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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동 - 앨빈 토플러
앨빈 토플러 지음 / 한국경제신문 / 199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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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빈 토플러의 저서 <권력이동(Power Shift)>은 지식 기반 정보사회의 도래와 그로 인한 권력 구조의 본질적 변화를 예견한 저작이다. 그러나 학술적 엄밀성과 현실 분석 측면에서 치명적인 한계와 취약점을 지니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을 보면, 토플러는 폭력(Force), 부(Wealth), 지식(Knowledge)을 권력을 구성하는 3대 요소로 규정한다. 특히 과거에는 폭력과 부가 권력의 핵심 원천이었으나, 새로운 정보사회(제3의 물결)에서는 지식이 가장 우월하고 민주적인 권력 자원으로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가오는 시대에는 지식을 가진 자가 부와 폭력까지 통제하게 될 것이며, 권력의 본질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권력이동>의 서술상의 특징과 비판점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기술결정론적 시각과 지나친 낙관주의

토플러는 정보기술의 발달이 민주주의를 촉진하고 수평적인 권력 분산을 이끌 것이라는 다소 순진한 '기술결정론'에 빠져 있다. 정보의 확산이 반드시 권력의 평등이나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전체주의 독재 권력에 의한 정보 독점과 감시 사회의 도래 등 새로운 형태의 권력 집중과 불평등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2. 자본주의적 패권의 맹점

저자는 지식이 기존의 폭력이나 부를 대체하는 새로운 평등한 권력 자원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정보와 지식을 생산·유통하는 인프라는 거대 자본을 쥔 기업들이 과점하고 있다. 즉, 지식 권력은 자본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와 결합하여 오히려 기존의 경제적 불패를 더욱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작동한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3. 자의적이고 모호한 개념 규정

무엇보다도 저자는 '지식(Knowledge)', '권력(Power)'과 같은 핵심 개념을 매우 포괄적이고 모호하게 사용하고 있다. 지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과학적 데이터인지, 단순 정보인지, 사회적 통찰인지)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여 사용함으로써, 학문적 엄밀성과 분석의 날카로움이 떨어진다. 


4. 거시적 예측 중심의 현실성 결여

문명사적 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제3의 물결)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개별 국가의 문화적 특성, 지역적 갈등,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미시적인 권력 투쟁의 역학을 단순화하여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서구 중심적, 특히 미국 중심의 패권적 시각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어 비서구권 국가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를 보인다.


5. 파편적이고 산만한 저널리즘적 서술

전반적으로 이 책은 학술적인 연구서라기보다는 저널리스트 특유의 감각적인 문체와 방대한 사례 나열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정보와 일화들이 산만하게 얽혀 있으며, 체계적인 논리 전개보다는 직관적인 통찰에 의존하고 있어 논리적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들이 산재한다. 


요약하자면, 토플러의 <권력 이동>은 날카로운 미래 예측서라기보다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복잡한 사회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기술적 낙관주의를 포장한 '고급 저널리즘 보고서'의 한계점을 보이는 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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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한 것 뿐이다" 라는 말로 요약되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이 책의 메인 테마다. 


조국, 윤미향, 이재명 같은 정치인의 공통점을 들라면, 법정에서 드러난 빼박 증거에는 묵묵부답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법정 바깥에 나와서는 "나는 단지 정상적인 업무를 지극히 정상적으로 수행하였을 뿐이다."라는 논지를 편다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이 여기서도 드러난다고나 할까.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악의 평범성' 개념을 현대 정치, 특히 일부 좌파 정치인들의 위선과 뻔뻔한 태도에 적용하여 비판할 수 있는 핵심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사유의 불능'에서 '의도적 무사유'로의 확장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마적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상부의 명령을 비판 없이 따르는 '사유하지 않는 능력(무사유)' 때문에 악을 저질렀다고 보았다.

 현대의 위선적인 정치인들은 단순히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영 논리에 갇혀 도덕적 오류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내로남불 논리로 합리화한다. 이는 '사유의 불능'이 아니라 '사유의 거부'이며, 훨씬 더 기만적인 악의 형태일 수 있다. 


2. 관료적 순응에서 '정치적 뻔뻔함'으로의 변질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채, 명령 수행이라는 '관료적 업무'에 충실했다고 한다.

