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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친화력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희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평점 :
첫문장: 에두아르트, 한창 좋은 나이 때의 한 부유한 남작을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괴테는 이렇게 무심히 던져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시 유행했던 화학에서, 친화력이라는 개념을 빌려와 인간은 어떤지 두고보자는 식이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와 선택의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층에 깔린 보이지 않는 어쩔수 없는 힘이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넷이다. 비중있는 주변인들이 있으나, 그들은 일단 미뤄두자.
과거에 사랑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가 다시 혼자가 된 두 남녀의 결합.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
그리고 에두아르트의 친구인 대위.
샤를로테의 친구의 딸인 오틸리에.
이 네 명 사이에 묘한 기류가 생기고, 도덕적으로는 일어나면 안되는 일들이 벌어진다.
괴테는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노벨레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그런 본래적인 의미로는 《선택적 친화력》에도 나타나 있다고 했는데, 소설속에 아주 적절한 상황이 등장한다. 서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하룻밤을 지낸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 사이에 태어난 아이에 관한 것이다. 부부의 모습이 아닌, 대위와 오틸리에를 닮은 아이.
상황마다 이게 뭔가 싶지만, 괴테의 표현대로 한번 읽어서는 찾아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괴테가 더 좋아졌다. 정말 열정과 엉뚱함이 똘똘 뭉친 사람같다는 느낌.
p. 56~57
자연속의 어떤 것들이 서로 만나는 순간 금방 서로를 붙잡거나 서로를 규정하는 경우, 우리는 그것들을 친화적이라고 부르지요. 서로 간에 대립됨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서로 대립되기 때문에 가장 확실하게 서로를 찾고, 서로를 붙들고, 서로를 수정하며 함께 하나의 새로운 물체를 형성하는 알칼리와 산의 경우에 그러한 친화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진정 의미 있는 우정이 생겨날 수 있을테죠. 왜냐하면 서로 대립되는 특성들이 더욱 내밀한 결합을 가능하게 해 주니까요.
p. 79
무언가를 얻는 대신에 무엇을 희생할 것인가를 제대로 헤아린다는 건 참으로 어렵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거부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워! 많은 사람들이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고, 목적은 놓쳐 버린채 수단에 기뻐하지. 온갖 불유쾌한 일이 겉으로 드러나면 그때서야 부랴부랴 치유하려고들 해. 그렇게 된 근원이 어디에 있고 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알아보지도 않고서 말이야. 그래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에는 아주 현명하지만 내일 그 다음의 미래는 거의 내다보는 일이 없는 자들과는 의논하기가 어려워.
p. 111~112
생각해 봅시다. 물행이란 도대체 뭔가요? 조급함이란 녀석이 이따금 인간을 덮치면, 그는 불행하다고 느끼곤 하지요. 하지만 그 순간만 넘기면, 오래 지속되어 왔던 관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알고는 행복해하기 마련이오. 서로 갈라서기에 충분한 이유란 없는 거요. 인간이 처한 상황이란 게 원체 그때마다의 고통과 기쁨에 내맡겨진 것이어서 한 쌍의 부부가 서로에게 얼마나 빚을 지도 있는지는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오. 그것은 영원토록 짊어져야 하는 무한의 빚이지요. 간혹 그 빚이 불편할 수도 있고, 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 보오. 우리는 또한 양심과도 결혼을 한게 아닐까요? 우리는 이따금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하고, 그게 남편이나 부인보다 더 불편할 수도 있지요.
p. 171
마음속에 오랫동안 품고 있던 생각을 갑자기 쏟아 버릴 때 그 말은 무섭기 마련이다.
p. 224~225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상하는 것인지 모르며, 또 언제나 무언가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인간은 오로지 보는 것을 중지하지 않으려고 꿈을 꾼다. 내면의 빛이 일단 우리에게서 비쳐 나온다면, 우리는 더 이상 다른 빛을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p. 226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어느 정도의 불행만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정도를 넘어서는 경우 인간은 파멸하거나 도리어 무심해진다. 공포와 희망이 하나가 되어 서로를 상쇄함으로써 둔탁한 무감각의 상태로 빠져 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