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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꿈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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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기다렸어요!!!! 연작으로 묶여서 더욱 즐겁게 읽었습니다. 단편 하나하나 재밌고 소소한 연결점을 찾는 즐거움이 있는 소설집이었어요. <불장난>의 양우정이나 <이사>의 언니 같은 캐릭터들이 매력적이어서 좋았어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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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레모사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8
김초엽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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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초엽 작가님 신간. 김초엽을 사랑하는 친구에게 선물 받아서 읽게 되었다. 가장 눈이 갔던 두가지는 표지 일러스트와 장르였다. 현대문학 핀시리즈의 이번 일러스트는 이동기 작가님. 미술관에서만 보던 그림을 서점 매대에서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이동기 작가 특유의 색감, 아토마우스 캐릭터가 책을 돋보이게 해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용과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표지에 일러스트를 넣고 뒷표지와 책등에 강한 색을 넣는 방식이 여러모로 책을 주목받게끔 하는 것 같다. 두번째로 장르. 이 소설이 호러,공포 소설로 분류되어 있는 걸 보고 흥미가 더 높아졌다. 내가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탓도 있고, 김초엽 작가님이 쓰는 호러 소설은 어떨지 기대도 됐다. 

  소설의 제목인 므레모사는 지역명이다. 주인공인 유안을 비롯해 헬렌, 레오, 쿤, 이시키와, 주연은 므레모사 투어에 참가한다. 므레모사는 화학물질 유출 사고로 금지구역이 된 지역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다시 삶을 꾸리러 온 '귀환자'들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므레모사 투어가 시작되면서 므레모사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다.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크 투어리스트, 유투버, 기자, 학자 등 므레모사에 닥친 비극과 그 참극을 보고싶어하는 사랆들이다. 주인공인 유안은 의족을 단 무용수이다. 다른 참가자들은 유안이 폐허 속 희망, 회복 같은 것을 보러 왔다고 생각하지만 유안은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유안은 이곳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남들과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듯한 레오의 계획에 끌려들어가며 므레모사의 실체에 점점 가까워진다. 므레모사의 원주민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신체적 변화를 겪었다. 그들은 느리게 움직이고 딱딱한 나무처럼 변해갔다. 그들은 알 수 없는 향기와 세뇌로 의료진과 자원봉사자, 그리고 이번 투어로 유입된 사람들까지 자신의 삶을 도와줄 귀환자로 만들어버린다. 그들은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세뇌하고 착취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유안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원했던 것은 죽음이나 회복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유안의 전 애인이자 재활 치료사인 한나는 늘 유안에게 회복을 강조했다. 살아있는 것은 곧 움직이는 것이라는, 유안의 회복을 말하는 한나 곁에서 유안은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잘린 다리가 아직 느껴진다는 말도 하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한나의 기준에 맞춰 회복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행동한다. 유안이 다시 춤을 추고 움직이지 못하면 한나의 입장에서 그것은 강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으며 죽은 것과 다름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안은 그 자리에 뿌리박혀 있으면서도 존재하고 살아있는 귀환자들을 목격했다. 유안에게 보여준 한나의 사랑은 진실했을지 몰라도 한나는 유안의 삶을 이해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재활 치료사인 한나가 회복, 이전과 같은 삶을 사는 일에 집중한 것은 이해할만하다. 그것이 그의 직업이니까. 하지만 유안에게 사고 이전으로 완벽하게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했고 그것을 소망하지도 않았다. 춤을 추지 않아도, 걷기를 좋아하지 않아도,, 잘린 다리의 감각을 지니고도 계속 살아갈 방법이 필요했다. 유안과 한나의 이해가 어긋나는 곳에서 이런 그로테스크하고 극단적인 결말이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상을 비정상, 비일상으로 규정하고 극복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수용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가능성의 모색이 필요했던게 아닐까. 기형의 신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것, 수많은 상처와 상해로 빚어진 삶을 이해하는 것이 폐허가 된 므레모사에 남겨진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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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레플리카