 현대의 일부 정치인들은 자신의 언행이 도덕적, 법적 기준에 위배됨을 알고도, 지지층을 결집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뻔뻔함을 무기로 삼는다. 이는 평범한 관료의 무사유가 아니라, "확신범적인 태도로 위선을 유지하는 행위"인 것이다. 


3. '평범성'이 악행의 면죄부로 악용될 위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다가, 학살의 주범을 경시하거나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이유는 '악은 평범하다'는 논리가 현대 정치에서 위선적인 지도자들이 자신의 중대한 도덕적 결함을 "나도 인간이라 실수할 수 있다", "정치적 모함이다"라며 일상적인 '평범한 오류'로 축소시키는 데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악의 무거움을 '보편적 현상'으로 치환하여 책임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4. 사유하지 않는 죄의 현대적 재해석

 이 책에서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유죄"라고 경고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위선을 인지하지 못하는 뻔뻔한 정치인뿐만 아니라, 진영 논리에 따라 그들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대중 역시 '사유하지 않는 죄'를 공유한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악의 평범성은 지배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위선을 허용하는 사회 시스템 전반에 퍼져 있다는 점에서 더 비판받아야 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악의 평범성' 관점에서 정치인(혹은 진영 논리에 매몰된 일반인)의 위선에 적용한다면, "나치의 폭력은 멈췄으나, 사유하지 않는 맹신과 진영 논리에 기반한 '위선이라는 악'은 오늘날에도 너무나 평범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러한 비판은 아렌트가 말한 "생각하는 능력(thinking)"이 멈춘 자리에 뻔뻔함과 위선이 어떻게 악을 합리화하는지 지적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할 것이다.  


위정자의 범죄 비리들을 묵인하고 옹호하는 무지한 국민들의 "생각없음"이 "악의 뻔뻔함"을 이 땅에 만연하게 만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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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의 쟁취
표트르 알렉세이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여연.강도은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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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크로포트킨의 <빵의 쟁취>는 아나코-공산주의(무정부 공산주의)를 주창한 책으로, 국가 없이도 자발적인 협력과 과학적 생산을 통해 모두가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꿈같은) 비전을 제시한다.

19세기말적 디스토피아 사상의 분출이라는 차원에서 저술된 이 책이 내포한 문제와 비판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주요 내용의 핵심


① 만인의 공유 자산: 인류의 부는 선대의 공동 노력이 쌓인 결과이므로, 소수의 사유재산이 아닌 만인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② 필요에 따른 분배: '능력에 따른 노동'보다 '필요에 따른 분배'를 우선시하며, 식량, 주거, 의복 같은 기본 생존권을 최우선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호 부조(Mutual Aid): 인간은 본래 경쟁보다 협력하는 존재이며, 국가의 강제력 없이도 자발적인 연합(Commune)을 통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2. 서술 및 이론상의 문제점 (비판)


① 지나친 낙관주의와 인간 본성 문제

크로포트킨은 국가라는 억압 기구만 사라지면 인간의 선한 '상호 부조' 본능이 사회를 완벽하게 유지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무임승차자(Free-rider) 문제나 권력욕을 가진 개인들의 갈등을 해결할 구체적인 통제 기전이 부족하며, 이는 현실에서 대규모 사회를 유지하기에는 너무 허황된 꿈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② 경제적 복잡성과 자원 배분의 효율성

그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모두를 위한 풍요'가 즉시 가능하다고 보았으나, 복잡한 현대 산업 사회에서 중앙 집중적 계획이나 시장 기제 없이 오직 '자발적 협의'만으로 수만 가지 물자의 수급을 맞추기란 극히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생산 효율성 저하와 자원 낭비에 대한 경제학적 대안이 거의 고려되지 못하고 있다.


