ 만들었다.

 

지아 류 말이에요있잖아요그 친구는 내가 학교에 안 나간 후부터 내 집 문을 두드렸어요노크 말이에요누군가 내 집 문을 노크해줬죠섀넌나는 그걸 계속 비웃었지만이제는 비웃는 걸 그만해야 할까봐요섀넌이 세상의 누군가는 당신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 거예요그냥 잘 들으려고 노력만 하면 돼요그냥 당신은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돼요.”

 

하지만 그날 섀넌과 밤을 보내면서나는 어렴풋이나마 그 답왜 나는 수영이 보낸 청첩장을 서랍 속에 넣고 잠가버렸을까에 대한을 알 것 같았다아마도나는 그렇게 하면 거기서 영원히 도망갈 수 있으리라고어떤 식으로든 한 번도 붙잡히지 않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리라.

 

 

  •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뭔가가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지만 그게 무엇일까?

 

  종수의 랄프 로렌에 대한 조사는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그 모든 일은 단지 갑작스런 단절로 인한 삶의 공백기를 채우는 정도의 일이었죠그러니 그 틈새를 채우고 나면 끝이 날 그런 일이었습니다종수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전 정말로 위기에 처해 있었어요지난 십 년간의 내 삶이 그저 거짓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거든요과거가 나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거예요나는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었어요그런 적 없으세요도망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 때 말이에요하지만 누구도 그런 식으로 영원히 도망다닐 수 없죠언젠가는 그 사실과 직면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그렇지만 조금만 뒤로 미룰 수도 있잖아요비겁하다고 해도 그게 한 가지 방식이 될 수는 있잖아요.

 

  그래요언젠가 자신의 삶에 주어진 가혹한 사실에 직면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죠영원히 도망칠 수는 없으니까요다만 조금 뒤로 미루고 싶었던 종수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거기에 서서 아주 오랫동안 죽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그리고 이제 정말로 내가 어디론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든 방황이 끝나고 종수는 원점으로 회귀합니다달라진 것은 없죠대학원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랄프 로렌을 조사하며 새로운 진로를 찾은 것도 아니었고요하지만 지아 류가 방문을 두드렸을 때 느꼈듯달라진 것은 없지만 무언가 달라졌습니다그리고 그게 뭔지는 모릅니다다만 어디론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알게 되었죠.

 

 

  • 디어 랄프 로렌

 

디어는 다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인 것처럼 느껴져아주 친밀하고 따뜻해.”

 

  좀 더 나은 랄프 로렌에게 보내는 편지를 위해 항상 양보하던 수영도 절대 포기하지 않던 부분이 있습니다편지의 첫 문장디어 랄프 로렌종수는 너무 식상한 표현이라고 반대했지만수영은 고집합니다결국 그 문장은 수영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죠.

 

그녀의 편지는 완성되었을까잘 모르겠다정말로 잘 모르겠다나는 짐작도 하지 못하겠다한 가지 확실한 것은그 편지가 완성되었든 그렇지 않았든그 편지의 가장 첫 문장은 온전히 수영의 문장이라는 점이다그리고 그 문장은 이 세상 그 어떤 문장보다도 진실되었다는 점이다그러니까,

  디어 랄프 로렌.

 

  기록의 마지막에서 종수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거였죠. ‘디어 랄프 로렌’ 온전한 수영의 문장세상 그 어떤 문장보다도 진실된 문장.

 

  잘 달리던 삶의 길이 갑자기 끊어지고길을 잃었던 종수가혹한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종수그 모든 무의미해 보이는 조사 끝에 제자리로 돌아온 종수모든 게 그대로인 상황하지만 종수는 걷기 시작하겠죠삶의 틈새를 뛰어넘어 새로운 길을 찾겠죠어떤 길일지는 모르겠으나 온전한 자신의 문장자신의 길을 만들며 나아가게 될까요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요그러니까,

  디어 종수.

  그리고 친애하는 여러분.

