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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ㅣ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평점 :
첫 장 「우리의 정류장」을 읽고 내가 겪은 거의 모든 이별들이 떠올랐다. 단 10페이지만으로. 나는 그때부터 어떤 운명을 직감했던 것 같다. 이 책에 대한 감상은 쓸 수 있겠지만, 분석은 힘들 것이고 김이설 작가의 소설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이 책은 힘든 일상에서 잠깐 벗어날 수 있게 했고, 이별과 몰두의 밤들을 가져다줬다. 시간을 내서 손으로 꾹꾹 눌러 적으며 필사해봐야겠다.
‘나’는 여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8년간의 연애를 끝낸다. ‘그 사람’으로 불리는 ‘나’의 애인은 언제든지 그 자리에 있는 ‘정류장’처럼 머물러 있다. 내가 이 애틋한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동생의 두 아이를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기준에서 ‘쓸모없는’ 인간인 ‘나’는, 집안에서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 즉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전담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전쟁 같은 매일을 보내면서도 꼭 가족들이 자는 밤에 짬을 내어 시를 쓰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글자들을 필사한다. ‘필사’라는 행위는 무엇이라도 써야 한다는 ‘나’의 의지이며, 씀으로써 인식되는 ‘나’라는 존재의 확인이다. ‘나’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난 후, 혼자 살아보겠다고 짐을 싸서 나가게 되고 그 이후 ‘그 사람’의 집에 머물면서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을 할 때에는 누리지 못한 당연한 ‘일상’들을 경험한다. 이후, ‘내’가 시인으로 등단했는지, ‘그 사람’과 결국 결혼을 했는지, ‘나’의 동생은 남편과 이혼을 했는지 등이 모두 밝혀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열린 결말을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에선 괜찮았다. 시작인지 끝인지 어디쯤 왔는지 알 수 없는 정류장이었던 이야기들……. 나는 ‘나’의 이야기가 일상처럼 와닿았고, 관찰카메라처럼 뭉툭하게 잘린 단면만 보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계속 살아갈 것 같고 소설 속 ‘내’가 부서지지 않고 계속 존재하기를 바란다. 평범한 삶의 전제조건인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기를 응원한다. 앞서 말한 부분들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필사를 위해 등장하는 시들, 지극한 단어들로 밑바닥에 있던 감정들을 자극하는 문장들을 읽을 수 있어 행복했고 또 울컥했다.
쓸 것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쓸 것들은 오히려 많아졌다. 그러나 쓸 시간이 없었고, 머릿속을 정리할 공간이 없었고, 나에게 집중할 틈이 없었다. 이제는 조용히, 고즈넉하게, 쓸쓸히, 오롯이, 동떨어져서, 가만히, 차분하게 같은 단어들을 누릴 수 없었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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