③ 혁명 과정의 폭력성과 혼란

국가를 폐지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반대 세력과의 충돌, 그리고 과도기적 무질서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이 없다. 단순히 "민중이 깨어나면 해결될 것" 혹은 "혁명 이후엔 모든 게 잘될 것"이라는 식의 서술은 정치적 현실주의 관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④ 서술상의 단정적 어조

이 책은 논리적 증명보다는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라는 식의 선언적이고 선동적인 문체가 강하다. 당시의 통계 수치를 인용하며 과학적 근거를 대려 노력하지만, 현대적 시각에서는 특정 사례를 일반화하거나 장밋빛 미래를 확신하는 경향이 짙어 분석적 엄밀함이 상당히 부족하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불평등에 대한 강력한 도덕적 비판과 대안적 삶의 영감을 주지만, 국가와 시장이라는 거대 시스템을 대체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행 모델로서는 너무나 많은 허점과 한계를 지닌 책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정치적 좌파 진영이나 운동권에서는 이 책을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홍길동식 "율도국"에 비견하여, 남한 사회에 사회주의 혁명에 앞서 실행되어야 할 대안 체제로서 무정부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설파한 명작이라고 부추기기도 했지만, 

19세기말 초기자본주의의 겉모습만 보고 인류역사의 방향을 잘못 진단한 허황되고 부실한 졸작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잘못된 역사 진단으로 초래한 해악만큼은 아니지만, 이 책 또한 그에 비슷한 아류작으로서 역사 진단의 실패작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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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한나 아렌트 탄생 120주년 전면개정판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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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한 것 뿐이다" 라는 말로 요약되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이 책의 메인 테마다. 


조국, 윤미향, 이재명 같은 정치인의 공통점을 들라면, 법정에서 드러난 빼박 증거에는 묵묵부답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법정 바깥에 나와서는 "나는 단지 정상적인 업무를 지극히 정상적으로 수행하였을 뿐이다."라는 논지를 편다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이 여기서도 드러난다고나 할까.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악의 평범성' 개념을 현대 정치, 특히 일부 좌파 정치인들의 위선과 뻔뻔한 태도에 적용하여 비판할 수 있는 핵심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사유의 불능'에서 '의도적 무사유'로의 확장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마적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상부의 명령을 비판 없이 따르는 '사유하지 않는 능력(무사유)' 때문에 악을 저질렀다고 보았다.

 현대의 위선적인 정치인들은 단순히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영 논리에 갇혀 도덕적 오류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내로남불 논리로 합리화한다. 이는 '사유의 불능'이 아니라 '사유의 거부'이며, 훨씬 더 기만적인 악의 형태일 수 있다. 


2. 관료적 순응에서 '정치적 뻔뻔함'으로의 변질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채, 명령 수행이라는 '관료적 업무'에 충실했다고 한다.

 현대의 일부 정치인들은 자신의 언행이 도덕적, 법적 기준에 위배됨을 알고도, 지지층을 결집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뻔뻔함을 무기로 삼는다. 이는 평범한 관료의 무사유가 아니라, "확신범적인 태도로 위선을 유지하는 행위"인 것이다. 


3. '평범성'이 악행의 면죄부로 악용될 위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다가, 학살의 주범을 경시하거나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이유는 '악은 평범하다'는 논리가 현대 정치에서 위선적인 지도자들이 자신의 중대한 도덕적 결함을 "나도 인간이라 실수할 수 있다", "정치적 모함이다"라며 일상적인 '평범한 오류'로 축소시키는 데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악의 무거움을 '보편적 현상'으로 치환하여 책임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4. 사유하지 않는 죄의 현대적 재해석

 이 책에서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유죄"라고 경고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위선을 인지하지 못하는 뻔뻔한 정치인뿐만 아니라, 진영 논리에 따라 그들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대중 역시 '사유하지 않는 죄'를 공유한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악의 평범성은 지배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위선을 허용하는 사회 시스템 전반에 퍼져 있다는 점에서 더 비판받아야 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악의 평범성' 관점에서 정치인(혹은 진영 논리에 매몰된 일반인)의 위선에 적용한다면, "나치의 폭력은 멈췄으나, 사유하지 않는 맹신과 진영 논리에 기반한 '위선이라는 악'은 오늘날에도 너무나 평범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러한 비판은 아렌트가 말한 "생각하는 능력(thinking)"이 멈춘 자리에 뻔뻔함과 위선이 어떻게 악을 합리화하는지 지적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할 것이다.  


위정자의 범죄 비리들을 묵인하고 옹호하는 무지한 국민들의 "생각없음"이 "악의 뻔뻔함"을 이 땅에 만연하게 만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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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대학의 운동권에 유독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부류들에는 어떤 특징이 있었다.