 

 


  • 에필로그종수와 콜필드

 

  손보미의 디어 랄프 로렌을 읽고 시간을 들여 생각해보다 문득 떠오르는 작품이 있습니다바로 J. D. 샐린져의 호밀밭의 파수꾼이었습니다갑작스런 삶의 단절그리고 방황물론 세세히 보면 분명 다른 작품이지만 그래도 덕분에 디어 랄프 로렌이 더욱 친숙하게 느껴졌네요다른 시대다른 문화에서 각각 방황하던 콜필드와 종수아직 읽어보지 못하신 분이라면 두 작품을 같이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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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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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십 년은커녕 오 년도 지나지 않아 세상은 휙휙 바뀌어갑니다지금 눈에 닿는 것들만 생각해봐도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지요.

 

  그렇습니다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어떤 것들은 참 변하지 않아요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여전히 지지부진 변하지 않는 것들이요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그런 것들은 우리 곁에 좀처럼 변하지 않은 채 있어 왔으니까요다만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82년생 김지영 씨는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바뀌지 않는 무엇 때문에 김지영 씨는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상처를 받습니다그리고 그녀가 겪는 아픔과 슬픔이 그녀만의 것은 아닙니다대한민국에 살았던살고 있는살아갈 여성들의 것이기도 하죠.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제목 그대로 82년생 김지영 씨의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고더구나 여성분들이라면 구구절절 공감할 그런 이야기입니다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님에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82년생 김지영 씨의 삶이 정말 특별할 것이 없기 때문이겠죠.

 

  82년생 김지영 씨가 겪는 차별은 설마 이렇게까지?’라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다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오늘도 누군가 겪었을 차별 이야기입니다남성 독자인 저 역시 김지영 씨의 삶이 특별히 가슴 아픈 경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그녀를 보면 엄마가누나가주변 여자 친구들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 남아선호사상(男兒選好思想)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고김지영 씨는 그 아무보다도 못한 존재인 듯했다.

 

사실 어린 김지영 씨는 동생이 특별 대우를 받는다거나 그래서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원래 그랬으니까.

 

  원래 그랬으니까. 생각해보면 무서운 말입니다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말이죠남자아이장남은 더 귀하니까 더 많이 받아야 한다원래 그랬으니까요형제만 있는 집이라면 위와 같은 차별을 크게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부모님의 입장은 달랐겠죠대를 이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남자아이에 대한 선호가 극명하게 나타나던 시절끝끝내 세 번째 아이도 여아라는 이유로 남몰래 아이를 지워야 했던 김지영 씨의 어머니 이야기는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 출구 없는 미로

 

  ‘원래 그랬으니까에서 시작한 차별은 김지영 씨의 삶을 계속 따라다닙니다언제나 남학생들이 앞 번호여학생들은 뒷 번호였습니다주민등록증에서 남자는 1로 여자는 2로 시작했죠. ‘여자는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로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김지영 씨 삶에 녹아 있습니다대학교에 가서도 마찬가지고취직을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고취직을 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지영 씨는 미로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성실하고 차분하게 출구를 찾고 있는데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고 한다.

 

  김지영 씨가 잘못해서가 아닙니다그녀는 언제나 열심히 했고실제로 잘하기도 했죠하지만 결국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김지영 씨였고그렇게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야 했던 것도 김지영 씨였습니다.


주어진 일을 해내고 진급하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꼈고내 수입으로 내 생활을 책임진다는 것이 보람 있었다그런데 그 모든 것이 끝났다김지영 씨가 능력이 없거나 성실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책 읽는 내내 듭니다지영 씨가 겪는 일에 막연한 분노가 치솟기도 하죠하지만 누구에게 이 분노를 향해야 할까요김지영 씨를 따라오던 남학생자신을 씹다 버린 껌으로 비유했던 선배여자 지원자들에게 부적절한 질문을 던진 면접관? 1500원짜리 커피를 들고 공원에서 쉬던 김지영 씨를 맘충이라고 수군대던 회사원?

