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티튜트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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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입니다. 이 녀석이 범인입니다. 두 권이나 되면서(심지어 꽤 두꺼워!) 하루종일 다른 일에 정신 팔 여유도 주지 않고 후루룩 읽게 만든 녀석입니다!

독서 스타일이 바뀐 뒤로 어지간한 책은 일주일 정도 거쳐서 천천히 읽고 있는데 하여간 스티븐 킹이다. 잠깐만 읽다가 다시 할 일 해야지~ 했는데 어림도 없었다. 도입부까지는 쉬엄쉬엄 읽을 수 있길래 방심했다.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출판사 포스트로 받아보고 곧장 사놓고 이제서야 손을 댔는데(아, 읽을 책이 너무 많았어요.) 이렇게 후루룩 읽어버릴 줄이야….

어린이들을 데려다 쓰는 초능력 연구소라는 소재는 꽤 익숙하다. 주로 일본 만화 쪽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소재로 개인적으로 이런 배경의 픽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배경엔 죄가 없지만 대체로 전개가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면서도 조금 걱정을 했지만 스티븐 킹 이름을 믿고 샀다. 미저리를 읽은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그 임팩트가 남아있기도 했고, 좋아하는 작가님이 스티븐 킹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평가를 받는 분이라 왠지 믿음이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믿음에는 보답이 따랐다.
이제 겨우 두 작품을 읽은 상태라 스티븐 킹 스타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미저리와 인스티튜트에서 느낀 바로는 스티븐 킹의 작품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끔찍한 폭력의 실태를 아주 섬세하고 그럴듯하게 그려내는 듯하다. 미저리는 하필 내 아킬레스 건을 건드리는 바람에 읽기가 매우 힘들었다(T_T). 인스티튜트에서 주로 다루려고 했던 건 아동 학대였던 모양인데, 좀 우스운 결과가 되었다. 아동 인권 측면에 있어서 미국에 비할 데가 못 되는 나라에서 자란 내 입장에서 인스티튜트에서 다루는 아동학대는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 했다. 아무 느낌도 없어서 오히려 심란해지기는 했다.
‘특수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갇혀있는 연구소’라는 소재를 일본 만화나 게임으로 접하면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소년병, 살생을 권장하는 경쟁구조, 자신의 손으로 생존을 책임져야하는 열악한 생활 환경, 개인 공간은 커녕 취향조차 반영할 수 없는 좁은 방(아예 개인 방이 없는 경우도 흔하다.). 시설 관리자는 당연히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쓰지만, 관리자에 의한 폭력보다 서로에게 휘두르는 폭력이 더 크게 비춰진다. 작품에서 주로 다루는 건 이런 설정 상황을 기반으로 인물들이 다양한 체험을 통해 절망에 빠지는 과정이나, 적당히 시간을 건너뛰어 인간성을 잃어버린 어른이 된 인물들이다.
나는 이런 작품을 보면 시큰둥해진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생각부터 든다. 그렇지 않나. 인간성을 잃어서 어쩌라고? 절망을 거듭하는 게 뭐 어떻다고? 거기에 무슨 서스펜스가 있단 말인가. 환경이 저 모양이면 옆에서 갈구지 않아도 사람은 인간성을 잃는다. 인간성이라는 건 문화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니까. 인간이 고통 받는 게 재밌나? 재밌을 수도 있겠지. 그치만 그런 취향이라면 차라리 운동을 하길 권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최대한 억눌러야하는 취미니까. 어떻게 봐도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없고 그저 작가나 소비자의 가학적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한 값 없는 포르노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인스티튜트 감상문에 적는다는 건, 당연하게도 인스티튜트가 그런 작품과는 결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인스티튜트가 그리는 아동 학대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달리 말하면 인스티튜트에서 아동학대라고 설정해둔 환경이 온건하다 못해 내가 보고 듣고 겪어온 현실과 별 차이가 없었다는 의미다.
주인공 루크는 천재 소년이다. 12살의 나이에 두 개의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아 시험만 치르면 될 정도다. 그러면서도 사회성을 잃지 않고 주변인과 잘 어울린다. 이렇게 뛰어난 지능 앞에서 루크가 가진 미미한 염동력은 주목하기엔 너무 시시하다.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는 어느 밤, 루크는 집에 침입해 부모를 죽인 괴한들에게 납치당한다. 눈을 떠보니 자신의 방과 거의 흡사하지만 확실하게 다른 공간이다. 그곳은 초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연구하는 시설이고, 루크는 초능력자로서는 큰 가치가 없지만 뛰어난 재능 때문에 겸사겸사 끌려왔다.
시설의 어른들은 아이들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말을 듣지 않으면 뺨을 때리고, 때로는 전기충격을 하기도 한다. 교육은 물론 하지 않고, 심지어는 술과 담배를 자유롭게 구할 수 있는 환경에 방치한다. 아이들은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 쉽게 중독된다. 그들은 약물을 통해 아이들의 초능력을 강화해서 원격으로 특정 인물을 암살한다. 그 과정 중에 아이들은 자신을 잃고 일종의 백치 상태가 되어버린다. 시설에서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아이들을 열악한 환경에 방치해 죽음으로 내몬다.
책에서는 이런 설정이 의미심장하고 끔찍하게 묘사된다. 난생 처음으로 어른에게 맞은, 심지어 뺨을 얻어맞은 루크는 크게 당황한다. 시설의 못된 어른들은 제멋대로 구는 아이들이 끔찍하다고 말하며 그들을 조롱한다. 그런 일이 정말로 끔찍하다는 걸 책을 읽으면 느낄 수 있다. 문자상으로는.