주로 정외과, 사학과, 철학과, 사회학과 학생들이 주동을 한다면 그 뒤로 국문과를 위시한 탈춤, 판소리 패거리들이 따라다니는 형국이었달까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상경계열이나 자연과학계열에서의 참여율은 그닥 높지 않았던 것 같다.

 

학생운동을 주동하는 쪽에서는 도서관에서 파묻혀 사는 학생들을 향해 '시대와 민족을 외면하고 개인적 영달을 지향하는 소시민적 반동'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러한 전공별 행태가 갈리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자연과학의 발전사를 돌이켜보면 시대마다 최첨단의 최고 이론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 어떤 이론도 불완전했기에 후속하는 새로운 이론에 의해 대체되거나 폐기되어 왔음이 증명되었다. 만물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었던 무결점의 뉴턴 물리학도 결국에는 근사치에 불과함이 드러났으며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 밀려났음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 어떤 이론도 그 시대의 불완전한 관찰에 근거한 최선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대주의가 모든 과학자들을 어떤 절대주의로부터 탈피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엄밀한 수치적 증명과 결과를 생명으로 하는 경제, 경영 분야에도 적용되어 그 어떤 경제 이론도 완전할 수 없으며 현실에 대한 불완전한 설명은 보다 설명력 있는 더 나은 이론에 의하여 대체된다는 상대론적 사고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런데,

역사학이나 정치철학, 사회학 분야에선 어떤 특정 이론이 힘을 얻으면 여간 해서는 그 권좌를 내주지 않는 것 같은데,

인류의 역사에는 ideal type(이상형) 혹은 prototype(원형) 같은 이상향이 존재하며 그것을 달성하는 것만이 인류의 지상목표여야 한다는 어떤 절대적 당위론이 그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한 이상향은 많은 젊은이들을 매혹시켰는데 그들이 주로 정외과, 사학과, 철학과, 사회학과 같은 전공의 학생들의 성향에 딱 들어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듣기엔 얼마나 멋진 말인가? 만민이 평등하게 잘사는 낙원같은 사회...

 

그에 비하여 자연과학이나 경영경제 분야는 그 어떤 이론도 완전할 수 없고 잠정적 추정에 불과하다는 상대주의 내지는,

모든 이론은 합리적 실험이나 역사적 검증을 거쳐서 보편타당성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합리주의 내지 실증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개인적 견해에 바탕한 '이상론'은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상경계열이나 이공계열 학생들은 그러한 합리성이나 상대주의를 더 많이 습득하고 있었기에 역사적 이상향을 지향하는 '목적론'에 쉽사리 빠져들지 않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어떤 주류의 이론도 절대적 지위를 차지할 수 없는 자연과학이나 경영경제 분야와는 달리문리 사회계열에서는 특정한 이론이 실증적인 결과로 인류사에서 검증되기 어렵기에, 보다 나은 진리에 의해 폐기되는 일 없이, 여전히 매력있는 이론으로 살아남아서 교과서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칼 포퍼는 소위 진보주의 역사관이나 이상주의 역사관에 대하여 "반증가능성의 부재"라는 치명적인 허점을 파악하여 철저히 공격하였다.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유토피아적 사회철학이 그렇게 매력 있게 느껴지는 건 자연과학이나 경영경제 분야에서처럼 실증적 결과로 검증되지 않기 때문이다.(구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의 붕괴로 역사적 검증이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한데, 아직도 많은 사람이 중국이나 북한을 마지막 모델로 삼으며 생명을 이어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젊은 날 한때에 최고의 이상을 향해 열정을 바치는 건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이해가 간다마는, 지천명을 지나서까지도 그러한 절대주의적 사고에 매여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을 보면 연민마저 생긴다.

(그들도 이 모든 사정을 알 것이다. 다만 그 '진영'에 이미 올인해버린 인생이라 일가족의 생계가 딸린 마당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플라톤에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상사에서 면면히 내려온 전체주의적 유토피아 사상의 허구성을 철저히 까발리고 비판한다. 역사적 검증 없이 인류의 사상사를 유혹하고 왜곡해 온 진보주의 역사관의 허구성을 만천하에 고발하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한물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한국은 사상사면에서 서구에 1백년 이상 뒤처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 무지한 백성들이여. 아직도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이 책을 읽고 부디 그 단순무지한 꿈을 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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