 

 


  • 그 한마디

 

  분명 분노해야 합니다잘못된 일에옳지 않은 일에 화를 내야 합니다김지영 씨의 친구 유나가 그러했듯 부당함을 호소하고 고쳐야 합니다하지만 분노는 위험하기도 합니다방향과 목적을 잃고 그 자체의 불같은 속성으로 파괴적으로 번질 수 있으니까요김지영 씨가그리고 다른 여성들이 겪는 차별에 대한 분노를 아무에게나 돌릴 수는 없습니다의도가 오도되지 않고 적절한 방법으로 분노라는 에너지를 이끌어 사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같이 분노하고분노를 표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요한마디그 한마디를 건네는 것.

 

맹수에게 새끼를 잃은 동물처럼 울부짖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의사는 미안하다고 말했다어머니가 미치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할머니 의사의 그 한마디 덕분이었다.

 

  먼저 아파하는 이들을 감싸 안는 것그대의 잘못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말을 건네는 것그리고 김지영 씨를 김지영 씨로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것.

 

여자는 다행이라며 대뜸 학생 잘못이 아니에요했다세상에는 이상한 남자가 너무 많고자신도 많이 겪었다고이상한 그들이 문제지 학생은 잘못한 게 없다는 여자의 말을 듣는데 김지영 씨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꺽꺽 울음을 삼키느라 아무 대답도 못하는 김지영 씨에게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덧붙였다.

  “근데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

  결국 김지영 씨는 학원을 그만두었고이후로도 한동안 어두워진 후에는 정류장 근처에 가지 못했다얼굴에서 웃음을 지웠고모르는 사람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남자들이 다 무서웠고계단에서 동생과 마주치고는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그럴 때면 여자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내 잘못이아니다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많다여자가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랫동안 그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립글로스는 뭐야?”

  “나 지금 바른 거색깔 괜찮지우리 피부톤 비슷해서 잘 받는 색도 비슷하잖아.”

  엄마도 여자라거나집에만 퍼져 있지 말고 좀 꾸미라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선물한다깔끔하다.

 


 

  •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더 많아요

 

  정말입니다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공감하고 같이 아파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인류가 지금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합니다인간은 완벽하지 않고잘못된 일은 여기저기서 일어납니다하지만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십 년 동안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분명 언젠가 잘못은 고쳐지고 세상은 나아질 거예요아파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감싸 안고그들이 겪는 부당함에 항의하고쓰러져가는 이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82년생 김지영 씨 혼자서 답을 찾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이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죠그 어느 때보다 남녀의 대립이 심한 요즘분노만으로 김지영 씨의 삶을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김지영 씨를 존중해주고 그녀를 아끼고 안아주는 남편 정대현 씨의 존재처럼한쪽 성이 겪는 차별의 문제는 편을 갈라서 다른 성을 비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보듬고 나아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끝으로 노래 하나를 붙이고 갑니다. [브로콜리너마저 울지마이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지금까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었습니다.

 



 


울지마


네가 울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작은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세상이 원래 그런 거라는 말은 할 수가 없고

아니라고 하면 왜 거짓말 같지


울지마


네가 울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뭐라도 힘이 될 수 있게 말해주고 싶은데

모두 다 잘 될 거라는 말을 한다고 해도

그건 말일뿐이지 그렇지 않니


울지 마


왜 잘못하지도 않은 일들에 가슴 아파하는지

그 눈물을 참아내는 건 너의 몫이 아닌데

왜 네가 하지도 않은 일들에 사과해야 하는지

 


약한 사람은 왜 더


모두 다 잘 될 거라는 말을 한다고 해도

그건 말일뿐이지 그렇지 않니


울지 마


왜 잘못하지도 않은 일들에 가슴 아파하는지

그 눈물을 참아내는 건 너의 몫이 아닌데

왜 네가 하지도 않은 일들에 사과해야 하는지


약한 사람은 왜 더





브로콜리너마저 울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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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굴데굴 2017-11-21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핫한 ‘82년생 김지영‘이네요. 저도 책을 읽으며 크고 작은 상처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30-40대의 이야기를 잘 풀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아가, 마지막 장면에서 의사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런 세대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여전히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는 냉정하게 반응하는 기득권 세력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도 느꼈습니다.

