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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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이 책을 읽었다. 상투적으로 끔찍한 유대인 고문과 학살의 고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문에서 저자는 말하고 있다. 유대인학살에 대한 끔찍한 고발은 이미 여러 책이나 영화에서 했기에 이 책에서는 극한의 한계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은 의미를 발견하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관찰한다고 하였다.  

이 책은 심오한 주제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쉽게읽혀지고 '내 이야기'처럼 공감하게 되는 점들이 있다. 감옥안에서의 유머와 예술과 사랑의 스토리는 감동적이다. 쓰레기에서 장미가 피어나듯, 절망가운데 인간의 영혼이 솟아나, 인간의 존엄성이 꽃피는 것을 볼 때에 감동....전율...경외감을 느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솟나' '참나'를 발견한 사람이라고 부르리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정신과의사이지만, 동시에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차별되는 로고테라피를 그 감옥에서 창안해 내었다. 과거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미래에 초점을 두고, 환경에 결정된 인간이 아니라 책임적인 선택으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인간의 존엄섬,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빅터 프랭클이 실존사상을 인간치유의 심리학으로 응용했다는 사실에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존주의철학의 용어인 의지, 선택, 책임, 자유, 역설 등의 용어를 놀라울 정도로 실용적인 정신치료법으로 적용시켰다. 역설치료법, 과잉투사의 해법 등을 제시하는데 놀랍다. 단지 <수용소에서의 경험>뿐 아니라 <로고테라피의 기본개념> <낙관속에서의 소망> 등의 주제 등 경험과 그에 근거하여 창안한 정신치료법을 제시하는 풍성함을 제공한다.  

두고 두고 읽고 또 읽고 싶은 책이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군생활이 나에게 주었던 놀라운 체험들을 재해석하는 유익을 누릴 것이다. 고난을 통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고난의 의미, 시련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리라. 개인적인 컴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극복하는 간단하지만 오랫동안 유효한 방안을 발견하리라. 번역자가 이시형박사다. 사회에 공명을 일으키는 정신과의사로 알고 있다. 그가 저자를 각별히 생각하고 존경하는 것이 이 번역을 더욱 좋은 번역이 되게 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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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쇠얀 키에르케고어 시리즈 7
쇠얀 키에르케고어 지음, 임춘갑 옮김 / 치우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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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키르케고르를 이해하는 데 뜻 깊은 책이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1번 질문은, "키르케고르는 공동체를 무시하지 않느냐?" 그는 외골수, 단독자, 외톨이가 아닌가? 이런 질문이다. 《사랑의 역사》(1847)가 특별한 이유는, 그가 공동체를 무시하는 사상가가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의 역사에 관한 성찰

키르케고르는 특이하다.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믿음의 속성을 말한다.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속성을 말한다. 기독교의 내용을 말하기 보다는, 그 내용을 어떻게 내 것으로 삼는지를 말한다. 사랑의 역사, '역사'는 history가 아니라 work이다. 사랑이 어떻게 일하는가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사랑의 역사, 2가지 측면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사랑의 역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사랑은 형언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무궁무진하시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다. 루터가 비록, 행위로 구원을 살 수 없다고 했지만, 루터는 사랑에 기반한 행위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열매임을 말했다. 이 책은 예수님의 '위대한 명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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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 / 현대의 비판 쇠얀 키에르케고어 시리즈 5
쇠얀 키에르케고어 지음, 임춘갑 옮김 / 치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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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생은 공허하고 무의미한 소리로 용해된다. 시간을 통한 실존의 연속성은 "반복"을 영원성의 문제로 만든다. 반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영원하신 분처럼, 반복은 언제나 현재이고 언제나 미래이다.

"반복은 가능성을 임신하고 있다."