윤이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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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딸기에게는 루카이고 아버지에게는 예성이다. ‘오직 하나뿐인 진짜 이름 같은 건 세상에 없다는 소설 속 말처럼, ‘의 이름은 하나가 아니며 타인과의 관계에 따라 이름은 바뀔 수 있다. 여기서 가 갖는 다양한 이름은 한 개인이 가진 다양한 정체성으로 볼 수 있다. ‘는 가족들에게는 예성이었을 것이고 딸기를 비롯한 퀴어 커뮤니티 사람들에게는 루카였을 것이며 강사로 일하던 학원에서는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또 아침마다 찾아가는 영화관에서는 관객 중 하나로 존재했을 것이며 이 밖에도 무수히 많은 관계 속에서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다양한 이름을 가진 한 인물에 대한 소설인 루카에는 정작 루카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의 화자 딸기는 루카의 아버지와 만난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 예성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딸기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루카와의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루카와 자신의 관계를 설명한다. ‘의 목소리는 직접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아버지의 말에서 예성, 딸기의 말에서 루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예성은 기독교인이면서 클로짓 게이이고, 가족들에게 커밍아웃 하지 못한 채 아웃팅 당했다. 목사인 아버지는 예성을 죽은 사람 취급했다. 아버지의 삶에 주어진 이념과 삶의 방향은 기독교였고 그 기독교는 동성애를 죄악으로 취급했다. 예성은 기독교 사회에서 완벽한 타자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와 성령을 조합한 이름을 가지고도, 목사인 아버지를 두고도, 그의 성적 지향 하나 때문에 그는 타자가 되었고 배척당했으며 치료와 교정의 대상처럼 다루어졌다. 아버지가 예성을 죽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런 이념과 기존 삶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예성은 실제로 죽지 않았기에, 그의 아버지가 예성을 죽은 사람으로 여기는 일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무서움에 시달리며 예성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밝히기 이전의 예성이 어떤 아들이었는지 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주체는 타자를 상상할 능력이 없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예성의 아버지는 이전까지 한 번도 현실의 동성애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와 나름의 원리 안에서 악마화된 모습의 동성애자 이미지를 그려냈고, 그렇기 때문에 예성이라는 구체적이고 가까운 사람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예성이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예성이 아닌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아버지는 딸기를 찾아와 자신이 모르는 예성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아버지의 이런 시도는 예성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자기 마음대로 예성을 죽이고 그렇게 살아있는 아들을 죽인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알 수 없기 때문에 딸기에게 예성이 누구인지, 딸기의 곁에 있던 루카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듣는 것만으로 예성을 다시 살려내려 하는 것은 너무 쉽고도 시혜적이며, 누군가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기득권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딸기는 이런 예성 아버지의 발언에 분노하면서도, 자기 자신 역시 루카에게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음을 상기한다. 가족들과 기독교 공동체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예성에게 자신이 내내 소속되어온 공동체 그리고 믿음과 기도는 하루아침에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렇게 그는 기독교인이면서 퀴어인 존재로 남는다. 그리고 딸기는 이런 루카를 이해하지 못한다. 딸기는 자신이 루카의 사회에 유일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딸기의 사회에서 유일한 시민은 루카이기 때문에. 하지만 루카라는 한 사람 속에서 가족, 친구, 지인, 더 나은 삶을 모두 찾고 구한 딸기의 선택은 옳은 것일까. 루카에게는 가족이 필요했고, 교회가 필요했고 딸기가 없는 다른 삶도 필요했다. 딸기는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루카가 교회에 간다고 생각이 들 때마다 루카가 자신을 떠나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고 말한다. 딸기는 자신의 연인 루카가 가진 모든 부분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고, 루카 역시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아무리 연인이라 해도 한 사람의 모든 부분을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당연함을 인정해야 했으나, 딸기는 그럴 수 없었다. 이런 불일치를 통해 루카는 기독교라는 하나의 원리에서뿐만 아니라 딸기와의 관계에서도 타자가 된다. 딸기의 사회에서 단 하나뿐인 시민이 되기 위한 조건은, 루카가 딸기를 단 한 명의 시민으로 받아들인 채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었지만 루카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딸기가 루카의 어떤 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루카 역시 딸기의 어떤 부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딸기는 이런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는 부분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기에 그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네가 왜 루카인지 묻지 않았고 결국 루카와 딸기의 관계는 시들어갔다.