낙서 2017-12-03 20:47   좋아요 1 | URL
마지막 냉철한 의사의 판단이 다소 껄끄럽게 느껴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이것이 현실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요. 누구나 그것이 자신의 현실과 결부되면 손해를 감수하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작중 의사가 밉기도 하였지만, 실상 우리가 분노해야 하는 대상은 그러한 차별을 개인에게 ‘이익‘이라는 이유로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의 미흡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신이 되려 했는가

 

  ‘이카로스라고 들어보셨나요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이카로스의 아버지는 다이달로스입니다다이달로스는 뛰어난 건축가로 크레타에서 부탁을 받아 미노타우르스(머리는 황소몸은 사람)’를 가두기 위한 미로 라비린토스를 만들었죠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신의 아들 이카로스와 되레 라비린토스에 갇히게 됩니다다이달로스는 밀랍으로 깃털을 엮어 탈출을 계획합니다그리고 탈출하면서 아들에게 말하죠너무 높게 날면 태양의 열기에 밀랍이 녹고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습기에 깃털이 무거워지니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날아야 한다고 말이죠문제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렇듯 꼭 하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아서 일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자유로이 하늘을 날던 이카로스가 아버지의 충고를 잊고 하늘 높이 날다가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 추락합니다이카로스는 신이 되고 싶었던 걸까요?

 

 

  • 노인치매시인살인자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었습니다화자 김병수는 70대의 노인입니다딸 하나를 슬하에 두고 사는 그는 시인이고최근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그리고 과거 수십 명을 죽였던 연쇄 살인범입니다노인치매시인살인자어쩐지 생경한 조합이지요그런데 왜 난데없이 앞에서 이카로스 이야기를 꺼냈을까요김영하의 또 다른 유명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 시대에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단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창작을 하거나 아니면 살인을 하는 길.


  여기서 ()’을 종교의 대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그저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정도로 인식하면 될 것 같습니다그런데 왜 창작과 살인이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길일까요조금 더 생각을 해보자면 창작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입니다마치 신이 세상을 만든 것처럼 말이지요그리고 인간은 모두 내면에 하나의 세계를 갖고 있죠그러니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인간을 죽이는 일은 한 세계를 소멸시키는 일입니다세계의 창조와 소멸은 신의 영역이기에 창작과 살인이 신이 되려는 인간의 길인 거 아닐까요?

 

  그런데 살인자의 기억법의 화자 김병수는 창작도 하고 살인도 합니다신에게 이르는 두 가지 길을 모두 한 셈이죠수십 명을 죽인 살인자를 여전히 인간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겠습니다하지만 어떤 죄책감도 후회도 없이 수십 명을 살해하고 여전히 발 뻗고 여생을 보내는 화자는 분명 인간의 틀을 벗어난 존재 같기도 합니다물론 여기에는 어떤 존경도 없습니다그저 무언가 다른 존재 같다는 감각만을 말하는 것입니다화자는 생각합니다.


 

  나는 악마인가아니면 초인인가혹은 그 둘 다인가. 


  창작과 살인신에게 이르는 길 두 가지 모두 행하는 화자그는 신일까요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인간을 벗어난 초인적인 면모를 보이면서도 여전히 일면에서는 인간적이기도 하니까요가까운 기억부터 차차 사라지는 병치매화자는 죽음 앞에서 갈팡질팡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망각도 막을 수 없다모든 것을 잊어버린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다지금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세가 있다 한들 그게 어떻게 나일 수 있으랴.


  하지만 이런 생각도 오래가지 못합니다그는 다시 고백합니다.

 


  두렵다솔직히 좀 두렵다.

  경을 읽자.


 

  • 신의 장난인가심판인가

 

  화자가 처음 죽였던 대상은 아버지였습니다매일같이 가정폭력을 일삼는 화자의 아버지였습니다열여섯 살이 된 화자는 아버지를 베개로 눌러 죽입니다.

