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책(ㅎㅎ)
책 처음 나왔을 때도 생각했지만 정말 예쁘게 뽑혔다. 이미지보다 실물이 더 예뻐서 좋음. 황금가지 책 정말 예쁘게 뽑아.
종이동물원과 마찬가지로 단편집인데 보아하니 다른 나라에는 없는, 독자적으로 엮어낸 켄 리우 단편집인 듯하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번과는 달리 무난하게 읽히는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읽기가 쉬운 이유는 지역색이 강하고 참사가 주로 다루어진 종이동물원에 비해서 좀 더 인류 보편적이고(그렇게 여겨지고) 끔찍한 장면이 적어서다. 어느 특정 지역의 이야기라기보단 개인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나 미국색이 강한 미래지향적 작품이 많아서인데, 잔인한 묘사를 잘 견디지 못하는 탓에 읽기는 편했지만 약간 비겁해진 기분도 든다. 일부러 외면한 건 아니어도 쉬운 길을 찾아가는 느낌은 들었으니까.
재밌는 건 책에 실린 대부분의 화자가 여성이라는 점이다. 일부러 골라서 이렇게 실은 걸까? 여성 화자를 잘 살린 에피소드도 몇 보인다. 남자 작가가 여성 화자를 쓰면 대체로 티가 나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켄 리우의 역량이나 사고의 유연함이 보였다.
< 호(弧) >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말을 먼저 해야겠다. 제목 그대로 느슨한 곡선을 그리는 이야기다.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주제에 걸맞지 않게 아주 개인적이고 지극히 소소한 한 여자의 삶에서 시작되어 한 여자의 삶으로 끝나는 점이 특히 그렇다.
켄 리우의 소설답게 다양한 사람이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갈등을 빚지만, 그 어느 쪽도 옳거나 그르지 않고, 그저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이라고 말해주는 듯한 작품.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 책에서 가장 켄 리우다운 작품을 하나 꼽자면 이 작품이 아닐까.
덤. 계속해서 사람의 손을 동물에 비유하는 게 인상적이고 예뻤음.
< 심신오행 >
켄 리우의 작품에서는 곧잘 과거와 미래가 만난다. 내가 느끼는 ‘현재’는 이 작품에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이 작품 속의 과거나 미래가 현재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그렇다.
인체에 존재하는 박테리아를 오행으로 해석하는 관점이 재밌었다. 어쩌면 현대의 과학이 향하는 방향은 인간성을 거세하는 방향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 결과적으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선택한 것은 과거와 미래로 갈린 두 세계의 화합이고, 나는 그 결말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 매듭 묶기 >
어느 지역의 매듭 문자에서 유전자 배열을 찾아내는 이야기인데…, 핵심은 그게 얼마나 기가 막힌 과정으로 이루어졌는지다. 세상의 모든 것에 값을 매겨 마땅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오래된 것은 값을 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되었는가. 과거의 것은 값어치가 없는 것인가. 옛것을, 어쩌면 인간의 근본이 되는 것을 지키는 이들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가.
< 사랑의 알고리즘 >
사람을 본따 만든 인형이 사람과 동일한 것이 두려운 일인가? 인간과 인형이 같은 존재인 것이 섬뜩한가? 나는 모르겠다. 인형과 인간이 동일하다면 오히려 기뻐해야할 일일텐데 왜 두려워하는가. 인간이 인간을 창조해내는 것이 두려운가? 그게 아니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이? 내 손으로 만든 것과 내가 동일하다면, 나 자신을 빼앗기는 느낌이라도 드는 걸까?
< 카르타고의 장미 >
인간의 몸과 정신을 분리한다면 그 인간의 본체는 어느 쪽일까. 이 소설의 화자는 그것을 결정하지 못한 듯하다. 중요한 것은 몸이라고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정작 정신만 남은 가족을 죽지도 못했다고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몸과 정신 모두가 그 사람인걸까? 그렇다면 몸과 정신 중 하나가 죽어버린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인가?
화자의 비애는 공감할 수 없는 면이 너무 크다.
카르타고의 장미는 싱귤레리티 3부작의 첫 작품인데 설정은 이어지지만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전혀 이어지지 않는 게 인상적.
< 만조 >
예쁜 작품. 물이 차오르는 지구에서 버티는 부녀의 이야기. 아주 짧고 아련하니 예쁘다.
< 뒤에 남은 사람들 >
카르타고의 장미에서 이어지는 싱귤러리티 3부작. 카르타고의 장미에서 생겨난 기술로 인해 상당수의 인류가 ‘업로드’ 되고, 인구가 극단적으로 줄어들면서 문명과 풍요를 잃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인상적이고 재밌었던 건 인구가 주니까 지구에 일어나는 변화 쪽. 자연이 살아나고 인터넷 망이 끊어지고 도시가 폐허가 되고….
인간답게 사는 건 무엇일까. 어떤 답이라도 선택은 ‘내’가 하는 거라고 말하는 켄 리우를 참 좋아한다.
< 곁 >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이렇게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그릴 수 있는 작가는 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유예와 미루기가 결심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이야기가 진하게 와닿았다. 상실은 아름다워.
<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
표제작이자 싱귤러리티 3부작의 마지막 작품. 뒤에 남겨진 사람들이 업로드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면, 이 이야기는 업로드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컴퓨터 속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번식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상 세계 속에서도 사회는 발전해 나간다.
켄 리우가 그려낸 새로운 인류는 다중 차원에서 살아가며 현생 인류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을 구가한다. 그 모습이 얼마나 환상적인지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을 정도로 새로운 세계다. 그런 세상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신생 인류와 한때 몸을 가지고 있었던 일명 ‘고대인’이 만나 서로를 이해하는 이야기이자, 이렇게나 다른 모양이 되어버린 미래 세계 속에서 현대의 삶과 물성이 어떻게 남아있는지를 상상해볼 수 있는 이야기.
덤으로 화자 이름에 고래 이모티콘이 들어가 있는 게 귀엽다.
< 달을 향하여 >
이 이야기를 보면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난민,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심사에 대한 유튜브 방송을 봤던 게 생각났다.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제도가 있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잘못은 누가 했던 걸까. 약자에 대한 차별적 태도가 사람을 어떻게 몰아넣는지 새삼 되새기게 만든 작품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데 진실이 무슨 소용인지.
< 모든 맛을 한 그릇에. 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 >
이 책에서 가장 긴 작품이다. 중국인의 정신으로서의 관우가 미국으로 이주해온 중국인들에게 어떤 모습인지 엿볼 수 있다. 중국인들의 자문화에 대한 긍지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근현대사에서 착취당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공감과 비애를 느낄 수 있었던 작품.
‘모든 맛을 한 그릇에’란 제목의 원문은 All the flavors인데 정말 번역을 잘했더라. 삶의 모습을 맛으로 비유해 관우가 미국의 맛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 미국인이 되었다는 귀결인데 이렇게 정확한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미국은 다민족 국가인만큼 모두가 미국인이라는 자부심? 같은 것으로 뭉쳐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생각이 나서 재밌었다.
낯선 것에 원망을 떠넘기는 건 참 쉬운 일이다.
< 내 어머니의 기억 >
시한부이 어머니가 딸의 일생을 지켜보기 위해 우주여행을 한다는 이야기. 공유한 시간은 적고 최종적으로는 나보다도 젊은 어머니와 만나게 되지만, 어떻게 보면 어머니가 있으나 없으나한 삶이지만, 그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애정만큼은 진실되다.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을 그린 이야기.
다시 쓰지만 어머니를 향한 애정을 이보다 더 정확하고 아름답게 그리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