  아버지와 딸기는 공통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켰고 각자 사랑하는 아들 예성이와 연인 루카를 잃었다. 아버지는 종교를, 딸기는 자신의 사랑과 삶을 믿었고 그 둘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보는 의 모습이 의 전부라고 믿었다. 아버지는 예성이라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라는 인물이 벗어날 때 불안을 느꼈고 딸기는 루카라는 이름의,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에서 가 벗어나려고 할 때 불안을 느꼈다. 아버지는 결국 신에 대한 믿음을 깨고 자신이 모르는 예성에게 한 걸음 다가가려 한다. 한편 딸기는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루카를 잃었다. 아버지와 딸기가 믿음을 버리거나 지킨 것에 대해 옳다 그르다 평가할 수 있을까. 윤리가 지향하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말 그대로 이상이다. 지향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완전히 실행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딸기의 말처럼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아버지와 딸기가 가진 기존의 지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던 는 존재 자체로 아버지와 딸기의 삶에 하나의 빈 공간으로 남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딸기는 루카에게 그런데 루카, 너는 어떠니. 너는 그곳에서 평안하니.”라고 묻는다. 하지만 루카의 대답은 들을 수 없다. 루카는 이 소설에서 시점을 부여받지 않은, 빈 공간으로 남겨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데, 이는 라는 인물이 거대담론에 목소리를 빼앗긴 서발턴임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는 오직 타자에 의해 명명되고 설명되는 방식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게 된다. ‘루카로서의 의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음에도 이 소설의 제목이 루카인 이유는 중심이 되는 화자가 딸기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주요 화자로 등장했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예성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 주요 화자로 등장하게 된다면, 타자가 아닌 주체의 자리에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어떻게 바뀔까. ‘는 루카, 예성 그리고 또 어떤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명명하게 될까. 무수한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소설 속에서 의 빈자리는 그저 빈 것으로 남겨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제든 스스로 그 자리에,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이름을 채워 넣을 수 있도록 그저 빈 공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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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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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역설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의 첫 번째 역설은 이 소설이 채식주의자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공 영혜는 끔찍한 꿈을 꾼 이후 육식을 거부하게 된다. 영혜의 주변인들은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에 주목하지만 영혜의 지향점은 단순히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지향점은 아무 것도 해치지 않는 삶이다. 결국 그녀는 채식조차 거부하고 자신의 몸에 영양제를 투여하여 생명을 연장 시키려는 의료진을 밀어낸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 식물이 되고자 했지만 가족들은 자신에 대한 폭력을 멈추지 않는다. 아버지의 폭력에서 저항하다 자해를 하고, 형부와 섹스를 한 이후 벌어지는 일들은 영혜로 하여금 인간이 살아있는 한 완전한 비폭력-여기서의 비폭력은 폭력을 가하지 않는 것과 폭력 당하지 않는 것 둘 다를 의미한다-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영혜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녀와 상호작용하고, 관계 맺는 사람들은 폭력에 매몰되어 있는 세속적인 인간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영혜는 언니 인혜에게 상처를 주는 등의 일을 겪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한 비폭력과 식물성을 지향한 영혜의 결말은 죽음일 수 밖에 없다. 영혜는 꿈을 통해 어릴적 아버지에게 당했던 가정 폭력이 자신이 동물에게 가하는 폭력과 별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채식을 지향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혜는 그다지 이타적인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채식을 지향하게 된 이유는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거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의 결정과 생각을 전혀 지지해주지 않으며 오히려 그녀를 미친 사람 취급한다. 해치지 않는 삶을 지향하려는 영혜는 결국 또 다시, 가족들에 의해 폭력의 피해자로 전락하고 그녀 자신이 받은 피해를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휘두른다. 채식주의자후반부에서 영혜의 자해는 타인을 해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해칠 수 밖에 없는 비극적인 선택으로 해석된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영혜의 지향점이 채식이 아니었고, 어떤 신념에 의해 행해진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의라는 말을 쓸 수 없으며 영혜가 인간이 아닌 식물의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라는 말도 쓸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왜 채식주의자일까?