문제는 한국의 아동 인권이다. 노키즈존 같은 놀라운 게 존재하는 이 나라에서 제멋대로 구는 아이들이 끔찍하다는 말을 아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들으라는 듯이 말하는 어른이 드물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청소년 시절에 대놓고 들은 적이 있기도 하다.) 싸대기? 난 초등학생 때 담임에게 뺨을 맞고 벽까지 날아가본 적이 있다. 루크가 그렇게 될 거라고 두려워했던 바로 그 상황이다. 중학생 때는 그렇게 세진 않아도 모욕을 느낄 정도로는 뺨을 때리는 선생이 흔했다. 고등학교는 꽤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그보다는 나았지만.
심지어 이 시설에서는 아이들의 심적 안정을 위해서 굳이 공을 들여 자택에 있던 방을 재현하기까지 한다. 식사는 메뉴가 두 개라 선택이 가능하고 과자는 조건이 있지만 과일은 언제든 먹을 수 있다. 열악하나마 놀이터가 있고 숙박하는 건물 안에서는 연구에 동원될 때가 아니면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 방에는 각자의 TV와 컴퓨터도 주어진다. 이게 방치 학대의 일환으로 들어간 설정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청소년이 되어도 개인 공간과 시간을 허락받지 못 하는 나라에 사는 내게는 천국에 가깝다.
여기까지는 한국인이라면 정도의 차이일 뿐 감상이 비슷하리라고 생각한다. (아니라고요? 그럴 수도 있죠.) 의견이 크게 갈리는 건 아이들의 최후 부분일텐데, 개인적으로는 꽤 자비로운 최후라고 생각한다. (내가 자비롭다고 느낀 부분이 끔찍하다고 설정된 거라는 느낌은 든다.) 자의식과 지능을 아예 잃어버린 상태라면 어차피 죽은 거나 별 차이가 없잖은가. 아예 인간의 형태와 함께 자의식과 지능을 잃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친구와 함께 저것도 괜찮은 최후라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물론 만화 속 인물들은 충격 받았었다.

내용은 워낙 재밌었기 때문에 따로 할 말은 없다. 스티븐 킹 답게 헐리우드 영화 한 편 본 것 같은 느낌의 재밌는 소설이었다. 인간과 인간성의 승리라는 결말도 마음에 든다. 마지막엔 좀 울먹울먹 했다.
덤으로 스티븐 킹이 나이를 먹은 걸까 아니면 소설상에 적용하기 애매해서 빼둔 걸까 궁금한 부분이 있었다. 엔딩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공식적으로 납치가 없었던 일인 걸로 하고 헤어지는데, SNS나 메일 주소를 주고받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다. 영원한 이별처럼 묘사해놨는데, 요즘 애들이면 그럴 리가 없잖아? 왠지 작가와의 세대 차이를 본 것도 같다.

아,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얘기. 두 가지.
하나. 오타가 너무 심하다. 그래서 별 하나 뺐다. 대체 번역을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다.
둘. 책을 세트로 샀는데 띠지가 두 겹이라서 깜짝 놀랐다. 1권에 둘러진 띠지랑 두 권을 한꺼번에 묶은 띠지로 두겹이다. 어떻게 끼워넣었는지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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