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 - 18세기 이탈리아 귀족 계층의 성과 사랑 그리고 여성
로베르토 비조키 지음, 임동현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 치치스베오란? 

이탈리아어대사전에 따르면 "18세기에 발달했던 관습에 따라 남편이 부재중일 때 귀부인을 따라다니며 그녀의 모든 활동을 챙기고 돕는 시종기사(cavaliere servente)"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치치스베오 혹은 시종기사는 18세기에 의도적으로 계획된 삼각관계의 틀 안에서 다른 누군가의 아내를 곁에서 수행하는 공인된 임무를 맡은 남성이었다. -27p



책의 첫 부분을 보고 굉장히 재미있겠다! 싶어서 알람까지 걸어두고 신청한 책이다. 

일단 소재 자체가 굉장히 신선했고, 표지, 디자인, 첫장에 실린 그림들까지 마음에 들었기에, 택배를 받고 금방 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읽는데 2주나 걸렸다.


특히 읽는데 속도가 안나서 여러모로 좌절했다. 다른 책에 비해 시간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이유를 생각해보니, 


1.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학술적인 연구서이다. 대학교 교양 수업 교재로 쓰면 적합할 것 같다.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내용이 깊다. 초기 치치스베오에 대한 흥미가 생각보다 길게 지속되지 않았기에, 한 번에 다 읽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확실히 연구서답게 내용이 정말 충실하다. 


2. 책에서 다루는 치치스베오, 갈랑트리 등의 용어는 현대어로 대체가 안되기 때문에 원어를 그대로 살려서 작성되었다. 이탈리아어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서, 이 용어가 뭐였더라-, 얘가 누구였더라 - 기억이 안나서 다시 찾아 읽고 하느라 좀 더 걸렸다. 게다가 한 귀족여성&치치스베오의 사례가 중반과 후반에 동시에 실리기도 한다. (이거 분명히 본 이름 같은데 걔네가 맞나..?-뒤적뒤적)


3. 비슷한 시기의 작가, 학자, 책 등의 사료가 정말 풍부하게 제시되는데 진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ㅜㅜ 초반부에 멍 때리면서 읽었다. 세계사, 세계문화에 대한 지식이 너무 없다는 것에 대한 반성을 조금 해봤다. 먼나라 이웃나라라도 읽어봐야하나..


아무튼 위는 그만큼 책을 읽는게 초반에 개인적으로 힘들었음을 토로하고 싶어서 쓴 말이고, 절반을 넘어가서 위 내용들이 어느 정도 적응될 때쯤이면 (특히 중반을 넘어가면) 적어도 '치치스베오'에 대한 기본 배경지식이 쌓이니 읽는데 속도가 붙는다. 기본적인 1차 사료를 기반으로 작성된 책이라 오히려 나중에는 흥미가 더 생긴다.


우선은 존재 자체가 굉장히 흥미롭다. 종종 '시종기사'로 번역된 건 살면서 본 것 같은데, 그냥 수행을 하는 하인이 아니므로(치치스베오 역시 귀족이다.) 적절한 대체 단어가 없는 것 같다. 책을 읽고 나면 왜 치치스베오를 그냥 귀부인의 시종기사나 정부로만 생각할수 없는지 와닿는다. 그냥 이건 두 개가 다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랄까..? 하는 역할을 보면 제2의 남편이나 가족이다. 그렇지만 또 고용형태라던가, 귀속되는 것도 자유롭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귀족 남성이 사회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치르는 교육적 준비단계로도 볼 수 있다.


현대로 따지자면 서로 바람을 피는데 인정해주는 관계? 공인된 오피스 허즈번드 같은 느낌이려나-하고 생각해보지만, 역시 이것도 치치스베오랑은 조금 다르므로, 정말 대체할 단어가 없는 유니크한 관계는 맞는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치치스베오를 단순히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 혹은 정욕의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말 수많은 일화를 제시한다. 뭐라고 딱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이런게 치치스베오구나-하고 알 수 있달까? 치치스베오가 갖는 복합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도 잘 드러낸다.


아무튼, 이 책은 치치스베오의 존재를 18세기의 문화적, 사회적 구조와 연결해서 설명한다. 