  이 소설의 제목에 관해서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이 소설의 시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채식주의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시점의 변화이다. 채식주의자1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진행되며 내적 초점화, 복수 초점화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혜의 남편이 중심 서술자가 되며 영혜의 목소리는 그의 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만 등장한다. 몽고반점은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진행되며 영혜의 형부에게 고정 초점화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무불꽃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 영혜의 언니인 인혜가 고정 초점화자로 등장한다. 세가지 이야기가 합쳐져 채식주의자라는 장편 소설이 되고 이 소설의 전체적인 시점은 변동 초점화로 볼 수 있다. 각각 다른 인물이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느끼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영혜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통합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소설의 두 번째로 역설적인 점이 발견된다. 이 소설은 영혜의 이야기이지만 영혜의 목소리로 서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혜는 이 소설에서 삭제된 존재로만 존재하며 영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혜의 주변 인물들의 서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불완전한 이해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과 아주 닮아있다. 특정 개인을 이해하려 할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분류하려 할 것이다. 이는 영혜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같다. 작가는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빈 공간으로 남겨두는 방식을 통해 인간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함을 이야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또 다소 독특한 인물인 영혜가 아닌, 상대적으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주변인들의 눈을 통해 영혜를 서술함으로써 독자가 서서히 영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은 곧 이 소설의 제목인 채식주의자와 연결된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영혜가 아닌타인들이 영혜에게 붙일 수 있는 최선의 호칭은 채식주의자에서 그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영혜의 내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이해하려 하지도 않았고) 표면으로 드러난 채식만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연작 소설의 제목이 채식주의자인 것은 이 소설이 영혜의 시점이 아닌 타인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영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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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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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은 해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해언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레몬은 시간의 흐름과 시점 전환에 따라 총 8가지 이야기로 구성된다. 해언이 죽은 2002년부터 2016년까지 다언, 상희, 태림의 시점이 번갈아 등장하며 해언의 죽음 이후를 이야기한다. 소설의 모든 이야기는 해언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해언은 이 소설에서 삭제된 존재이다. 모두가 해언의 죽음에 관심을 가졌지만 아무도 해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 아이들은 해언이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해언을 죽였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바빴고 다언과 엄마는 해언을 애도 할 수 없었다. 애도는 죽음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언의 죽음 이후 계속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은 해언 이외의 사람들이기에 작가는 해언이 아닌 사람들로 하여금 해언의 죽음에 대해 설명하도록 한다.

  해언의 죽음은 해언의 주변부에 존재하던 모든 삶을 파괴시켰다. 동생 다언은 해언의 사진을 들고 가 성형을 하고 엄마는 해언을 대신할 새로운 아이 혜은을 기른다. 경찰에 의해 용의자로 지목된 만우도, 해언을 차에 태웠던 정준 그리고 그의 여자 친구 태림도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과 해언의 죽음을 끝없이 연관시킨다. 해언의 죽음은 주변의 삶을 모두 파괴해버린다. 소설의 초점 화자로 등장하는 다언, 상희, 태림은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태언의 죽음을 회상하고 그 이후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물 개인의 입장에서 서술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내적 초점화에 해당한다. 다언, 상희, 태림 각자가 보고 느낀 것들이 모여 해언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 이해로 통합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에서는 변동 초점화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이 해언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 서술하기 때문에 복수 초점화가 나타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작가는 해언을 제외한 이들의 서술에 주목하는 다성적 시점을 통해 해언의 죽음에서 해언이 빠져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동생 다언이 언니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이 등장하지만 다언 자신의 입장에서 설명하기 때문에 해언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해언의 죽음으로 인해 조금씩 어긋난 삶을 살게 되었고 그것이 죽음때문이라는 것은 알지만 정작 죽음의 당사자인 해언을 잊고 있다.

  태림이 박사와 상담하는 부분에서 그녀는 박사에게 <애도,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해언을 애도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신을 믿고, 신에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만우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해언을 애도할 수 있게 된 다언은 신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장편 개작 이전 소설의 제목인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와 연결된다. 다언은 상희와의 대화 속에서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언은 인간이 삶에서 겪는 불행, 재앙을 비롯한 모든 것은 신의 섭리가 아니라 신의 무지라고 말한다. 인간이 신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신은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신에게 의지하고 신을 믿는 태림은 끝까지 해언을 애도하지 못한다. 한편 신을 믿지 않는 다언은 이 모든 것을 신의 섭리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신의 무지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는 신도 알지 못하는, 개인의 삶을 알기 위해 힘쓴다. 다언은 유력한 용의자라는 이름에 가려졌던 한만우 개인의 삶에 한 발짝 다가서고 그의 삶을, 그가 살아온 삶의 흔적과 경험을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마침내 그의 언니 해언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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