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역설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의 첫 번째 역설은 이 소설이 채식주의자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공 영혜는 끔찍한 꿈을 꾼 이후 육식을 거부하게 된다. 영혜의 주변인들은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에 주목하지만 영혜의 지향점은 단순히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지향점은 아무 것도 해치지 않는 삶이다. 결국 그녀는 채식조차 거부하고 자신의 몸에 영양제를 투여하여 생명을 연장 시키려는 의료진을 밀어낸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 식물이 되고자 했지만 가족들은 자신에 대한 폭력을 멈추지 않는다. 아버지의 폭력에서 저항하다 자해를 하고, 형부와 섹스를 한 이후 벌어지는 일들은 영혜로 하여금 인간이 살아있는 한 완전한 비폭력-여기서의 비폭력은 폭력을 가하지 않는 것과 폭력 당하지 않는 것 둘 다를 의미한다-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영혜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녀와 상호작용하고, 관계 맺는 사람들은 폭력에 매몰되어 있는 세속적인 인간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영혜는 언니 인혜에게 상처를 주는 등의 일을 겪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한 비폭력과 식물성을 지향한 영혜의 결말은 죽음일 수 밖에 없다. 영혜는 꿈을 통해 어릴적 아버지에게 당했던 가정 폭력이 자신이 동물에게 가하는 폭력과 별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채식을 지향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혜는 그다지 이타적인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채식을 지향하게 된 이유는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거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의 결정과 생각을 전혀 지지해주지 않으며 오히려 그녀를 미친 사람 취급한다. 해치지 않는 삶을 지향하려는 영혜는 결국 또 다시, 가족들에 의해 폭력의 피해자로 전락하고 그녀 자신이 받은 피해를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휘두른다. 채식주의자후반부에서 영혜의 자해는 타인을 해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해칠 수 밖에 없는 비극적인 선택으로 해석된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영혜의 지향점이 채식이 아니었고, 어떤 신념에 의해 행해진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의라는 말을 쓸 수 없으며 영혜가 인간이 아닌 식물의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라는 말도 쓸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왜 채식주의자일까?

  이 소설의 제목에 관해서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이 소설의 시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채식주의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시점의 변화이다. 채식주의자1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진행되며 내적 초점화, 복수 초점화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혜의 남편이 중심 서술자가 되며 영혜의 목소리는 그의 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만 등장한다. 몽고반점은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진행되며 영혜의 형부에게 고정 초점화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무불꽃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 영혜의 언니인 인혜가 고정 초점화자로 등장한다. 세가지 이야기가 합쳐져 채식주의자라는 장편 소설이 되고 이 소설의 전체적인 시점은 변동 초점화로 볼 수 있다. 각각 다른 인물이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느끼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영혜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통합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소설의 두 번째로 역설적인 점이 발견된다. 이 소설은 영혜의 이야기이지만 영혜의 목소리로 서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혜는 이 소설에서 삭제된 존재로만 존재하며 영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혜의 주변 인물들의 서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불완전한 이해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과 아주 닮아있다. 특정 개인을 이해하려 할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분류하려 할 것이다. 이는 영혜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같다. 작가는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빈 공간으로 남겨두는 방식을 통해 인간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함을 이야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또 다소 독특한 인물인 영혜가 아닌, 상대적으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주변인들의 눈을 통해 영혜를 서술함으로써 독자가 서서히 영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은 곧 이 소설의 제목인 채식주의자와 연결된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영혜가 아닌타인들이 영혜에게 붙일 수 있는 최선의 호칭은 채식주의자에서 그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영혜의 내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이해하려 하지도 않았고) 표면으로 드러난 채식만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연작 소설의 제목이 채식주의자인 것은 이 소설이 영혜의 시점이 아닌 타인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영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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