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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의 쟁취
표트르 알렉세이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여연.강도은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6년 5월
평점 :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빵의 쟁취>는 아나코-공산주의(무정부 공산주의)를 주창한 책으로, 국가 없이도 자발적인 협력과 과학적 생산을 통해 모두가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꿈같은) 비전을 제시한다.
19세기말적 디스토피아 사상의 분출이라는 차원에서 저술된 이 책이 내포한 문제와 비판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주요 내용의 핵심
① 만인의 공유 자산: 인류의 부는 선대의 공동 노력이 쌓인 결과이므로, 소수의 사유재산이 아닌 만인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② 필요에 따른 분배: '능력에 따른 노동'보다 '필요에 따른 분배'를 우선시하며, 식량, 주거, 의복 같은 기본 생존권을 최우선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③ 상호 부조(Mutual Aid): 인간은 본래 경쟁보다 협력하는 존재이며, 국가의 강제력 없이도 자발적인 연합(Commune)을 통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2. 서술 및 이론상의 문제점 (비판)
① 지나친 낙관주의와 인간 본성 문제
크로포트킨은 국가라는 억압 기구만 사라지면 인간의 선한 '상호 부조' 본능이 사회를 완벽하게 유지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무임승차자(Free-rider) 문제나 권력욕을 가진 개인들의 갈등을 해결할 구체적인 통제 기전이 부족하며, 이는 현실에서 대규모 사회를 유지하기에는 너무 허황된 꿈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② 경제적 복잡성과 자원 배분의 효율성
그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모두를 위한 풍요'가 즉시 가능하다고 보았으나, 복잡한 현대 산업 사회에서 중앙 집중적 계획이나 시장 기제 없이 오직 '자발적 협의'만으로 수만 가지 물자의 수급을 맞추기란 극히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생산 효율성 저하와 자원 낭비에 대한 경제학적 대안이 거의 고려되지 못하고 있다.
③ 혁명 과정의 폭력성과 혼란
국가를 폐지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반대 세력과의 충돌, 그리고 과도기적 무질서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이 없다. 단순히 "민중이 깨어나면 해결될 것" 혹은 "혁명 이후엔 모든 게 잘될 것"이라는 식의 서술은 정치적 현실주의 관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④ 서술상의 단정적 어조
이 책은 논리적 증명보다는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라는 식의 선언적이고 선동적인 문체가 강하다. 당시의 통계 수치를 인용하며 과학적 근거를 대려 노력하지만, 현대적 시각에서는 특정 사례를 일반화하거나 장밋빛 미래를 확신하는 경향이 짙어 분석적 엄밀함이 상당히 부족하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불평등에 대한 강력한 도덕적 비판과 대안적 삶의 영감을 주지만, 국가와 시장이라는 거대 시스템을 대체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행 모델로서는 너무나 많은 허점과 한계를 지닌 책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정치적 좌파 진영이나 운동권에서는 이 책을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홍길동식 "율도국"에 비견하여, 남한 사회에 사회주의 혁명에 앞서 실행되어야 할 대안 체제로서 무정부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설파한 명작이라고 부추기기도 했지만,
19세기말 초기자본주의의 겉모습만 보고 인류역사의 방향을 잘못 진단한 허황되고 부실한 졸작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잘못된 역사 진단으로 초래한 해악만큼은 아니지만, 이 책 또한 그에 비슷한 아류작으로서 역사 진단의 실패작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