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읽어본 김영하 작가의 작품이다. 김영하라는 이름은 자주 접했지만 그의 책을 읽어볼 생각은 없었는데 책 제목이 눈에 띄어서 궁금증에 읽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에 대한 장편 소설인 줄 알고 펼쳤는데 단편집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소설에서 알려주지는 않는다. 서술자가 헛것을 본 건지 아니면 현대인들의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빚어낸 사건인 것인지…. 각 단편의 결말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열린 결말이다.소설적인 재미가 있는 책이다. 허구성이 짙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딱히 어떠한 명확한 교훈을 주지는 않는다. 순간순간 느껴지는 감정에서 오는 여운이 있는 책이다. 기억에 남는 단편은 ‘비상구’와 ‘바람이 분다’이다. 둘 작품 다 요즘 말로 하자면 노란 장판 감성이 짙게 깔렸다. 가난에 찌든 주인공들이 삶을 구질구질하게 느끼면서도 그 와중에 낭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걸 보면 90년대에 대한 향수가 느껴진다. 왜 굳이 90년대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비상구’는 흔히 말하는 밑바닥 인생의 두 주인공이 최악으로 달려가는 이야기인데, 여기 남자주인공한테서 김첨지의 냄새가 난다. 여자친구가 성매매 업계에서 물건으로서 이리저리 팔리는데도 거기서 구제할 생각은 없는데 또 성매수자들한테 뚜들겨 맞는 꼴은 못 보아서 때린 사람한테 복수하려다가 인생 종치게 되는 이야기가 뭔가 김첨지가 자기 아내 아픈데도 뚜들겨 패고 잘 해주지도 못하면서 또 죽을 때 되니까 밥 한번 먹이려다 결국 못 먹이고 저 세상으로 보내게 되는 서사랑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여친 패지는 않았으니 김첨지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지…. ‘바람이 분다’는 외로운 두 사람이 만나서 세계 여행 떠나려고 돈 모으다가 결국 남자 혼자만 가게 되는 이야기인데 주인공들의 직업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는다. 불법 CD 복제해서 파는 주인공들은 정말 처음 본다. 빛도 낮도 밤도 모르고 PC 통신으로 불법을 저지르는 주인공들이 마치 구룡성채에 살고 있는 거 같아서 재미있었다.전체적으로 흥미롭게 본 소설임에도 별점이 두 개밖에 안되는 이유는 여성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 구식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나오는 족족 무조건 성적 대상화를 하고 무조건 최소 수위가 키스인 성적 접촉은 꼭 들어가며 (피뢰침에서 갑자기 여자 주인공이랑 남자 인물을 키스시켜서 황당했다. 그럴 타이밍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성관계 도중 여자가 엄마 같이 느껴진다는 서술도 자주 나온다. 여자는 성녀 아니면 창녀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너무나 잘 드러나서 거북하다. 그리고 여성 인물들의 성격이 두 가지 종류밖에 없다. 신비로우면서 백치기가 있거나 정신병자처럼 신경질 내고 집착하는 식이다. 아, 섹스에 적극적인 건 모든 여성 인물의 공통사항이다. 아쉽다.
나는 김지영과 열살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공감의 탄식이 나왔다. 친구들과 모여서 이 책이 화두가 되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거 완전 내 이야기 아냐? 내 이야기 소설로 쓴 줄 알았어. 시간이 십년이나 흘러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는 달라진게 없다는 증거이다. 요즘 뉴스를 보니까 이 책이 일본, 대만에서도 베스트셀러란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도 출판 예정이며 프랑스판 번역가 말에 따르면 프랑스 여성들도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아주 많단다. 이런 걸 보면 한국여성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닌거 같다. 혹시 전세계에 통용되는 이야기인건가? 그렇다면 정말 충격이다. 전세계 여성들의 삶이 거기서 거기라니 얼마나 충격적인가?이 소설은 정말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본것 처럼 자세하다. 읽다가 이런 것 까지 찝어내다니 하고 놀랐던 부분은 김지영의 남자 짝꿍에 관한 일회이다. 나도 어렸을때 선생님이나 부모님한테 남자 짝꿍이 괴롭힌다고 이르면 늘상 듣던 소리를 김지영도 똑같이 들었다. 아니, 순서가 바뀌었다. 김지영이 듣던 소리를 십년이 지나 태어난 나도 똑같이 들은 것이다. 하긴 그 시절을 지나온 선생님들과 부모님이 다른 관점에서 나를 위로했다면 그게 더 놀라울 일 일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남자애들은 관심있으면 더 괴롭힌단다. 하지만 여자애들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왜 남자애들은 좋아하는 상대에게 온전히 정석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상대를 괴롭혀서 고통스럽게 하는것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해야하는 것인가? 그것이 잘못됐다고 진지하게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큰 상처가 되어서 커서도 늘 머리 한구석이 남아 문득 떠올랐는데 이 책에서 김지영이 그 소리를 듣자 어이없어 했다는 구절이 나오니 은근 위로가 되었다. 공감 받은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이 책의 힘은 독자가 공감 받았다고 느끼게끔 하는데에 있는건지도 모른다. 김지영이 겪었던 사건들을 나열하고 그때 느꼈던 감정을 간결하게 서술했는데도 이렇게 위로가 되는건 왜일까? 그건 여태까지 아무도 나에게 내가 겪은것이 차별이며 그 일들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이 유별나고 예민한게 아니라고 말해준적이 없기 때문이다.나는 이 소설이 2000년대 이후의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중요 소설중 하나임에 적극 동의한다. 성별 불문, 나이 불문의 많은 이들이 읽기를 바란다. 하지만 내 이후의 세대들에게는 공감받지 못하는 소설이 되기를 바란다. 단지 한 시대의 사회를 들여다보고 과거를 간접 경험하게 해주는 역할로만 그치는 소설이 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