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축제
FR.슐라이어마허 지음, 최신한 옮김, 최경락 그림 / 문학사상사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성탄축제> 포스트모던적인 책, 신학의 칸트!!?? 개념적으로 기독교에 접근하기보다는, 감각과 직관으로 기독교에 접근했다. 그래서 아이들(소피), 죽어가다가 살아난 아기, 유아세례, 갓난아기(거듭남을 상징함), 여자들의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의도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아님을 상징하는 듯하다. 


비판적인 사람인 레온하르트의 입을 통해서, 성탄의 사건은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고 거룩한 제의를 통해서 성탄축제가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성육신의 구속의 사건은 역사적인 논증이기보다는, 이성적인 설명보다는, 아이들이나 여자들의 상상력과 직관과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따라서 상상력과 직관과 감각을 일깨우는 것은 종교적인 축제이며, 그 중심에는 음악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이들의 종교교육에 대한 혜안을 제시한다. 음악이나 기쁨의 축제를 통한 성탄의 의미를 전달하는 종교교육이다. 더구나, 일반 민중들은 체계적이고 교리적으로 성서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따라서, 종교는 감정이며, 그 감정을 움직이는 것은 종교적 축제이며, 음악이라고 한다. 만일, 기독교가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다면, 기독교의 진리를 위해 헌신하고 신뢰할 이유가 무엇이던가? 종교가 감정이라면 절대적 신의식이라면, 한편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일치, 겸손히 신의 다가옴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곧 기도와 사랑. 기도와 사랑이 그리스도인이다. 


따라서 교리적인 접근보다도 사랑의 실천, 사랑의 삶을 강조하게 되는군. 오덕호교수가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에서 말하고 있듯이, 불신자에게는 믿음이 최고이며, 신자에게는 사랑이 최고라는 말과 일맥통한다.  SK의 <사랑의 역사>를 다시 한번 깊이 새겨봐야 되겠군. 믿음과 행위, 믿음과 사랑을 이분화시킬 것이 아니라, 하나도 통합된 것으로 봐야겠다. 지성과 의지가 함께 중생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1. 우리는 회중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의 회중교육은 지나치게 교리적이지 않은가? 성탄의 시간에 오직 설교자만 신나고, 성도들은 무감각하거나 지루하다!(이 대목이 충격이다.) '성탄의 의미'를 찾기 힘들지 않은가? 

2. 기독교는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는 명제가 사실인가? 기독교는 얼마만큼 역사를 필요로 하며, 얼마만큼 역사의 한계를 느끼는가? * SK와 토니킴은 '영원한 것은 역사적인 출발점을 가졌다'라고 주장한다. 

3.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너무도 이성을 거부하는 것 아닌가? 이성의 한계를 강조하는 칸트와 일맥통하는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