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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으뜸
김빵 지음 / 다향 / 2020년 7월
평점 :
유폴히 작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로맨스를 읽는 밤에서 소개된 걸 듣고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간볼 겸 연재분을 찔끔찔끔 봤는데 보면 볼수록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전자책을 사고 말았다. 사놓고 안 읽은 책이 많아서 새 책 사면 안 되는데ㅠㅠ
처음에 전자책이 없는 줄 알고(검색을 잘못한 거였다) 종이책을 살 뻔 했는데 종이책으로 샀어도 후회하지 않았을 것 같다. 정말 재밌었다. 특별한 단어나 문장 없이도 인상적인 문장과 시간을 책장에 잡아놓은 것 같은 멋진 표현 덕분에 더욱 즐거운 독서였다. 작가의 다른 책도 찾아볼 생각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으로 보이는 임솔은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다. 뒤늦게 합류한 멤버라는 이유 하나로 안티팬이 많은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사이, 그가 불면과 감기에 시달리다가 약물 오용으로 쇼크사한다. 그에 온 몸과 마음으로 슬퍼하던 솔이 우연한 기회에 시간 여행을 시작한 것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침대 속에서 눈물짓다 정신을 차리니 고등학교 책상에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솔은 곧장 자신이 사랑한 아이돌 류선재가 재학하던 학교로 달려간다. 아직 연습생인 선재는 뜬금없이 사랑을 외치며 눈물짓는 여자아이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현상황을 꿈으로 여기던 솔은 주변 시선도 아랑곳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낸다.
결국 자신이 서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솔은 뜬금없이 돌아온 고등학교에서 당황해하다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선재를 살리기로 한다.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전개지만 왠지 이해가 갔다. 아무런 연유도 없이 갑자기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것도 고등학교 시절, 꽤나 암울하고 할 수 있는 게 없던 그 시기로 돌아간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이 뭐가 있을까. 현실을 부정하던가, 그게 아니면 상황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솔의 선택이 어느정도의 현실부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안 그래도 현실에 마음 두지 못하는 삶이었지 않나.
아이돌은 물론 어떤 것이든 그렇다. 내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음을 다해 좋아한다는 건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다. 그 순수한 애정은 현실을, 당장 나를 뒤흔드는 난관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 힘겨울 때 선택하는 방패막이로서 시작된다. 그 마음은 나를 위한 작은 쿠션으로서 마음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대피소를 마련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런 종류의 감정이기에, 선재가 살아 숨쉬는 과거의 시간은 솔에게 도피이자 휴식이고 동시에 현실을 준비하는 공간이 된다. 솔이 이 시간에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삶 중에 바꾸고 싶은 게 없다고 솔은 생각한다. 그러니까 선재를 살리겠노라고 결심한다.
이 이야기는 달리 말하면 솔의 만족스러운 현재에는 아이돌 류선재가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과거로 떨어진 솔은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의도치 않게 과거로 떠나갔을 때처럼 의도치 않게 현재로 돌아온 솔이 여전히 죽음을 피하지 못한 선재를 보고 오열한 것을 보면 아이돌 류선재는 솔의 삶에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좋아하니까 뭐든지 다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그 마음은 사실 지금의 내가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감사 인사였던 셈이다.
우리는 때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걱정하며 자신의 삶을 끌어갈 추진력을 얻는다. 이때의 솔이 그렇다. 달갑지 않은 시간여행에서 솔이 선택한 것은 과거의 삶을 반복 혹은 번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 걷고 있는 현재의 시간을 보다 충실하게 꾸미는 것이었다. 지금 자신의 현재가 곧 과거라는 아이러니를 인정하지 못한 현실도피이자, 과거를 되풀이할 생각이 없는 충실한 현재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원인이야 어쨌든 솔은 선재를 살리기로 결심하고 학교 생활도 소홀히하며 선재의 뒤를 쫓는다. 직접 미래를 경고할 수 없기에 어떻게든 미래에 닥칠 위험을 뇌리에 각인 시키고자 한다. 마치 자식의 미래를 자신이 보장해줄 수 없으니 갖을 수를 써서 온갖 위험을 각인시키고자 노력하는 부모처럼.