그 순간에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자아는 계속해서 새로워지는 자아이다. 과거에 여러 번 선택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선택은 미래에 길을 열어준다. 영원하신 분처럼, 반복은 가능성을 임신하고 있다. 그러나, 영원하신 분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면, 반복은 벌거벗은 인내가 된다. 시치푸스 신화처럼, 같은 바위를 같은 언덕으로 굴려올리지만 다시 굴러떨어질 과업처럼 헛수고가 되고 만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선택 행위를 할 때에만, 반복은 가치있고 의미있다. 의미있는 정체성을 가지려면 반복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의미있는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시도하는 여러 방법들과 반복은 대비가 된다. 소크라테스나 전도서의 저자는 "새 것은 낡은 것이 된다"는 태도를 취했다.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실존의 의미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해 아래 새 것이 없기 때문이다"(전 1:9). 《반복》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있는데, 전반부는 한 청년의 연애 이야기이다. 이 청년은 연인을 즐거워하기보다도 그 사랑했던 연인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더 즐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최고의 유익한 경험을 되살리고 자기 자신을 회복하려고 베를린으로 왕복여행(a return trip)을 떠난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심리학 실험이다. 그 실험은 재난이 되었다. 그 청년은 과거를 되살리려고 시도함으로써 그는 새로움과 의미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빼앗겼음을 배운다. 참된 반복이 있다면, 영원한 경험을 복사함으로써 그 반복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반복》의 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 분량이 짧다. 여기서는 반복에 대한 윤리적 탐험을 한다. (전반부는 반복에 대한 심미적 탐험이었나?) 그 윤리가는 의미있는 반복이 이루어지려면 책임있는 자기 선택(responsible self-choice)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 또한 실패로 끝난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무리 많은 훈련을 하고 성품의 지속성*?을 유지한다할지라도, 깨어지고 죄악된 자아를 온전하게 회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하신 그 분때문에, 낡은 것이 새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영원성의 반복은 단순히 인생의 반복이 아니다. 영원성의 반복은 인생을 구속한다(redeems). 이 책에 키르케고르의 자전적 이야기와 함축이 강하게 내포된 것을 독자는 용서하기 바란다. 실연당한 후에 심미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삶의 목적을 되짚어보려는 젊은이의 이야기는 바로 쇠렌의 이야기이다. 《반복》이 출판되기 몇 개월 전에, 쇠렌은 레기나가 그를 증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베를린으로 떠나가 버렸다. 《반복》은 떠나보낸 연인과의 사랑이 회복될 가능성을 충만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인쇄소에 넘기지 전에, 레기나가 프리츠 슐레겔 씨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쇠렌이 알게 된다. 레기나가 다른 남자와 약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원고를 수정 보완하여, 절망하여 영적으로 회복한다는 "종교적 의미"를 추가로 늘렸고, 여성적 사랑(womanly love)의 지속성에 대한 모호한 언급들을 다수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반복》을 키르케고르의 직접적인 자서전으로 읽지 마시기 바란다. 그것은 잘못이다. 쇠렌은 인생을 취하여 그것을 새 것으로 각색하는 시인이라고 독자에게 일관되게 주지시킨다. 콘스탄틴 콘스탄티누스는 소설을 쓴 게 아니라, 자아가 된다는 의미와 자아가 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실험적 에세이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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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훈련 키르케고르 선집 2
키에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옮김 / 다산글방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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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은 혁명적인 해

1848년은 유럽에서 '혁명의 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였고, 키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과 《그리스도교 훈련》을 저술한 해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외부 세계를 바꾸려는 역사-변증법을 시도했고,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내면을 변혁시키는 실존-변증법을 시도했다. 모두 헤겔의 변증법에서 나왔기 때문에 헤겔 좌파와 우파로 분류된다.

1848년은 키르케고르에게 매우 중요한 해이며, 지적으로 가장 생산성이 높았던 해이다. 그뿐만 아니라, 키르케고르가 회심을 경험한 해이기도 하다. 그가 회심을 체험한 것은 1848년 4월 19일, 부활절 전의 수난주간이다. 1838년의 1차 회심에 이어 2차 회심이라고 볼 수 있다. 출판한 해는 다르지만, 《죽음에 이르는 병》, 《그리스도교 훈련》과 《저자로서 나의 저술을 읽는 관점》이라는 세 권의 중요한 책을 저술하였다. 키르케고르가 가장 애정을 가진 작품들이다.

《그리스도교 훈련》 출판이 늦어진 이유

1848년도에 저술했으나 《그리스도교 훈련》의 출판이 1년 반이나 늦어진 1850년 9월로 미루어진 이유가 있다.

