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부터 끝까지 이미지한강 특유의 강렬한 이미지여운이 정말 긴 책이다.


3분마다 손가락을 바늘로 찔려야 하는 인선.

인선의 새를 살리기 위해 눈길을 헤치는 경하.

인선의 엄마가 보았던 죽은 사람들의 차가운 뺨.

땅에 묻었던 새 아마의 그림자.

4.3 사건 때의 제주도를 말하는 인선의 테이크.

경하가 붙들고 있던 촛불과,

하늘에서 끝없이 내리는 눈.


책을 읽지만 영화를 보는 것 같다소설을 읽지만 역사를 보는 것 같다문학만이 기록할 수 있는 역사를 써내려가는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어진다. 인선의 어머니가 겪었던 고통을 누구도 다시는 겪지 않도록 돕고 싶어진다.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엔딩곡은 콜드플레이의 <Yellow>가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새가 있어.


손끝을 건드리는 감각이 있다.

가느다란 맥박처럼 두드리는 게 있다.

끊어질 듯 말 듯 손가락 끝으로 흘러드는 전류가 있다. (138)


이념 갈등으로 턱밑에 들이닥치는 총칼마을에 들어선 군인과 경찰들은 눈과 닮았다무자비할 정도로 멈추지 않고 내리는 눈어떤 설득도 애원도 통하지 않는 대자연의 위력 앞에 무너지는 것이 인간이지만하지만 새가 있어,라며 다시 일어나 눈길을 헤쳐나가는 것도 인간이다괜찮아나한테 불이 있어말하며 손을 뻗는 것도 인간이다불가항력과도 같은 폭력과 위협을 견뎌내는 것도 다 인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삶과 작별하기를 택한다소설 전반부의 경하처럼 유서를 날마다 썼다 지우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하지만 살려야 할 새를 기억할 때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떠올릴 때 우리는 작별하지 않기로 선택할 힘을 얻는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자 바다를 보러 가고 싶었다바다는 너무 멀어서 대신 한강을 보러 밤산책을 나섰다밤에 강물을 쳐다보고 있자니 그대로 걸어 들어가서 나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어둑하고 뿌연 강 건너편에서 빛나는 도시의 불빛 때문에 강 속에도 또 하나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밤의 강물은 그만큼 매혹적이지만 나는 들어가지 않는다나를 유혹하는 강에게나는 들어가지 않아나는 계속 살아갈 거야속삭였다기억해야 할 과거가 있고 맞이해야 할 내일이 있다나에겐 새가 있다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한강 작가님은 작가의 말에서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했다어떻게 아닐 수 있겠는가지극한 사랑이 아니라면무엇에 대한 소설이겠는가.




https://www.youtube.com/watch?v=yKNxeF4KMsY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가인 주인공 가 무언가 쓰려고 할 때마다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가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주인공은 그것을 어릴 때 씐 혼의 흔적으로 여기며 이 목소리 때문에 실제로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이것이 원한이고 악의라고, 주인공은 생각했다. 나는 귀신에 씐 적이 없는데 주인공이 듣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한때 내가 나에게 하던 말과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주인공이 진에게 대불호텔이라는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인천에 가봐야겠다고 할 때에도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선택은 실수라고, 거기에 가면 소중한 사람을 잃고 말 거라고. 그러나 주인공은 과감히 인천으로 출발한다. 대불호텔 터를 목표로 출발한 여정은 진의 외할머니까지 흘러간다. 주인공은 박지운으로부터 고연주, 지영현, 뢰이한, 셜리 잭슨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 넷의 이야기에도 원한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악의로 가득한 이 목소리는 대불호텔을 떠나고 싶어 하는 연주의 발을 묶고, 대불호텔에 남고 싶어 하는 영현의 등을 떠민다. 사람들이 뢰이한에게 돌을 던지게 하고, 셜리를 날마다 메말라가게 한다. 날이 갈수록 넷은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신하고, 미워하고, 헐뜯는다. 대불호텔에 무언가 있는 것 같다고 그들은 입을 모았지만,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 사람들이 말하는 유령은 각자 오랫동안 속에 지니고 있던 무언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대불호텔은 사람들을 떨어뜨려놓아요. 하나씩, 하나씩, 찢어놓죠. 현실을 알려주는 거예요.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을 드러내는 거예요. 혼자 남게 되는 것. 나의 이야기를 오직 나에게만 하게 되는 것. (207)

 


무언가에 간절해지면, 이상하게도 그 간절함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함께 자라난다. 연주는 미국으로 떠나길 간절히 원했지만, 그만큼 떠나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다. 영현은 호텔에 남아 평생 이렇게 살길 바랐지만, 동시에 쫓겨날 날을 두려워했다. 공포는 모이고 모여 하나의 실체가 되었고, 연주와 영현을 쫓아다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절대 얻지 못할 거라고 속삭였다.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스스로에 대한 악의는 반드시 따라온다.

 

한번은 친구 C와 통화를 하다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C에게 지금부터 하고 싶은 걸 하나둘씩 해보면서 살면 어떠냐고 했다. C, 근데 난 너무 늦었어, 라고 답했다. 해외에 나가서 공부하는 것도,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지금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나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우린 고작 스물몇 살인걸, 하며 C를 설득했지만 C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또 한번은 친구 J가 자기는 사랑받을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내가 어벙한 채로, 지금 내가 널 사랑하고 있는걸, 넌 아주 사랑스러워, 대답하자 J는 지금이야 그렇지만 나중엔 지쳐 그만둘 거라고 말했다. J는 그 말을 실현시키고야 말겠다는 듯 점차 내 마음을 외면하고 부정했다. 계속해서 날 밀어내는 J에게 힘들다고 말하자 J, 그것 봐, 난 사랑받을 수 없다니까, 못을 박고 떠났다.

 

뢰이한을 한때 너무 사랑해서 미워하는 박지운처럼, 진을 진심으로 좋아해서 마음을 부정하던 주인공처럼, 사람 마음엔 항상 사랑과 증오가 공존한다. 둘 중 무엇에 귀 기울일지는 본인의 몫이다. 대불호텔에는 유령이 있다고, 원한의 혼이 산다고 말하지만, 사실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 사람 중에서도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품은 원한과 악의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영 스스로 걸어놓은 저주 아래서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참된 공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