선재는 그런 솔의 시도에 당황하고 불쾌하게 여기기까지한다. 실제로 스토킹이나 다름 없는 행위였기에 솔 역시 자신이 지나쳤음을 인정하지만, 선재를 살려야한다는 생각에 자꾸만 손이 간다. 결국 선재에게 붙들려 추궁을 당하기까지 솔의 노력은 이어진다. 불쾌한 행동이니까 그만해야하는데, 그만두면 네가 죽는다는 딜레마 속에서 눈물짓던 솔은 현재로 돌아가게 되고, 여전히 선재가 없는 현재를 마주한다.
몇 가지 시도 끝에 자신의 노력이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음을 확인하고 또다시 깊은 절망을 맛본 솔은 재차 시간 여행에 나선다. 선재의 분노 앞에서 그렇게 반성해놓고서는 다시 또 한 번이다. 그만큼 솔의 삶에서 선재는 컸고, 바로 얼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의 죽음이 된 지금은 더더욱 살을 에는 아픔이었다.
한편 선재는 솔의 눈물 앞에서 속절없이 마음이 약해진다. 나쁜 의도도 없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솔에게 큰 악감정은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사실 선재가 잘 이해가 안 간다. 왜 좋아하게 되는 걸까. 어찌보면 불쾌하기까지 한 행동들이다. 행운의 편지를 가져다 놓고 아는 사이도 아니면서 주변을 맴도는 사람. 울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이래저래 자꾸만 얽히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게 되는 걸까.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선재가 솔을 그렇게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양이라는 정도다. 어쩌면 첫만남에 체면도 차리지 않고 널 사랑한다고 외친 탓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선재는 솔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에 조금씩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힘든 순간 다가와 건네주었던 MP3를 귀에 꽂고 노래를 들으면서 솔을 생각하고, 자꾸만 찾아오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속내를 짐작해보려고 노력하는 사이 어느새 선재는 솔에게 애정을 품는다. 언감생심 상상도 하지 못하던 솔을 당혹시키는 고백이 이어지고, 그 와중에 현재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를 되찾아가기 위해 주인이 집앞에 찾아오기까지 한 상황에서 솔은 절박한 심정으로 전달되지 못할 편지를 쓴다. 선재야, 제발 건강해야해.
결국 돌아온 현재에서 솔은 많은 것이 변한 현실을 마주한다. 열심히 모은 선재의 굿즈가 사라지고 대신 선재의 생이 돌아온다. 다시 그때처럼 만날 수는 없는 사이가 되었어도 솔은 선재가 살았다는 사실에 안심한다.
다소 허탈하긴 해도 바쁜 현실의 삶을 살아가던 중, 방송국에서 일하던 솔은 다시 선재와 그가 속한 아이돌 그룹 감자전과 마주친다. 함께 만나서 웃고 떠들었던 백인혁의 싸늘한 홀대에 심장이 서늘해지고, 선재와의 만남도 기대할 수 없게 된 상태. 결국 먼저 말을 건 건 선재였다.
약간의 갈등과 오해가 있었지만, 이미 서로 호감을 가진 두 사람의 사이는 금세 회복된다. 오랜 세월을 기다렸음에도 선재의 마음은 여전히 솔에게 있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맺어지는데 이 뒤로 묘사가 얼마나 달달한지 모른다. 사랑하는 순간순간을 이렇게 글로 잡아 매어둘 수 있다면 굳이 사진이 필요하지 않을테다.
비밀스러운 연애가 주변인에게 드러나는 과정과 솔의 불안한 마음이 차츰 가라앉는 과정을 묘사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외전으로는 뒷이야기 약간과 시간을 돌리는 시계에 얽힌 비사가 조금 소개되는데, 원체 이야기 완성도가 높아서 완전히 맥거핀으로 끝나버려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회수를 꽤 잘해주셔서 놀랐다. 여전히 맥거핀인 부분은 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정신없이 빠져 읽으면서 한 순간도 아쉽지 않은 멋진 소설이었다. 또 이런 책을 읽고 싶고, 아주 조금은 닮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시간을 붙들어매는 글로 쓰인 시간을 소재로 한 이야기라니. 정말 로맨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