 


  아버지가 나의 창세기다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영숙이를 두들겨 패는 아버지를 내가 베개로 눌러 죽였다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의 몸을영숙이는 다리를 누르고 있었다영숙이 나이 고작 열 셋이었다옆구리가 터진 베개에서 왕겨가 쏟아져나왔다영숙이는 그걸 쓸어담고 엄마는 멍한 얼굴로 베개를 꿰맸다.


  창세(創世)열여섯김병수는 살인을 하고 세상을 만들었습니다그리고 아버지가 죽었던 나이 45세까지 살인을 계속했죠인간을 벗어나 두려울 것 없는 초인이 되어 신으로 가는 길을 걷던 그가 다다른 곳은 치매입니다살인자에게 치매라니신의 장난일까요아니면 심판일까요.

 


  분명히 뭔가를 하러 방에 들어왔는데 그 뭔가가 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나를 조종하던 신이 조종간을 놓아버린 것 같다.


  점차 현실이 환상이 뒤섞이기 시작합니다생전 모르는 개를 딸 은희는 우리 개라고 말합니다또 언젠가는 개가 없다고 말합니다국수를 먹었는데 개수대에 먹다 남긴 국수가 그릇째로 들어있습니다처음 보는 경찰이 자신을 알아봅니다.

 


  모든 것이 뒤섞이기 시작했다글로 적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면 아무것도 안 적혀 있다녹음했다고 생각한 말이 글로 적혀 있다그 반대도 있다기억과 기록망상이 구별이 잘 안 된다.


  모든 것에 의문이 생깁니다과연 그가 기억하는 것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망상일까요그는 살인을 하긴 했던 것일까요그의 딸 은희그가 살인범이라고 의심하는 박주태안 형사 등모두 다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요치매이지만 분명히 기억하는데 어떻게 현실이 아닐 수가 있을까요?

 

  김병수는 한 번도 구금되거나 잡힌 적이 없었습니다시대가 그런 시대였죠책임 있고 치밀한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으레 간첩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던 때였습니다그런 화자도 상상하던 감옥이 있습니다.

 


내 악마적 자아의 자율성을 제로로 수렴시키는 세계내게는 그곳이 감옥이고 징벌방이었다내가 아무나 죽여 파묻을 수 없는 곳감히 그런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곳내 육체와 정신이 철저하게 파괴될 곳내 자아를 영원히 상실하게 될 곳.


 

  • 혹은 공()

 

  언제나 적절치 못한 곳에서 헤매는 치매 노인김병수그는 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기억을 잃고 존재를 잃어갑니다.

 


  무심코 외우던 반야심경의 구절이 이제 와 닿는다침대 위에서 내내 읊조린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형체와 소리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으니라.”


  작가 그리고 살인자 김병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아니무엇이 되는 것일까요이카로스처럼 너무 높이 하늘을 날았던 것일까요신에게 이르는 길 모두를 행한 벌로 공()으로 추락하게 된 것일까요아니면 정말 인간을 벗어나 초월적인 세계로 나아가게 된 것일까요?

 

  김병수가 죽였던 모든 것싸웠던 대상지키고자 했던 것기억하고자 기록했던 것모든 것은 결국 공()으로 수렴합니다애초에 그는 존재하기는 했던 것일까요망각과 존재의 소멸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이 짧은 이야기는 결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닙니다그렇다고 무겁기만 한 이야기도 아니죠읽기에 따라 한 없이 가벼운 농담 같기도 하고소름끼치게 무서운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실없는 농담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리고 사람을 죽이고피가 분출되는 무서운 이야기를 말하는 것도 아니죠.

 

  있을 법하면서도 상상의 세계에 속할 것 같은 이야기김영하의 작품을 읽으면 현실인 듯 아닌 듯 모호한 경계를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그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도 그랬고단편 흡혈귀도 그랬습니다물이 스미듯 그의 작품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김영하가 다음에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 궁금해집니다살인창작()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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