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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의 정원
거트루드 지킬 지음, 이승민 옮김 / 정은문고 / 2019년 8월
평점 :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기쁨은 거트루드 지킬(1843~1932)이라는
조경 예술가를 알게 된 것이다.
1910년대 영국에는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Arts & Craft movement)>이라는 문화 운동이
시작된다. 산업혁명이 몰아치며 모든 것이 기계화되기 시작하고, 규격화된
대량생산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이런 획일성을 부정하고 장인정신으로 되돌아가서 수공업의 아름다움을 되살리자는 운동이 펼쳐졌다.
지킬은 “예술의 정원”이라는 컨셉을 만들어낸다.
정원이라는
공간도 하나의 작품을 만들 듯, 건물, 풍경과의 조화를 고려해
정성스럽게 연출하기 시작했다. 해박한 식물학 지식과 조경 기술을 기초 삼아, 세련된 예술 감각을 더한 그의 정원은 한 폭의 캔버스가 된다. 살아
있는 꽃으로 생기 넘치는 그림을 매일 그린다.
그가 디자인한 정원은 유럽, 미국 등 4백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정원사들의 정원사’로 불리는 지킬은 예술가이자
정원가로서의 분명한 철학을 보여준다.
이 책은 지킬이 쓴 저서인 <숲과 정원>, <집과 정원>, <어린이와 정원> 에 실린 일부 글들을 발췌하여 다시 엮은 에세이집이다.
씨앗 뿌리기와
잡초 뽑는 시기, 각기 다른 씨앗을 심는 방법 등 정원을 가꾸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이 들어 있긴
하지만,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지식보다는 개성 있는 삶의 태도와 자연의 것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마음, 인내와 여유를 발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색적인 글들이 더 많이 담겨 있어 일반 독자에게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식물의 소리, 색깔, 냄새, 질감을 매끄럽게 표현하는 능력은 늘 관찰하고 노동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었을 테다.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과 감각과 인내가 쌓아낸 지식이 글로 쓰여 빛난다.
군데군데 다양한 씨앗과 뿌리의 모양을 아기자기한 손그림으로 그려 넣어 보는 재미도 더해준다. (그 중에서도 고양이 평면도와 등고양이변
삼각형이 최고?!)
정원에 함께 사는 생명을 바라보는 너그러운 시선은 함께 실린 사진 속에서 드러난다.
<정원가의 열두달>을 쓴 카렐 차페크가 ‘인간은 누구나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꼭 정원사가 아니어도 마당이 없어도 작은 화분 하나를 기르는 마음만으로도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특히 지킬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꽃밭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원을 사랑하는 사람의 섬세한 손길, 다정한 시선, 면밀한 관찰 습관을 본받고 싶다.
검은 색 하나를 보고도
그을음의 칙칙한 검갈색, 콩꽃의 반점처럼 벨벳 같은 검갈색,
이베리아 붓꽃의 아랫꽃잎 조각의 순수한 검은색을 연상하는 남다른 안목을 갖고 싶다.
정원에 사는 생명이 내는 소리를 예민하게 듣고, 자연의 빛깔을 헤아리고
식물의 내음을 음미할 줄 아는 감각을 지니고 싶다.
물론 그런 것들을 얻으려면 하루의 대부분을 뙤약볕에서 허리도 못 편 채 쩔쩔매고, 꿈틀대는 뱀과 같은 사악한 고무 호스와 사투를 벌여야 한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어쩌겠는가? 뭐든 공짜는 없는 것을.
정원에서
배우는 삶의 철학은 언제나 진솔하다.
광활한 대지의 황량함이나 웅장한 산맥의 압도적인 풍광 앞에서만
자연의 신비로운 힘과 인간의 무력함을 느끼는 것은 아닐 테다.
내 곁의 작은 정원이 계절마다 빛깔을 달리하고,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모습에서도
소박한 경이로움을 맛볼 수 있을 테다.
지킬에게는 닮고 싶은 삶의 태도가 너무나 많다. 누구에게나 배움을 갈구했던 자세와
평생을 간직했던 열정은 그중 으뜸이다. 언젠가 야옹이들이 사는 아름다운 지킬의 정원에 한
번쯤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