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가슴의 발레리나
베로니크 셀 지음, 김정란 옮김 / 문학세계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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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 틈바구니에 끼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것이다.

웃기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종족들이 여자들이다.

그런데 그녀들의 글은 수다보다 더 감각적이며 모호하고 애매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이 문학의 거대한 잔칫상에서 말석이라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공감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인지 그냥 어머니와 아내. 딸에 대한 배려인건지

모지리중 하나인 나는 아직도 여전히 그리고 확실히 모르겠다.


중반까지도 재미도 공감도없는 이 책을 그만 던져버리고 대충 서평을 쓰려고도 했는데

대체 무엇을 써야할지 몰라 한챕터씩 더 읽어보게 된 ..근래 드문 일중 하나였고 책였지만 ..

역설적으로 서평을 써야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더 읽다보니 뒤늦은 재미와 몰입이 있었다.


이 소설이 이제껏 본 것중 가장 확실한 페미니즘 소설이구나 싶다.


이 책의 제목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먼가 언밸런스하고 역설적인 상황을 강조하는 뉘앙스다.


사람은 남여불문 되어지고 싶은 것과 되어가는 것의 불협화를 숙명처럼 경험하게 되는 듯 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발레리나를 꿈꾸지만 커져가는 가슴으로 인해 좌절의 예감을 갖게되며

또 그 가슴이 의미하고 지향하는 바를 의식하게 되어가고 경험하게 되는 과정을 자신과 가슴은

따로 국밥처럼 각자의 독백과 별개의 경험으로 처리한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저자가 소녀의 가슴을 의인화해서 가슴의 열망. 희망. 감탄. 열락을 말한 것과는 좀 다르지만

나도 내 페니스가 아침에 텐트를 치거나 하루 첫 소변을 볼 때 또는 비 오는 날 야심한 밤이면

내게 난 오줌만 싸는 수단이 아니란 불평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을 이해하고 소통한다는 일은 자신의 육체를 이해하고 소통한다는 말이기도 한 것일까..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는 내 가슴을 사랑한다. 우리는 끝났다."

소녀적 감성은 이런 상황. 상태를 수용할 수 없으리라.


그럼 나는 그의 시선을 즐긴다. 또는 만끽한다고 말하는 여자들은 변절일까 타협일까 수용일까..


그녀는 늘 부유하는 듯 하지만 젖과 꼭지는 일관되게 빵과 오르가즘을 달라고 요구한다.

육체는 타협해야 할 대상일까 극복해야 할 대상일까..쉰 넘은 나도 아직 해답을 얻지 못한 숙제다.


발레리나를 포기하지 못해 유방 절제술을 경험하고 손목을 그으며 자살까지 시도했지만

우여곡절끝에 다시 솓아오른 젖꼭지들은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를

만끽하고 변조해서 부른다. 페미니즘은 실존주의로 가는 길의 어느 한 정거장일까..


사르트르와 평생의 동반자관계라고 홍보하고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면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보봐르는 말만 그럴싸한 페미니즘의 짝퉁이 아닐까 싶은 의심도 자다 깬 이 새벽에 문득 스쳐간다.


발레리나를 꿈꾸는 여인과 가슴만의 이야기인 소설이지만 한 챕터에 저자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세계가 하나로 이어져 있지 않다는 것. 모든 질문들이 반드시 하나의 대답만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의심이 허용되며, 수련과정은 여러 개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의 미래는 온전히 설계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나는 내가 따라가야 할 방향에 대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라는 것..

그것이 존재한다는 일의 흥미로운 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런 말들은 소녀가 아닌 세월과 굴절. 전락을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알베르 까뮈는 실존의 카오스에 벽을 느끼고 좌절을 맛보는 것으로 그쳤지만

21세기의 실존주의는 카오스 그 너머에 관심과 흥미를 갖는 게 아닐까 ..


무엇을 읽을 것인가는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독자의 몫이라는 말이 생각나게 하는 소설이며

어떤 것은 난해하고 어떤 대목은 이해불가이며 어떤 부분은 공감되는 페미니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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