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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 지음, 요제프 차페크 그림, 배경린 옮김, 조혜령 감수 / 펜연필독약 / 2019년 6월
평점 :
일시품절
계절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곧바로 정원가! 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쩜 이토록 매력이 넘치는 책을 만났을까? 체코의 국민작가 카렐 차페크가 평생 자신의 정원을 손수 가꾼 정원가로서의 열정과 경험을 담아 쓴 수필집이다. 지극정성으로 정원을 보살핀 ‘덕후’로서, 돌보고 가꾸는 삶에 대한 예찬을 펼치고 있다.
일 년의 시간, 자연의 변화를 계절이라는 덩어리로 묶어 인식하는 우리와는 달리 정원가는 열두 달로 나누어 생각한다.
달마다 꼭 해야만 하는 중요한 임무가 있고, 꼭 일어나는 정해진 자연의 법칙도 있다. 그달에만 볼 수 있는 사소하게 스치는 아름다움을 듬뿍 느끼기도 한다.
모든 열두 달이 그들에게는 똑같이 매우 중요한 시기다. 한 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따라가며 읽고만 있는데도 숨이 찰 만큼, 그들은 내내 바쁜 마음으로 노심초사해가며 땅과 식물을 돌본다.
땅 파서 씨 뿌리면 알아서 자랄테니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작은 정원을 가꾸는데도 이토록 많은 노동과 정성이 들어간다는 것이 놀라웠다.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엉덩이를 한껏 추켜올린 채로 흙 사이에 파묻혀 있는 어정쩡한 모습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모든 자연의 섭리가 그렇듯
인간의 의지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은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전능한 듯 보이지만 완벽하게 무능한 존재의 불완전함에 대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차페크는 말한다. 비를 내리고 바람과 햇살을 쐬어주며 자연이 가꾸고 있는 정원에서, 정원가는 그저 자잘한 잔심부름을 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여유롭고 일관된 자연의 흐름과는 달리 인간은 평생을 이리저리 고군분투하는 존재가 아니겠느냐며,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되 나머지는 그저 내맡기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정원에서 배운다.
작은 정원에서 얻는 삶의 커다란 진리를 글 속에 잔잔하게 녹여내는 와중에,
녹록지 않은 육체노동과 정신적 고충을 토로하는 에피소드들이 마치 시트콤 같은 상황처럼 우스꽝스럽게 펼쳐진다. 그때마다 절묘한 심리묘사와 익살스러운 투정을 어찌나 재미있게 글과 그림으로 장단 맞추며 담아내는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란 정말 힘들다.
땅속에서 우리 모르게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을 비밀스러운 일들을,
스스로 부딪혀가며 인내하는 삶을,
더 멋지고 좋은 것은 인생의 한 발짝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즐거운 기대감을,
겨울에 할 일을 제대로 알아야 봄을 맞을 자격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은 흙 위에 선 철학자다.
돌보고, 격려하고, 기다리고, 걱정하고, 바라보는 이 모든 행복을 누구보다 깊이 느낄 줄 아는 정원가의 마음은 어머니다.
정원에 대한 헌신적인 애정과 하소연을 빙자한 자랑을 듣다 보면 마음 깊숙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농부의 본능이 꿈틀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무언가를 심고 가꾸어 보려 해도 그럴 땅이 없고, 흙을 밟아볼 일조차 드문 도시인들에게 이 즐거운 고생담은 새로운 로망으로 다가올 것 같다.
카렐 차페크의 형인 삽화가 요제프 차페크의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그림이 이 책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해준다. 분명 따뜻한 위로가 되고 잔잔한 치유가 될 것이다. 꼭 한번 만나 보길 권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