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러하지만 고대시대에 동서양을 불문하고 국가적 대사를 앞 둔 상황에서는 반드시 점을 쳤다. 물론 그 당시에도 점을 친다는 것을 형식적인 행사로 치부한 깬 지식인들도 있었으나
대다수의 국민들이 믿고 있었으므로 민심을 규합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 하였다.
따라서 국가적으로 점을 친다는 것은 실로 중대한 일이었으며, 그 해석 또한 극소수에게만 공개 되었다
즉 국가 통치의 중요한 수단으로써 역할을 한 것이었으므로 일부 지배층에 국한된, 일반인에게는 제한된 영역 이었다
특히 자연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 농경사회였던 고대 중국에서는 점과 같은 주술의 영향이 더욱 컸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고, 실제 갑골문자시대 때부터 점을 치고 난 이후 결과를 기록하여 역사적 문서 형식으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역시 점을 친 기록과, 그 결과를 보관하였으며 긴 역사속에서 동일한 유형의 인과를 발견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이 책 서문에 주역이 귀납적 연역이라고 말한 까닭이다.
과거 점괘와 실제 결과된 현실의 부합 여부를 많은 데이터로 관리하여 그 공통점을 - 물론 다소 억지스러운 공통점일 수도 있다 - 추려 낸 것이므로 귀납적이라고 하는 것이오 그 추려낸 결과를 가지고 미래를 예측 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연역이라는 것이다.
수천 수만가지의 변수가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사회에 있어 과거의 귀납적 결과물이 어느 정도 미래의 예측에 도움이 될지는 나로서는 회의적이지만 그것을 부합시키기 위해서 머리를 쥐어 짜서 음양, 사상, 오행과 연관시켜 팔괘를 만들고 그것을 확장시켜 64괘를 탄생시킨 것은 인문 사상의 꽃이라 부를만 하지 않겠는가?
과거 점괘와 그 결과에 대한 통계작업 및 분석을 했다면 당연히 성공한 일에 대한 괘를 분석하고 그 원인을 돌이켜 보았겠지만 더욱 세밀히 주목했을 것은 실패한 일이었을 것이다.
왜 실패를 미리 예상치 못하고 감행을 했을까 라는 반성이 여러가지 시각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니
필연적으로 과거 점들을 분석한다면 철저한 자기성찰이 올 수 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주역이 철학이 되는 것이 아닌지?
더욱이 시경을 텍스트로 활용했던 공자가 주역 역시 그만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한 십익을 덧붙임으로써 천여년 이상 동아시아 사회에서 굳건한 고차원적인 철학적 사유를 담은 텍스트가 된것은 아닌지?
이제 겨우 팔괘를 공부하고 중천건, 중지곤, 수뢰둔 정도를 읽은 내가 이러한 주장을 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아직까지는 논어나 중용을 읽었을 때 처럼의 깨달음의 환희는 느껴보지 못한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