첫째, 이 책은 높고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말한 책이다. 그리스도교 세계에 그리스도교를 다시 소개하기 위해서 쓰였다. 그래서 본명으로 출판하는 것이 꺼려져 고심하게 되었다. 이게 출판이 늦어진 이유이다.

둘째, 이 책은 기존의 그리스도교 사회와 문화를 격렬히 비판하는 책이다. 따라서 기존 사회의 반격이 우려가 되었다. 게다가 1848년에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졌다. 정부에 투자했던 채권이 평가절하되어 막대한 재산을 손해 보았다. 자칫 사회와 종교를 비판했다가 저술활동에 위협을 느끼고 생계에 위협을 느낄까 두려웠기에 출판이 늦어졌다고 한다. 메럴드 웨스트팔, 《신앙의 개념》 13과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교 훈련》에서 말하는 믿음을 정의하고 있다.

십자가 신학과 번영의 신학

십자가 신학의 모토는 "No Cross, No Crown"이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이 없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이 없다. 번영의 신학의 모토는 "Nothing is impossible", 불가능은 없다. 소위 성공 신학, 부와 건강의 축복을 말하는 것이다.

이 둘은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십자가 신학은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고난 가운데도 기뻐하는 신학이다. 고난 자체도 기뻐하는 신학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고난은 영원성에 눈을 뜨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에 눈을 뜨고 귀를 열게 한다. 고난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때문이다.

반면, 번영의 신학에서는 고난은 피해야 할 부정적인 것이다. 가난하고 병든 것은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신 것으로 본다. 사건과 사고 등을 하나님의 저주로 해석한다. 따라서 번영의 신학은 기복주의 신앙으로 흐르고, 영원한 세계보다 현세의 물질적인 축복과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하게 된다. 이는 성경적인 복음 아니다.

전투하는 교회와 찬양하는 교회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말한다. 예수님이 싸운 영적 싸움의 결과를 찬양하고 누리는 교회에 그쳐서는 안된다. 참된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라고 주장한다. 우리도 동일하게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좁은 길, 진리의 길, 고난의 길에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기독교는 찬송하고 예배하고 승리하신 주님을 높이는데 안주해서는 안 된다. 나도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한다.

복음의 말씀에 공감한다는 것은 감동하여 눈물 흘리는데 그쳐서는 안되고, 그분이 걸어간 좁은 길과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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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 코펜하겐 1849년 쇠얀 키에르케고어 시리즈 3
쇠얀 키에르케고어 지음, 임춘갑 옮김 / 치우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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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는 가명저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안티-클리마쿠스는 나보다 높다. 엄청나게 높은 그리스도인이다." 안티-클리마쿠스는 그리스도교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에 대한 기독교적, 심리학적 해설이다.

절망과 우울

절망과 우울은 다르다. 우울은 슬픔이며 뇌속에 있는 화학물질이 균형을 잃은 상태이다. 절망하지 않고도 우울할 수 있다. 반대로 절망하면서도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다. 절망하면서도 안락하게 산다는 것은 자신이 절망의 상태임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절망하고 우울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탁월함을 의미한다. 동물은 절망하지 않는다.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인간의 탁월함이 부패했을 때 절망하고 우울하게 된다. 구원이란, 인간의 존귀함과 탁월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절망이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것이다. 절망이란, 참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절망이란, 참 자아가 되기를 꺼려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를 꺼려하는 상태가 바로 절망이다. 절망은 실존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해서 진정성이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절망한 사람은 군중속에 숨는다. 군중속에 파묻혀서 두려움과 부담을 덜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절망은 복움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을 가리킨다. 절망은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병, 죽어가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질병을 말한다. 죽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자살을 하지만, 자살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절망이다. 역설적으로 절망은 복음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도 하지만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것을 '절망의 변증법'이라고 한다. 절망의 종류에는 나약함의 절망(여성적 절망)과 저항의 절망(남성적 절망)이 있다. 절망을 의식할 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아를 정립하는 힘

이 책에서 인간에 대한 유명한 정의가 등장한다.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은 관계적 특징을 가진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 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하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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