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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추억 - 한가람 대본집
한가람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8년 2월
평점 :
올해 만난 드라마 중에 최고로 매력적인 드라마 [한여름의 추억]
이 추억의 여운을 오래도록 느끼고 간직할 수 있는 대본집을 갖게 되다니 너무 두근두근하고 이렇게 설레는 책은 오랜만이다. 가까이 곁에 두고 조금씩 아껴서 읽고 싶을 만큼 소중하고 감성적인 글들이 너무 아름답다.

기억하고 싶었던 드라마 속 장면들이 사진으로 함께 수록되어 있어서 더욱 행복하다. 특히 첫 장면이었던 소소한 느낌의 오직 한여름만의 공간이었던 집 이미지도 담겨있어서 너무 좋다. 여름의 집은 이 드라마의 여러 장면 중에 나에게는 가장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다. 여름을 생각하면 이 집의 이미지가 함께 떠오를 만큼.

한여름은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드라마의 여성 캐릭터와는 사뭇 다른 캐릭터라서 더욱 관심과 애정이 가는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최강희 님의 팬이기도 하지만 특히나 이 드라마에서 최강희 님은 한여름 그 자체로 보일 만큼 너무 잘 어울렸던 것 같다.
한여름이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이런 모든 인생의 반짝거리는 순간들이 지나가며 한 단계씩 성숙되어 가는 과정들이 많은 감정 이입을 불러일으키며 푹 빠져서 대본을 읽게 된다.

여러 시점과 인물들이 왔다 갔다 핑퐁처럼 장면들이 옮겨지는 것도 새롭고 매력적으로 읽힌다. 각 인물들의 관계가 현재의 관계와 딱히 바로 맞닿지 않은 상황에 있어서는 냉정하게 느껴질 만큼 매우 현실적이게도 느껴지는데. 그 부분들에 억지스러운 판타지를 입히지 않아서 좋았다.
주인공 한여름 또한 연인 관계에 있어서는 상대에 따라 어설프기도 이기적이기도 했으면서도. 반대로 상처받는 상황에서는 참 외로운 어른이가 되는 것 같다.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제훈의 이기심으로 인해, 여름이 본인의 옛 모습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한여름이 가진 대단한 매력은 그런 본인의 모습에도 어떤 식으로든 똑 부러지게 자신의 모습을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용기인 것 같다. 상대에게 자신의 상황을 꾸밈없이 솔직히 표현하며 답을 얻어내는 모습은 몇 번을 반복해서 읽을 만큼 매력적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먹먹하게 남는 관계는 여름이 늘 가장 미안해하고 안타까웠던 해준과의 인연이었다. 그렇지만 이 또한 언제나 그렇듯 아쉽긴 해도 시간 속에서 흘러가 흩어져 버리는 듯한 모습도 너무 인상적이면서 많이 공감이 갔다.

누구나 상황에 따라 어리고 유치하고.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그렇게 서로의 세계를 유영해 가는 모습들을 따듯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이 드라마의 대본은 느낌이 참 좋다.
사람은 누구나 관계에 있어서 끝이라는 게 존재하고. 영원한 건 없지만. 깊은 인연이었던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든 간에 인생에 있어서 허튼 인연이란 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존재들은 관심에서 쉽게 잊히더라도 우주 어딘가에는 흔적으로 남아있겠지. 언젠가는 허무하게 꺼져버릴 인생들이지만 한여름처럼 뜨겁게 빛났던 시간들 하나씩은 기억 속에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p.121
저는요. 외로워요.
외로워서 누가 내 이름 한 번만 불러줘도 울컥하고
밥 먹었냐는 그 흔한 인사에도 따뜻해져요.
스치기만 해도 움찔하고,
마주 보기만 해도 뜨끔하고,
그러다가 떠나버리면, 말도 못하게 시려요.
-p.133
지금의 내가 너무 거지 같아서
누군가한테 사랑받았던 일들이
전부… 꿈같아.
-p.163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구겨서 버린 편지 속에
두 갈래로 찢긴 사진 속에
평생 열지 않을 상자 속에
서랍의 끝머리와 삭제된 메일함 속에
고함 한 번 지르고 온 바다 속에
그리고 언젠가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
그러니
그곳에서 내가 가끔 울고 있더라도
나를 불쌍하다 생각하진 말아요.
난,
빛나고 아팠어.
모두 네 덕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