여러가지 사료-문학 작품과 여행기, 실제로 치치스베이스모를 행했던 남성과 여성의 편지 등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치치스베이스모를 바라보는 시선이 굉장히 달라서 사료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들도 있다. 다양한 유형, 지역에 따라 다른 확산 정도나 중요성의 차이 등도 상세하게 나온다. 


아래는 나름 책에서 재밌게 읽었던 부분 혹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다.


1. 치치스베오가 등장한 이유 : 프랑스의 영향으로 여성 중심의 사교가 확산되었기 때문 (프랑스 기원설), 치치스베이스모의 발전과 확산 뒤에는 프랑스에서 생겨난 사교 문화의 전파라는 역사적 맥락이 존재한다. 이전에는 가족을 제외한 다른 남자와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사교모임에 나가는 것을 귀부인의 의무가 될 만큼 문화가 바뀐다. 계몽주의의 문화적 분위기는 개인이 자신의 성향을 표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마련해주었고, 이로 인해 여성은 일종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본다.


2. 교회와 관련하여 : 18세기 내내 교회는 치치스베오에 부정적이었다. 그럼에도 현실적 필요 때문에 고해 성사등을 통해 치치스베오와 가톨릭 교리는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다. (귀족들의 의도적으로 관대하고 고분고분한 고해신부 찾아다니기, 귀부인과 치치스베오에게 관계를 끊으라고 강하게 요구하는 고해신부는 많지 않았다는 점 등)


3. 유급성직자(아바테) : 성직자가 치치스베오로 활동했을 가능성(치치스베이스모를 막기 위한 교회의 헛된 캠페인의 모순점이라고 보여짐)

성직자의 수가 증가함은 종교적 소명 의식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가문에 경제적 도움이 될 수 있는 소득을 얻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성직자 중 도시 귀족 출신 비율이 높음)

결혼한 자녀의 수를 줄임으로써 가문의 재산이 여럿으로 쪼개지는 것을 막으려 함이고, 결혼제도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남성이 하나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던 사회적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해석은 굉장히 신선했다. 즉, 인구통계학적 불균형을 초래하는 귀족계급의 유산 상속 관행 및 결혼 전략과 깊은 관계가 있다. 생각해보면, 먹고 살게 충분하고, 치치스베오로 준연애(?)를 할 수 있다면 굳이 결혼에 목멜까..싶어서 이해가 되었다. 요즘도 혼자 충분히 생계가 해결되는 사람들의 비혼율이 높아지는데 이 시대도 그랬구나-싶고.


4. 여성의 정절은 더 이상 귀족 가문의 명예를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결혼 첫해에 낳은 자식일 경우에만 남편이 자기 자식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치치스베오 없이는 1년 이상 견디기 힘들기 때문)


5. 치치스베오가 소멸한 이유 :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져간다. 

낭만주의 시기의 유럽의 정치 문화에서 민족 정체성 건설의 핵심이 된 이념은 '피를 나눈 형제의 어머니'라는 민족 개념. 귀족 계급의 난혼과 다름 없는 치치스베오 관습은 윤리적 관점 뿐 아니라 유전적 관점에서도 하나의 얼룩으로 낙인찍혔다. 가족의 개혁과 결혼비율이 높아지고 민족주의, 성적 순결성이 강하게 통제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조국과 가정을 지키는 영웅의 아내와 어머니인 여성에게는 정절과 순결함이 강조된 반면, 외국의 지배와 갈랑트리의 경박함으로 인해 유약해진 남성에게는 전사로서의 남성성이 강조되었다.

마지막에 보면, 이탈리아인의 남성성이 여럿 언급되는데, 아래의 말을 보면 바로 납득이 된다. 

"자신의 명예에도 관심이 없는 남성에게 국가의 명예를 위해 고역을 겪거나 위험을 무릅쓰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책을 다 읽고 저자인 로베르토 비조키의 프로필을 다시 읽어보니, 이 책은 참 여러가지 연구를 잘 녹여서 쓴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여성사 교재로 쓰기에는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다.


서평 쓰기 어려워서 진짜 간단하게 재독을 두 번 더 했다.

다른 분들의 서평도 여럿 같이 읽어보는 편인데, 유독 서평의 퀄리티가 많이 차이나는 책인 것 같다. 


아무튼,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다른 문학작품을 같이 읽는다면 더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읽는 책의 범위를 조금 더 늘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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